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梨園), 이원(梨院), 법부(法部), 기생청(妓生廳), 기생방(妓生房), 기방(妓房), 장춘원(長春院)
고려와 조선의 연향악(宴饗樂) 교습과 연행, 관리 업무를 전담하던 기구
교방은 고려와 조선에서 연향(宴饗) 때 연주하는 악가무를 학습시키고, 그 학습한 악을 실행하는 여악(女樂)과 악공(樂工) 등이 소속된 악무(樂舞)의 관리 기구이다. 고려 때 송(宋)으로부터 교방의 당악과 그 춤이 수용되었다. 조선은 고려 교방의 전통을 이어서 궁중 및 지방 관아의 연향악에 필요한 악인들을 교육ㆍ양성ㆍ관리하는 기구로 전국의 큰 관아에 부속 청(廳)을 설치하였다. 조선 예조(禮曹) 산하 장악원(掌樂院)의 부속 지방기구 중 하나이다.
고려시대 교방의 존재는 제8대 국왕 현종(顯宗)의 즉위년(1009) 2월에 “교방을 파하고, 궁녀 100여 인을 풀어주었다”(『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 권4, 현종)고 한 사료에서 처음 확인된다. 이 사료는 918년 건국된 고려에 현종이 즉위하기 이전부터 이미 교방이 존재했음을 나타낸다. 『고려사』 「악지(樂志)」에 의하면, 문종(文宗) 27년(1073)의 2월 연등회(燃燈會)와 11월 팔관회(八關會) 때 교방의 여제자(女弟子) 진경(眞卿)과 초영(楚英)이 송(宋)에서 전래한 〈답사행(踏沙行)〉과 〈포구락(抛毬樂)〉, 〈구장기별기(九張機別伎)〉를 연행하였다. 이후 고려시대 문집에서는 궁중 혹은 고관의 연향에서 여기(女妓)나 여동(女童)이 가무(歌舞)로써 흥을 도운 사료도 볼 수 있다. 교방이 설립된 주요 목적은 “사신(使臣) 행차의 고단함을 위로하고 여행의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태평성대를 장식하는 일이다”(『평양지』 권3 교방)라고 하였다.
교방은 본래 중국 당나라 초기에 황실의 연향악을 교습하고 관리하던 기구로서 시작되어 청(淸)나라까지 계승되었다. 교방을 가장 활성화한 당 현종(玄宗)은 태상악공(太常樂工)의 자제(子弟: 자식) 300명에게 ‘사죽지희(絲竹之戱=관현악)’를 하게 하여 즐겼다. 그들을 서경(西京: 西安, 長安)의 금원(禁苑:궁궐의 정원) 가까운 곳에 두었으므로, ‘황제제자(皇帝弟子)’ 또는 ‘이원제자(梨園弟子)’라고 이름하였다. 동경(東京: 洛陽)에도 좌‧우교방을 각각 설치하여 악가무와 각종 기예를 연향에서 공연하도록 했다. 주로 여악(女樂) 또는 여제자인 여기(女妓)가 고취악(鼓吹樂)과 백희(百戲)의 가무악을 담당했다. 송(宋)대에는 나이 어린 소녀로 조직된 소아대무(小兒隊舞)와 성인 여제자대무(女弟子隊舞)로 구분된 무대(舞隊)가 있었다.
송나라로 계승된 당의 교방제도를 모방한 고려에서는 연향악 담당 기관을 ‘교방’이라고 했으며, 조선에서는 ‘이원(梨園)’이라고 별칭하기도 했다. 그 소속 악공(樂工)과 무대(舞隊)는 ‘이원제자’ 또는 ‘교방제자’라고 했다. 고려 교방의 ‘여제자’는 대체로 성인 여악을 뜻하며, 나이 어린 동기(童妓)는 여동(女童) 혹은 소아(小娥)라 하여, 고려조에서 학‧연화대(鶴蓮花臺) 춤을 연행했다. 본래 고려의 악무(樂務) 기관의 공식 명칭은 대악서(大樂署)와 관현방(管絃坊)인데, 문종 30년(1077)에 설치되었으며 교방은 이들 양부(兩部)에 관계되어 연향악 연행 활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두 기관과 어떻게 연관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조선의 교방은 중앙 예조(禮曹) 산하 장악원(掌樂院) 소속 연향악 관련 관서로서, 지방관아(地方官衙) 부속 관청(官廳)의 하나이다. 행정단위인 목(牧)ㆍ주(州)ㆍ부(府)ㆍ군(郡)ㆍ현(縣)에 이르기까지 지방 대부분 지역에 교방이 설치되어 있었다.
○ 신분 및 위상
고려와 조선의 교방 관련 악인(樂人)인 악공과 기생, 또 재인(才人), 광대(廣大) 등은 모두 천민(賤民)으로서 관노비(官奴婢) 신분이었다. 그들의 부모 가운데 한 사람만 노비여도 노비로 살아야 했으며, 부모의 업을 세습ㆍ계승했다. 특히 관기 소생의 딸은 수모법(隨母法)에 따라서 어머니의 신역(身役)을 계승했으며, 이런 관기 제도는 조선 말까지 존속했다.
고려 교방은 문종 30년(1076)에 설치한 중앙 기관인 대악ㆍ관현방(大樂‧管絃房)에 흡수되었다고 한다. 그 관련 직책은 당무업 겸 창사업(唐舞業 兼 唱詞業), 당무사교위(唐舞師校尉), 가무박업사(歌舞拍業師) 등이 있었음을 『고려사』「식화지(食貨志)」 녹봉(祿俸) 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각각 녹봉을 받는 지위에 있던 이들을 총괄하여 이끈 수장은 교방악관(敎坊樂官)을 인솔한 태악령(太樂令)이었다.
한편, 조선의 예조(禮曹)는 연향(燕享)과 제사(祭祀)의 예악(禮樂)을 총괄했다. 중앙의 예악 관제로 볼 때, 무대(舞隊)는 5품이나 유품(流品) 밖의 관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무대는 채화 복두(綵畫幞頭)ㆍ청포(靑袍)ㆍ각대(角帶)ㆍ조화(皂靴)를 착용한다고 했으므로, 여기에서의 무대는 남성 무악인(舞樂人)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악학궤범』권3에서 무용수 무리를 ‘무대’라고 한 것과는 신분적 구분이 필요해 보인다. 따라서 조선의 여악(女樂)은 천민 신분으로서 세습‧계승된 것은 확인되지만, 자세한 관제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 외방 관아에 부속된 교방의 여악과 악공들은 관노비로서 관노비안(官奴婢案)에 기재된 천인 신분이었다고 한다.
고려와 조선시대 교방은 악가무를 교습하고 전승 관리한 기관으로서, 예악 문화의 기저(基底)에 해당한다. 교방의 정재(呈才) 전승은 일제강점기 기생조합과 권번을 관통하여, 국가문화유산인 〈진주검무〉와 <통영승전무〉로 계승, 보존되고 있다. 궁중 및 관아에서 베푸는 연향악 문화를 보존 전승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한편, 일제강점기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는 조선 왕실의 제사 음악을 담당하면서 장악원을 계승하였고, 1922년에는 양성소원을 무동(舞童)으로 육성하여 조선시대 여악의 연회악, 즉 연향의 악가무를 전승하였다. 일제강점기 기생의 정재 전승이 단절된 사실과는 달리, 궁중악 및 궁중정재로 조선 교방 전통의 맥도 한편 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전통은 국립국악원을 통해 계승되고 있다.
『舊唐書』 『國朝寶鑑』 『高麗史』 『敎坊記』 『谿谷集』 『東國李相國後集』 『東文選』 『明宗實錄』 『世祖實錄』 『世宗實錄』 『林下筆記』 『太祖實錄』 『太宗實錄』 『平壤志』 『平壤續志』 『英祖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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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숙(李鍾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