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죽(戱竹), 집장(執杖), 인무(引舞)
고려시대 전승된 당악정재(唐樂呈才)의 무용수를 인도하는 도구. 또는 그 도구를 손에 들고 춤에 참여하는 사람.
죽간자는 고려시대에 중국에서 전래한 춤의 도구이다. 또한 그것을 손에 들고 춤에 참여하는 ‘죽간자’라는 특정 역할의 무용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무구(舞具)로서의 죽간자는 긴 대나무 장대 끝에 세죽(細竹: 가는 대나무) 100개를 묶어 붉은색 칠을 하고, 세죽 끝에 금박을 입히고, 또 수정구슬[水晶珠]을 꿰어 달아맨 것이다. 세죽 끝에 매단 수정구슬은 대나무에 열린 열매를 모방한 모습이다. 한편 무원으로서의 죽간자는 주로 당악정재를 연행할 때, 왕모(王母)나 협무(挾舞) 등 무용수의 등장과 퇴장을 선도(先導)하며, 각 정재의 의미를 구호(口號)로써 설명하여 보고하고, 각 춤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또 〈몽금척(夢金尺)〉ㆍ〈연백복지무(演百福之舞)〉ㆍ〈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에서는 회무(回舞)하는 무용수를 선도하여 함께 돌기도 했다.
죽간자는 고려 문종(文宗) 27년(1073) 11월 팔관회 때, 교방(敎坊) 여제자 초영(楚英)이 새로 전래한 〈포구락(抛毬樂)〉과 함께 무구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무도사전(中國舞蹈詞典)』에는 중국 송(宋)나라의 참군색(參軍色)이 죽간자를 손에 들고 춤에 임하므로, 그를 죽간자라 이름한다고 소개하였다. 또한 죽간자는 소아대(小兒隊)나 여제자대(女弟子隊)의 선두에서 함께 염송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송대의 소아대에 속한 〈자지(柘枝)〉 일명 고려의 〈연화대(蓮花臺)〉와 여제자대의 〈포구락〉이 당악정재로서 전래했을 때, 그 격식 및 춤의 절차와 함께 수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는 당악정재인 〈헌선도(獻仙桃)〉, 〈수연장(壽延長)〉, 〈오양선(五羊仙)〉, 〈포구락〉, 〈연화대〉를 연행할 때, 2인의 죽간자가 언제나 각 춤의 대열 선두에서 입장하여 구호로써 춤을 시작한다고 하였다.
춤을 모두 마치고 퇴장할 때도 죽간자가 다시 선두에 나서 퇴구호를 한 후, 나머지 무용수들이 죽간자 2인의 인도로 차차 퇴장한다. 진양(陳暘) 『악서(樂書)』의 동무(童舞) 즉 소아대의 “인무(引舞) 2인”은 ‘죽간자’의 역할에 붙여진 다른 이름이다.
조선 전기 『악학궤범(樂學軌範)』의 〈금척(金尺)〉, 일명 〈몽금척(夢金尺)〉은 유일하게 다른 정재들과 달리 죽간자가 회무에 참여하여 족자 이하 무용수들을 인도하며 돌기를 함께 연행했다. 조선 후기 순조(純祖) 때 효명세자(孝明世子)에 의해 창제된 〈연백복지무〉와 〈장생보연지무〉도 죽간자가 무용수들과 함께 회무를 했다. 한편 〈봉래의(鳳來儀)〉는 『악학궤범』에 향악정재로 기재되었으나, 한문가사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10장을 노래하는 〈여민락〉이 당악형식으로 취급되어 죽간자가 등장한다. 이때는 죽간자가 함께 회무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선 후기 『정재무도홀기』에 따르면, 〈봉래의〉의 〈치화평지곡(향당교주)〉에서는 무용수가 〈용비어천가〉의 적인장(狄人章)부터 오호장(嗚呼章)까지 한문 노래로 창사하며, 죽간자가 선두에서 무용수와 함께 회무하는 양상으로 변화했다.
18세기 후반의 문집인 『당주집(鐺洲集)』, 「동경유록(東京遊錄)」의 신라십무(新羅十舞)에는 일곱 번째가 <반도(蟠桃)〉, 즉 〈헌선도〉인데, 여기에서는 죽간자를 ‘집장(執杖)’이라고 표기하였다. 또 1828년의 무자(戊子) 『진작의궤(進爵儀軌)』에는 ‘희죽(戲竹)’이라고 했다.
중국 청 건륭제(乾隆帝)가 1751년(건륭 16)에 그의 어머니 숭경황태후(崇慶皇太后)의 60회 생신 축하를 위해 자녕궁(慈寧宮)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를 그린 「자녕연희도(慈寧燕喜圖)」에 죽간자의 모습이 담겼다.
이 화보에서 죽간자는 월대 양쪽으로 벌려 선 모습이어서 춤을 인도하는 역할은 아닌 듯하다. 청에서도 죽간자는 연회를 베푸는 공간에서 건륭제의 태평성대를 칭송하는 덕치(德治)의 뜻을 함축‧상징했을 것으로 보인다.
① 구조와 형태
무구인 죽간자의 주재료는 대나무이다. 『악학궤범』 당악정재 의물 도설에 따르면, 대나무 자루[柄]의 원통 지름은 1치[寸]이고, 목두부터 하단까지의 길이는 7자[尺] 7치이다. 목두는 등조각[片籘]으로 감아 매고, 하단은 납물을 들인[鑞染] 쇠로 장식한다[鐵粧]. 목두 위에 가는 대나무[細竹] 100개를 삽입하여 붉은칠[朱漆]을 하고 붉은실[紅絲]로 그것을 묶는다. 이것의 길이는 구슬로부터 목두까지 2자 8치이다. 그리고 모든 세죽 끝 1치에 금박지(金箔紙)를 입히고, 수정구슬을 꿴다고 하였다. 죽간자는 2개가 한 쌍이다.
죽간자를 잡는 방법에 대한 기록은 『악학궤범』이나 『정재무도홀기』에서 찾을 수 없다. 국립국악원 무용단에서는 나란히 선 2인의 죽간자가 자신의 앞에 놓인 긴 장대를 바깥쪽 손으로 가슴 부위 위치에서 잡고, 두 사람의 안쪽 손으로 배꼽 정도의 위치를 잡는다. 따라서 마주보고[相對] 서 있을 때는 무대 객석 쪽에서 보이는 손이 장대의 위쪽을 잡은 모습이 된다.
② 죽간자의 입‧퇴장 음악
조선 전기 죽간자의 입퇴장 음악은 대체로 ***인자(引子)라는 명칭이 붙었다. 『악학궤범』 권4의 당악정재 종목의 입퇴장 음악을 표로 정리하여 이해를 돕겠다.
시용 당악정재명 | 등장 음악 | 퇴장 음악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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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선도(獻仙桃) | 회팔선인자(會八仙引子) | 천년만세인자(千年萬歲引子) |
고려로부터 계승한 조선 당악정재 ※(고ㆍ악)은 『고려사ㆍ악지』 |
수연장(壽延長) | 연대청인자(宴大淸引子) | 중강령(中腔令) | |
오양선(五羊仙) | 오운개서조인자(五雲開瑞朝引子) | 오운개서조인자 | |
포구락(抛毬樂) | 절화삼대(折花三臺) (고‧악) 절화령(折花令) |
수룡음인쇄(水龍吟引殺) (고‧악) 오운개서조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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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대(蓮花臺) | 전인자(前引子) (고‧악) 오운개서조인자 |
후인자(後引子) (고‧악) 오운개서조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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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척(金尺) | 오운개서조인자 | 오운개서조인자 |
조선 전기에 창제한 당악정재 |
수보록(受寶籙) | 회팔선인자 | 회팔선인자 | |
근천정(覲天庭) | 오운개서조인자 | 오운개서조인자 | |
수명명(受明命) | 회팔선인자 | 회팔선인자 | |
하황은(荷皇恩) | 회팔선인자 | 회팔선인자 | |
하성명(賀聖明) | 천년만세인자 | 천년만세인자 | |
성택(聖澤) | 천년만세인자 | 천년만세인자 | |
육화대(六花隊) | 천년만세인자 | 천년만세인자 | 조선 전기에 등장한 당악정재 |
곡파(曲破) | 회팔선인자 | 회팔선인자 |
〈수연장〉의 퇴장 음악과 〈포구락〉의 등장 음악은 인자(引子)가 아닌 영(令) 형식의 음악이다. 고려조 당악정재의 입퇴장 음악은 조선조에 창제된 당악정재에 비해 다양한 구성이다. 그러나 〈금척〉 이하의 신당악정재의 입퇴장 음악은 시작과 끝이 동일하다.
반면 조선 후기 『정재무도홀기』에 의하면, 조선 전기의 입퇴장 음악인 ***인자는 더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당악정재의 죽간자 입퇴장 때에는 거의 〈보허자령(步虛子令)〉이 연주되었다. 〈봉래의〉는 죽간자 등장 때에 〈여민락령(與民樂令)〉을 사용했고, 〈포구락〉의 경우는 죽간자가 등장하므로, 형식면에서는 여전히 당악정재 계열로 구분하지만, 그 음악은 〈향당교주(鄕唐交奏)〉로 연주했다.
③ 죽간자의 구호(口號) 내용과 역할
당악정재의 경우 무대에서 연행할 무구가 우선 준비되고, 무용수들이 공연할 첫 입장 배열[初入排列]을 갖추면, 음악이 먼저 시작된다. 악사(樂師)의 박(拍) 소리를 신호로 죽간자 2인이 족도(足蹈) 하면서 앞으로 나와 좌우로 나뉘어서 선다. 음악이 그치고, 죽간자는 진구호(進口號)를 한다. 진구호의 내용은 대체로 춤의 중심인물인 왕모(王母)나 무대(舞隊)가 임금을 뵈러 온 뜻과 목적을 말하고 춤추기를 허락받거나 인사를 올리는 것이다. 〈헌선도〉의 진구호를 예로 보면 아래와 같다.
〈헌선도〉 진구호
邈在鼇臺(막재오대) 아득한 오대에 있다가
來朝鳳闕(내조봉궐) 봉궐로 임금님 찾아뵙고
奉千年之美實(봉천년지미실) 천년의 아름다운 열매 받들어
呈萬祿之休祥(정만록지휴상) 만복의 좋은 상서 바치옵니다
敢冒宸顔(감모신안) 감히 임금님 뵈옵고,
謹進口號(근진구호) 삼가 구호 올립니다.
해석: 전설의 신선이 사는 아주 먼 오대(鰲臺)에서 임금을 뵈러 궁궐에 이르렀습니다. 천년의 열매인 선도(仙桃)를 받들고 왔으니 임금께 만복의 큰 상서로움을 바치렵니다. 이에 감히 임금님을 뵈옵고, 조심스럽게 말씀을 올립니다.
구호를 마치면 악사가 박을 치고 〈회팔선인자〉를 다시 연주한다. 음악에 맞추어서 죽간자 2인이 족도하다가 박을 치면, 뒤로 물러나서 좌우로 나누어 선다. 또 박을 치면 왕모와 좌우의 협무가 춤추며 나와서 절차대로 춤을 추어서 모두 다 마친다.
왕모와 협무의 창사와 춤이 전부 끝나고, 박을 치면 죽간자 2인이 좌우 협무의 앞으로 나와서 선다. 〈천년만세인자〉가 연주되고, 박을 치면 죽간자 2인은 족도하며 조금 앞으로 나와 서고, 음악이 그치면 퇴구호를 한다.
〈헌선도〉 퇴구호
斂霞裾而少退(염하거이소퇴) 놀빛 옷자락 여미고 잠시 물러나
指雲路以言旋(지운로이언선) 구름길 지향하여 돌아가려 하옵니다
再拜階前(재배계전) 뜰 앞에서 두 번 절하고
相將好去(상장호거) 서로 이끌고 떠나가렵니다.
해석: 노을 빛깔의 붉은 치맛자락을 여미면서, 떠나 온 오대로 구름길을 따라서 되돌아가렵니다. 임금님께 재배를 올리고, 일행 모두 함께 떠나가겠습니다.
퇴구호를 마치면 박을 쳐서 음악 〈천년만세인자〉를 연주하고, 죽간자 2인은 족도한다. 박을 치면 뒤로 물러나고, 왕모와 좌우의 협무가 협수무(挾手舞)로 춤추며 앞으로 나왔다가 박을 치면 염수족도 한다. 박을 치면 퇴수무로 춤추며 물러가고 음악이 그친다.
죽간자는 이상의 절차를 수행함으로써 등‧퇴장 때에 잔치 주인공에게 구호로써 해당 춤의 의미를 알리고, 춤을 선도하는 역할을 완수하였다.
그 밖에 죽간자는 〈몽금척〉, 〈연백복지무〉, 〈장생보연지무, 〈봉래의〉에서 춤 연행 중 회무를 위해 무용수들 앞에서 인도[선도]하는 역할도 하였다.
④ 죽간자의 무도(舞圖) 자리
『악학궤범』에 따르면, 죽간자 2인이 등장하는 당악정재 14편과 〈봉래의〉에서의 죽간자는 모든 무원(위의(威儀) 포함)들의 선두에서 북쪽을 향해 족도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진구호를 마치면 물러가서 좌우로 갈라선다고 했는데, 이때의 위치는 대체로 무용수들 뒤쪽에 좌우 양편으로 나뉘어 북쪽을 향해 서 있게 된다. 각 춤을 절차대로 모두 마치면, 마지막 과정으로 죽간자 2인이 무용수들 앞으로 나와 퇴구호를 하고, 이어 무용수들을 인도하여 춤 자리에서 퇴장한다. 한편 〈몽금척〉, 〈수보록(受寶籙)〉, 〈근천정(覲天庭)〉 등 조선 전기 창제된 7편의 정재는 조선 왕조의 위업(偉業) 혹은 사신(使臣) 위로를 내용으로 기재한 족자(簇子)가 있는데, 이것을 받든 족자는 죽간자 2인 사이에서 3인이 나란히 입장하여 함께 구호하였다. 진구호를 연행한 후에 뒤로 물러날 때는 족자는 앞으로 나아간 그 자리에 남고, 죽간자만 뒤로 물러나서 좌우로 나뉘어 북쪽을 향해 섰으며, 이후의 춤이 진행되었다.
조선 후기 『정재무도홀기』에 의하면, 3가지의 죽간자 연행 방식이 기록되어 있다. 첫째는 죽간자 2인이 ‘족도하고 나와 선다[足蹈而進立]’에서 다음 죽간자가 물러난다는 ‘퇴립(退立)’의 기록이 없는 것이다.{〈봉래의〉, 〈최화무(催花舞)〉, 〈제수창(帝壽昌)〉} 둘째는 구호를 마친 후, ‘족도하면서 물러나 선다[足蹈而退立]’로 기록된 것이다.{〈몽금척〉, 〈헌선도〉, 〈오양선〉, 〈포구락〉, 〈연화대〉, 〈육화대(六花隊)〉, 〈하황은(荷皇恩)〉, 〈연백복지무〉} 셋째는 구호를 마친 후, ‘조금 물러나서 서로 마주보고 선다[小退相對而舞]’로 기록된 것이다.{〈수연장〉, 〈장생보연지무〉} 이 세 가지 방식이 기록대로 지켜진 것인지, 기록자가 다음 진행을 미처 기재하지 못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국립국악원에서는 현재 당악정재를 연행할 때 죽간자가 무용수들을 인도하여 선두에서 무대(舞臺) 앞 관객 쪽으로 족도하여 나와 선다. 다음 구호(口號)를 하고, 뒤로 물러나는 데 무대의 좌우 앞쪽에서 나뉘어 마주보고 선 채 춤을 마칠 때까지 대기한다. 춤의 절차를 마치면, 죽간자는 다시 무대 앞으로 나와서 객석을 향하여 퇴구호를 하고, 무용수들과 함께 뒤로 물러나서 인사함으로써 해당 정재의 절차를 완료한다.
죽간자에 꿴 수정구슬은 죽실(竹實: 대나무 열매)을 의미한다. 죽실은 중국 전설 속의 길조(吉鳥)인 봉황(鳳凰)이 먹던 열매다. 대나무 중에는 60~120년을 1주기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종자가 있는데, 그처럼 귀한 죽실을 먹는 봉황은 하늘의 도를 온전히 받아 천하를 태평하게 다스린 이에게만 모습을 나타낸다고 한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는 황제(黃帝)가 황의(黃衣)와 황면(黃冕)을 갖추고 궁에서 재계하니, 봉황이 하늘을 가리며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에 재배하고 계수하여 하늘의 뜻을 받드니, “봉황이 동원(東園)의 오동나무 위에 깃들어서 죽실(竹實)을 먹고, 종신토록 떠나가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죽간자는 통치자의 덕행을 찬미하는 상징적 길조인 봉황과 그 먹이인 죽실을 통해 오래도록 태평성대를 이룬다는 의미를 갖게 된다. 이에 당악정재에서 죽간자의 인도로 춤이 연행되는 것은 잔치가 베풀어지는 연행공간이 성왕(聖王)의 성덕(盛德)으로 태평한 다스림의 시절임을 칭송하는 의미를 함축한 특징이 있다.
朴琮,『鐺洲集』 陳暘, 『樂書』 韓嬰,『韓詩外傳』 『高麗史』 「樂志」 『宋史』 「樂志」, 樂17 『樂學軌範』 국립국악원 편, 『進爵儀軌(戊子)‧進饌儀軌(己丑)』, 한국음악학자료총서3, 전통음악연구회, 1981. 국립국악원 편, 『時用舞譜‧呈才舞圖笏記』, 한국음악학자료총서4, 전통음악연구회, 1981.
국립국악원 편, 『한국음악학자료총서3 -進爵儀軌(戊子)ㆍ進饌儀軌(己丑-)』, 전통음악연구회, 1981. 국립국악원 편, 『한국음악학자료총서4 -時用舞譜ㆍ呈才舞圖笏記-』, 전통음악연구회, 1981. 김영희 외, 『한국춤통사』, 보고사, 2014. 류둥성, 『그림으로 보는 중국음악사』, 민속원, 2010. 손선숙, 『궁중정재 용어사전』, 민속원, 2005. 중국예술연구원무도연구소 편, 『中國舞蹈詞典』, 북경: 문화예술출판사, 1994.
이종숙(李鍾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