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북
북을 크기별로 구분할 때 작은 북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북을 가리키는 한자 명칭. 또는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 각종 궁중 의례 및 연주에 편성되었던 북의 명칭.
궁중과 민간에서 큰 북이라는 의미로 폭넓게 사용되어 온 일반 명칭이며, 역사적으로는 궁중 음악 및 군례에 편성되었던 ‘대고’의 용례가 다수 확인된다. 그러나 그 형태와 규격이 동일한 것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대고라는 명칭의 최초 기록은 『삼국사기』 중 음악관련 내용을 기록한 '신라악 '조이다. 이 문장에서 삼현ㆍ삼죽ㆍ박판과 함께 가무에 동반된 타악기를 대고라 하였는데, 그 상세한 형태는 알 수 없다. 고려시대에는 궁궐 정전에 배치되어 임금의 동선에 사용된 대고의 용도가 『고려사』 「예지」에 기술되었고, 『고려사』 「악지」에는 1114년에 북송으로부터 온 대성신악(大晟新樂) 악기 중의 하나로 대고가 포함되어 있다. 이 때 북송에서 온 대고는 ‘좌대(座臺)’를 갖춘 북으로 조선의 궁중 악무에 사용된 교방고와 같은 형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악학궤범』의 교방고 항목에서 대고와 교방고를 동일한 것으로 설명한 내용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왕 행차 때에 치는 엄고(嚴鼓) 및 아악에 사용되는 진고(晉鼓)를 대고와 동일시 한 기록이 보이고, 『악학궤범』의 전정고취(殿庭鼓吹)ㆍ전후고취(殿後鼓吹)ㆍ정전예연여기악공배립(正殿禮宴女妓樂工排立) 및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의 초입배열도(初入排列圖), 시종회무도(始終回舞圖), 〈 정대업(定大業) 초입배열도〉에 대고를 편성한 예가 확인되며, 그 의물 중의 하나로 도설되어 있다.
이 밖에 세종 때의 내불당 불교 의례에 편성된 악대에도 대고가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상의 여러 용례에 사용된 북의 형태가 모두 동일한 것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한편, 조선 후기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관련 기록 및 『만기요람(萬機要覽)』 등의 병서에 군영 악기의 하나로 대고가 들어있다. 조선통신사 일행을 그린 뉴욕 시립박물관 소장 〈조선통신사행렬도권〉에는 긴 행렬의 선두를 인도하는 대고와 소고가 묘사되어 있는데, ‘술통형(barrel)’의 북을 긴 장대에 걸어 메고 가면서 치는 형태이며 북면에 삼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다. 또 일본 문헌 『조선신사래빙기록(朝鮮信使來聘記錄)』(1861)에는 북통에 붉은 칠을 한 입고 형태의 대고 그림이 제시되어 있다.
궁중 의례에 사용된 대고는 모두 나무통에 포를 씌우고 채색과 문양으로 장식하며, 가죽을 광두정으로 고정시킨 ‘못북’ 형태의 북이다. 이동하면서 칠 때는 북통에 박힌 고리에 끈을 끼워 연주자가 몸에 메고 치거나, 두 사람이 긴 장대를 이용해 북을 메고, 다른 한 사람이 북을 쳤고, 고정 위치에서 연주할 때는 북 받침대를 이용하기도 했다.
대고는 일반적으로 큰 북이라는 뜻 외에 시대와 용도에 따라 각기 다른 독립적인 정체성을 갖춘 북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 『악학궤범』 『종묘의궤』 『만기요람(萬機要覽)』
송혜진, 「사전류 ‘북’ 관련 항목 현황 진단 및 소견」 『한국음악연구』 70, 2021. 辛基秀ㆍ仲尾宏 , 『大系 朝鮮通信使信使 : 善隣と友好の記錄』 (3), 東京: 明石書店, 1995.
송혜진(宋惠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