관악기를 크기별로 분류할 때 상대적으로 큰 것을 이르는 일반 명칭, 또는 대금의 이칭, 서양악기 ‘플륫(flute)’의 한자 표기
일반적으로 횡적 류의 악기를 대적ㆍ중적ㆍ소적으로 분류할 때 상대적으로 큰 것을 가리키며 대금의 이칭으로도 사용되었다. 또한 대한제국기에 수용된 양악기를 한자로 기록할 때 ‘플륫(flute)’을 대적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의 음악 기록 항목에서 대금ㆍ중금ㆍ소금을 ‘삼죽적(三竹笛)’이라 하고, 『동사강목』에서는 신라의 관악기를 소개하면서 삼죽의 금(笒)을 적과 동일시하여 ‘금즉적야(笒卽笛也)’라는 설명을 덧붙인 바 있다. 1433년(세종 15) 5월에 문소전 제례악의 악기 편성이 제정되었는데, 당하악의 악기 목록에 ‘대금’ 대신 ‘대적’이라는 명칭을 사용했고, 1448(세종 30)년에 내불당(內佛堂) 경찬회(慶讚會)를 위한 궁중 악대 편성에 대적ㆍ중적ㆍ소적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세종실록』 권132 「오례」의 ‘가례서례’ 에 수록된 악기 그림에 ‘대적’이 등재되어 있는데 악기의 세부 묘사 및 관대에 뚫린 구멍의 위치와 수가 『악학궤범』 대금과는 차이가 있으나 전체적인 형태는 대금과 유사하다.
대금을 대적으로 표기한 예는 20세기 초반에 대금 명인 강백천(姜白川, 1898~1982)을 소개하면서 ‘대적의 천재’라 일컬은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한편, 『증보문헌비고』 「악고」 7, 광무 4년(1900)에 기록된 양악대의 악기 목록 중 ‘플륫(flute)’은 대적(大笛)으로, ‘피콜로(piccolo)’는 소적(小笛)이라는 한자 명칭으로 표기되었다.
대적이라는 명칭을 통해 관악기를 문자로 표기할 때의 일반적 관행을 알 수 있다. 주로 횡적류 관악기 ‘금(笒)’이 ‘적(笛’)과 동일시되었으며, 크기별로 구분하여 큰 것을 ‘대적’이라 하였다. 송방송의 『한겨레음악대사전』에서는 『세종실록』 「오례」 ‘가례서례’의 대적을 대금과 별개의 악기로 보고 세종 이후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단정하였으나, 이 점은 재고를 요한다.
송방송, 『한겨레음악대사전』, 보고사, 2012. 홍난파, 「음악상의 신지식」, 『삼광』 창간호, 1919.02.
송혜진(宋惠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