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무용(宮中舞踊), 궁중정재(宮中呈才), 궁중무(宮中舞), 관변정재(官邊呈才), 교방정재(敎坊呈才)
고려 및 조선시대에 궁중이나 관아에서 베푸는 큰 연회 때에 기녀(妓女)나 무동(舞童)들이 윗사람에게 드리던 악ㆍ가ㆍ무(樂歌舞) 예술의 재예(才藝)
고려와 조선시대 임금과 신하의 예연(禮宴) 또는 사신(使臣) 접대 등, 상하(上下) 간의 위로 및 축하 모임의 연회 때 연행하는 연향악(宴饗樂: 악가무 포함)을 통칭 정재라고 한다. 정재는 모든 종류의 잔치[연향]에서 연행되던 연주음악과 악장, 춤이 어우러진 악ㆍ가ㆍ무 종합 예술 행위이다. 정재는 당악정재(唐樂呈才)와 향악정재(鄕樂呈才)로 구분되는데, 옛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음악인 당악에 맞추어 연행하는 춤은 당악정재라 하고, 우리 고유의 음악인 향악에 맞추어 우리말로 노래하며 추는 춤은 향악정재라고 했다. 조선 후기에는 효명세자(孝明世子)에 의해 창제되거나 기존의 악을 수정 보완한 정재가 대거 제작되었는데, 우리말 노래를 한문 가사로 바꾸어 재편하고, 연주음악의 악기 구성도 당악기와 향악기의 구분 없이 섞어 연주함으로써 당악정재와 향악정재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현재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조선시대 연행된 정재의 수는 60여편을 헤아린다. 국립국악원에서는 일제강점기 이왕직아악부의 무동 출신 김천흥(金千興, 1909~2007)에 의해 당시 학습한 정재 12편을 기초로, 나머지를 다수 재현하여 50여 정재를 전승하고 있다.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베푼 공식 회합에서 전문 예인(藝人)인 교방(敎坊)의 기녀가 당악(唐樂)의 악가무를 연행한 기록은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서 처음 볼 수 있다. 송(宋)에서 고려(高麗)로 유입된 외래악(外來樂)을 당악(唐樂)이라고 했는데, 그에 대비된 기존 고유의 악가무는 향악 또는 속악(俗樂)이라고 구분했다. 고려조 사신[빈객]을 위로하는 연향에서는 “반드시 당악을 연주하고, 이어서 향악을 연주했다.”(『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고 했다. 다만, 『고려사』에는 ‘정재(呈才)’라는 단어가 전체 원문에서 검색되지 않는다. 관련 용어로 당악, 속악, 향악 등이 검색될 뿐이다.
반면, 조선 태조 4년(1395)에 “전악서(典樂署)의 여악들이 가요(歌謠)와 정재(呈才)를 드렸다”(『태조실록(太祖實錄)』)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통해 ‘정재’는 곧 ‘여악의 가무 올림’이라는 뜻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후 〈헌선도정재(獻仙桃呈才)〉, 〈오양선정재(五羊仙呈才)〉, 〈무고정재(舞鼓呈才)〉, 〈아박정재(牙拍呈才)〉, 〈처용정재(處容呈才)〉와 같이, 각 춤 이름 뒤에 ***정재라는 용어를 붙여서 사용한 기록들을 『태종실록(太宗實錄)』이나 『세종실록(世宗實錄)』 등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악학궤범(樂學軌範)』 권3에서 권5까지에 등재된 당악정재와 향악정재의 문장 설명형 무보(舞譜)를 통해서 외래의 당악과 고유 향악 춤-정재의 진행과 구성 및 변화과정을 종합적으로 살필 수 있다.
그러므로 정재를 악가무 종합형식의 춤으로 인식한 것은 조선 태조 조부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당악정재와 향악정재를 명확하게 구분한 문헌은 1493년(성종 24)에 편찬된 『악학궤범』으로부터다. 조선의 궁중이나 관속 연향에서의 정재란 기녀(여령 혹은 여악)나 무동이 연행하는 가무악(歌舞樂)을 가리키는 특수 용어로 정착했다.
한편, 정재는 본래 춤뿐만 아니라 창우(倡優)의 각종 잡희(雜戲)와 잡극(雜劇)을 연행하는 행위를 이르던 말이었으며, 그 연행자를 정재인(呈才人)이라고도 했다.
○ 역사 변천 과정
연향악으로서 당악정재의 역사적 출발점은 고려 문종(文宗, 1046~1083) 27년(1073) 2월 연등회(燃燈會) 때로 볼 수 있다. 교방의 여제자(女弟子) 진경(眞卿) 등 13인이 〈답사행(踏沙行)〉 가무(歌舞)를 연행한 기록을 통해 당악으로 연주된 춤-정재는 이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답사행〉은 송(宋) 사악(詞樂) 곡 중 하나인데, 고려에서는 이때 교방 여제자들에 의해 처음 연행된 사실을 『고려사』 「악지」에서 볼 수 있다. 같은 해 11월 팔관회(八關會) 때에는 교방 여제자 초영(楚英)이가 〈포구락(抛毬樂)〉과 〈구장기별기(九張機別伎)〉를 새로 전했다고 한다. 이 역시 당악정재의 정착과 확산을 나타낸다.
고려에서는 이처럼 중국 송나라로부터 수용된 사악을 바탕으로 연행하는 가무(歌舞)를 ‘당악’이라고 했고, 이 당악과 구분된 고유의 가무악을 ‘향악’또는 ‘속악’이라고 했다. 고려조는 빈객에게 연회를 베풀 때 반드시 당악을 먼저 연주하고, 이어서 향악을 연주하게 했다”(『高麗史』 「列傳」, 趙浚)고 한다. 또, 고려조에는 향악을 원구제(圜丘祭), 사직제(社稷祭), 석전제(釋奠祭), 태묘(太廟) 등 여러 제향에서도 아악(雅樂)과 번갈아 연주했다.
하지만 조선 세종대에 이르러 제사악을 크게 정비하였고, 그와 더불어 연향악의 쓰임도 명확해졌다. 오례(五禮) 의식 제도를 법제화하고, 그에 따른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에 수반되는 잔치의 연향악의 가무를 정재라고 했다. 『악학궤범』에는 예악(禮樂)으로서의 당악정재 14편과 향악정재 11편이 기록되어 있다.
정재사에서 가장 크게 변화를 일으킨 시기는 순조(純祖) 28년(1828)과 29년(1829)인데, 효명세자(孝明世子)가 어머니 순원왕후(純元王后)와 아버지 순조의 40세 생신과 등극 30주년을 뜻 깊게 축하 및 축수하기 위해 23편의 새로운 정재를 진작(進爵)과 진찬(進饌)의 연향악으로 올렸기 때문이다.
그밖에, 정조 19년(1795)에는 외방의 교방정재인 〈첨수무(尖袖舞)〉, 〈검무(劍舞)〉, 〈선유락(船遊樂)〉이 궁중연향인 봉수당진찬연(奉壽堂進饌宴)에 처음 도입되었다. 헌종(憲宗) 14년(1848)에는 〈향령무(響鈴舞)〉가, 고종 10년(1873)에는 〈항장무(項莊舞)〉, 24년(1887)에는 〈사자무(獅子舞)〉가 외방에서 유행하다가 궁중으로 유입되었다.
조선 후기 전국의 외방 교방에서는 각 지방의 향기(鄕妓)들에 의해 관아(官衙)의 연향에서 정재를 연행해 왔다. 각 지역의 교방 기녀들은 소속 지역의 관내 춤 종목을 전승함은 물론 창작개발 하기도 했으며, 지역 간에 유행을 선도하고 서로 뒤따르는 일도 있었다. 경상도 경주지방을 대표하던 정재로는 〈처용무〉와 〈황창무〉가 있는데, 이중 〈황창무〉는 궁중연향에서는 끝내 연행되지 못한 종목이었다.
조선의 정재들은 일제강점기 권번 기녀들에게 계승되었으나, 해방 후 기생에 대한 인식 저하와 활동의 위축과 제약으로 그들을 통한 전승은 거의 단절되었다. 다행히 1967년 〈진주검무〉와 1968년 〈통영승전무〉가 각각 진주와 통영 권번의 정재를 계승하여 국가무형유산(구명칭: 중요무형문화재, 국가무형문화재)으로 지정되었고, 현재까지 보존 전승되고 있다.
한편, 이왕직아악부에서는 1923년 순종(純宗)의 50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1922년 가을에 무동(舞童)을 선발하여 교육하였고, 1923년 3월 25일의 생신잔치 때 여흥으로 무동의 정재를 공연하였다. 당시 무동으로 참여했던 김천흥은 이왕직아악부에서 학습한 12편 정재(가인전목단, 장생보연지무, 연백복지무, 무고, 포구락, 보상무, 수연장, 춘앵전, 봉래의, 만수무, 향령무, 처용무)를 기초로 해방 후 국립국악원 무용단의 공연 활동을 이끌며, 전통 정재들을 복원 재현하였다. 그로써 국립국악원 무용단은 고려와 조선으로부터 현재까지 정재를 계승하고 보존 전승하는 중심 단체이자 기관이 되었다.
○ 내용
조선 전기의 정재는 『악학궤범』을 근거로 당악정재와 향악정재의 구분이 비교적 명확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문헌은 『조선왕조실록』과 『진연ㆍ진찬ㆍ진작의궤』에서 향악정재와 당악정재의 쓰임과 변화 양상을 살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1828년(순조 28)과 1829년(순조 29)에 효명세자가 창제하거나 재구성한 정재들은 향악 악장을 한시 형식으로 변화시킨 사례도 있었다. 한편 전국 외방의 『읍지(邑志)』, 그리고 개인 문집류를 통해 사신이나 통신사의 기행문 안에서도 여러 지역의 교방정재(관변정재)들의 연행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외방 교방정재의 명칭은 지역마다 달리 붙여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정재무도홀기』에서는 『악학궤범』부터 조선 후기로 전승된 궁중연향의 정재와 효명세자에 의해 창제된 정재들의 춤진행 형식과 인원 구성 등을 알 수 있다.
궁중 및 교방정재가 기록된 문헌을 중심으로 그 변천 양상과 각 정재의 기록상 연원을 알 수 있도록 표를 정리하여 제시하겠다.
시대 | 문헌 근거 | 구분 | 정재명 | 연원/전래 |
---|---|---|---|---|
삼국 | 고려사‧악지 | 향악 | 동동(아박), 무애, 처용무, | 고구려, 신라 |
고려 | 무고 | 고려 | ||
당악 | 답사행가무, 구장기별기, 왕모대가무, 포구락 | 고려 문종년간 | ||
헌선도, 수연장, 오양선, 포구락, 연화대 | 고려 | |||
조선 전기 |
당악정재 | |||
악학궤범 | 육화대, 곡파 | 고려(?) | ||
금척(몽금척), 수보록 | 조선 태조(정도전) | |||
근천정, 수명명 | 조선 태종(하륜) | |||
하황은, 하성명 | 조선 세종(변계량) | |||
성택 | 조선 세종 | |||
향악정재 | 보태평, 정대업, 봉래의 | 조선 세종 | ||
아박, 향발, 무고, 학무 | 고려(?) | |||
학‧연화대‧처용무합설 | 조선 세조 | |||
교방가요, 문덕곡 | 조선(?) | |||
조선 중‧후기 |
읍지(邑志)평양지, 성천지 등 | 향악 | 무고(무수), 처용, 향발, 발도가(선유락), 아박, 무동(광수무), 학무, 검무, 사자무, 초무(능파무, 입춤) | 16~19세기 |
당악 | 포구락, 연화대, 여무(헌도반/헌선도) | |||
조선후기 | 왕조실록 | 향악 | 초무, 아박, 향발, 무고, 광수무, 처용무 | 숙‧영조외연(外宴) |
진연‧진찬 의궤 | 당악 | 헌선도, 포구락, 연화대, 금척, 하황은, 연화대, 수연장, | 영‧정조내연(內宴) | |
향악 | 무고, 아박, 향발, 학무, 처용무, 첨수무, 검무, 선유락 | |||
진작의궤 | 향악 | 망선문, 경풍도, 만수무, 헌천화, 춘대옥촉, 보상무, 향령무, 영지무, 박접무, 침향춘, 연화무, 춘앵전, 춘광호, 첩승무, 최화무, 가인전목단, 무산향 | 순조28 부편(효명세자/연경당) | |
고구려무, 공막무, 무고, 향발, 아박, 포구락 | *부편의주 외 정재 | |||
심전고 연계기정 (황해도 황주) |
향악 | 고무(무고, 북춤), 처용무, 선악유기고(선유락), 아박무, 검무, 사자무, 학무, 홍문연(항장무), 쟁강무(향령), 관동무 | 1829 (박사호) | |
당악 | 포락(포구락), 헌반도(헌선도) | |||
진찬의궤 | 향악정재 | 향발, 아박, 무고, 검기대(검무), 선유락, 춘앵전, 첨수무, 무애무, 보상무, 사선무, | 순조29 정‧부편 (효명세자, 향악악장 한시(漢詩)화) | |
당악정재 | 몽금척, 장생보연지무, 헌선도, 포구락, 수연장, 하황은, 연화대, 오양선, 연백복지무, 제수창, 최화무 | |||
몽유연행록 평안도 평양, 안주, 의주 등 |
향악 | 고무(무고), 향발, 아박, 쟁무(쟁강무, 향령), 항장무, 승무, 발도가(선유락) | 1848 (이유준) | |
당악 | 포구락 | |||
각재집 경상 진주 |
향악 | 처용, 선악(선유락), 무동(광수무), 쟁공(향령) | 16세기(하항) | |
당주집 경상 경주 |
당악 | 포구락, 연화대, 반도(헌선도) | 1867년(박종) | |
향악 | 정자(무고), 처용, 향발, 주무(선유락), 아박, 무동(광수), 초무, 학무, 황창무 | |||
교방가요 경상 진주 |
당악의 향악화 | 육화대, 헌선도, 포구락 | 1872년(정현석) | |
향악 | 연화대(+학무), 고무(무고), 인무(釼舞: 검무, 칼춤), 선악(선유락), 항장무, 아박무, 향발무, 처용무, 황창무, 승무 | |||
한양가 | 당악 | 포구락, 몽금척 | 1844년(한산거사) | |
향악 | 북춤(무고), 처용무, 배떠나기(선유락), 칼춤, 입춤, 학춤, 항장춤, 쟁강춤, 대무남무(對舞男舞)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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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조 | - | ※ 승무, 황창무를 제외한 대부분의 정재가 대한제국기까지 궁중 연향에 활용되었음. 1873년에는 선천에서 항장무을 도입. 1877에는 성천에서 사자무를 궁중연향에 도입하여 1902년까지 연행되었음. |
1868~1902년 |
진찬‧진작의궤 |
정재는 고려 문종 27년(1073) 이래 조선을 거쳐 1천여 년의 역사를 이어 온 대한민국 전통 악가무 문화의 정수이다. 궁중을 비롯한 전국 교방에서 학습되고 연행된 정재는 악가무의 통합적 실행과 학문으로서는 물론, 개별 반주음악의 전승과 연구, 또 가사 문학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현재로 전승된 정재의 맥은 일제강점기 이왕직아악부의 12편 무동정재를 기반으로 한다. 지금까지 복원 재현되어 연행되고 있는 정재는 50여 편이다. 이들 정재는 국립국악원의 한국 전통 공연예술 문화의 꽃으로서, 또 세계적으로는 한국 고유의 전통문화를 대표할 수 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각재집(覺齋集)』 『고려사(高麗史)』 『교방가요(敎坊歌謠)』 『당주집(鐺洲集)』 『몽유연행록(夢遊燕行錄)』 『성천지(成川誌)』 『세종실록(世宗實錄)』 『심전고(心田稿)』, 『악학궤범(樂學軌範)』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진연의궤(進宴儀軌)』 『진작의궤(進爵儀軌)』 『진찬의궤(進饌儀軌)』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평양지(平壤志)』
김영희 외, 『한국춤통사』, 보고사, 2014. 김천흥, 『심소 김천흥 무악 칠십년』, 민속원, 1995. 김천흥, 『심소 김천흥 선생님의 우리춤 이야기』, 민속원, 2005. 이혜구 역주, 『신역 악학궤범』, 국립국악원, 2000. 정현석, 『교방가요』, 보고사, 2002. 차주환, 『고려사악지』, 을유문화사, 1972. 이종숙, 「순종 탄신 오순 만찬연의 무용정재 연구」, 『무용역사기록학』 42, 무용역사기록학회, 2016. 이종숙, 「이왕직아악부의 정재 음악 연구: 이병성, 성경린 무보를 중심으로」, 『공연문화연구』 34, 한국공연문화학회, 2017. 이종숙, 「조선후기 외방향기의 교방 춤 연구」, 『무형유산』 11, 국립무형유산원, 2021. 조경아, 「조선후기 의궤를 통해 본 정재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9.
이종숙(李鍾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