昭和(소화)4년 무의, 1929년 무의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 1897~1970) 부부의 1930년 7월 근친(覲親) 때, 이왕직(李王職) 주관의 위로 연향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종의 정재 소개용 프로그램 소책자
『무의』는 활자로 단면 인쇄된 23장(46면)짜리 소책자다. 이 책자에는 〈봉래의(鳳來儀)〉ㆍ〈무고(舞鼓)〉ㆍ〈처용무(處容舞)〉ㆍ〈춘앵전(春鶯囀)〉ㆍ〈향령무(響鈴舞)〉ㆍ〈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ㆍ〈수연장(壽延長)〉ㆍ〈만수무(萬壽舞)〉ㆍ〈보상무(寶相舞)〉ㆍ〈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의 10편 정재가 순서로 편성되어 있다. 각 정재의 제목 아래에는 그 춤의 유래(由來)와 설명이 간략히 소개되어 있다. 다음은 ‘○배열(排列)’ 항목 좌측 아래에 무도(舞圖: 무용수의 춤자리 배열 모습)나 춤의 순서(順序)가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무의(舞儀)’ 항목에는 춤의 실연(實演) 절차가 기록되어 있어서 각 1편의 정재에 대해 3부분으로 나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 소책자에 수록된 정재 10편은 이왕직아악부 아악부원양성소 제2기 출신 이병성(李炳星, 1909~1960)의 『창사와 정재철[唱詞及呈才綴]』(1931년 3월)에 수록된 10편 정재와 종목에서 일치한다. 또 제3기 출신인 성경린(成慶麟, 1911~2008)의 『이왕직아악부 무보』와도 일치한다. 성경린의 『노을에 띄운 가락』(1979)에 따르면, ‘순종황제의 3년 탈상’이 되어 이왕직 당국에서는 영친왕 내외가 오랜만에 근친하므로, 이때를 맞추어서 아악부에서는 그분들께 즐겁게 정재를 감상하도록 공연을 기획했다고 하였다. 이 잔치에서 이병성은 〈처용무〉를 추었고, 성경린은 무동으로서 그 외 정재를 실연(實演)했었다. 이 공연이 성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는 『매일신보』(1930.07.09.)에 의거하여 1930년 7월 10일이다. 이 날은 양전하가 주최하는 만찬회가 있었던 날이다. 동경에서 3년 만에 귀국한 영친왕 부부는 1930년 7월 7일 오후 7시에 경성역에 도착했고, 14일에 경성역을 출발했다.
이는 성경린의 ‘순종황제의 3년 탈상’ 기억과는 시기에 차이가 있다. 순종의 서거일은 1926년 4월 25일이므로, 이왕 양전하와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1989)는 1928년 5월 1일에 환국하여 3일에 탈상을 마치고, 12일에 경성역을 출발하였다(『동아일보』, 1928.05.02. 3면). 그 이후 3년 만인 1930년 7월에 다시 환국하여 아악부에서 준비한 정재를 관람했던 것이다. 이로 볼 때 『무의』 첫 면에 ‘昭和四年’(소화4년: 1929)이라고 메모한 것은 소장자에 의해 후대에 작성된 오류이므로 수정이 필요하다.
특히 이 책자는 1930년 7월, 영친왕 내외와 당시 총독부의 주요 인사들이 초대된 연향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종의 프로그램 팸플릿인 것이다. 따라서 3년 만에 환국한 이왕 양전하께 기쁨을 드리려 했던 이왕직 당국과 그 소속 아악부의 갸륵한 뜻이 잘 전달되었을 것이다.
○ 체재 및 규격
1책 23장(46면), 12.5cm×세로 17.8cm의 활자본 소책자
○ 소장처(자)
이흥구(李興九, 1940년생) [국가무형유산 학연화대합설무 보유자]
○ 구성 및 내용
책자는 현재 내용 면에서는 매우 중요한 자료지만, 복사본이라는 한계가 있다. 이 책자는 각 장 양면의 내용을 단면에 복사하여 페이지 순서를 정열하고 이를 철한 모습이다. 현 소장자 이흥구가 원소장자인 성경린에게 빌려서 복사한 지면을 차례로 엮은 것으로 보인다. 〈봉래의〉의 1(一)면 표기는 좌측에 있는데, 2(二)면은 우측에 표기되어 있다. 또한, 〈무고〉ㆍ〈처용무〉ㆍ〈춘앵전〉ㆍ〈향령무〉ㆍ〈가인전목단〉까지는 연번으로 표기되어 13(一三)면까지 있다. 다음에 이어진 〈수연장〉과 〈만수무〉는 연속 번호를 따르지 않고, 각각 1, 2면이 표기되어 있다. 〈보상무〉는 페이지 표기를 찾을 수 없고, 마지막 〈장생보연지무〉는 9(九)면부터 11(一一)면이 표기되어 있으며, 이것이 마지막 장이다. 이것으로 볼 때, 원본 책자는 각 장의 양면에 인쇄된 자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페이지의 쪽수가 연번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의문점이다.
『무의』는 1930년 7월 이왕직에서 준비한 영친왕 부부의 환국 잔치와 그 때 초대받은 귀빈들을 위해 활자로 인쇄 제작된 정재 공연의 프로그램이었을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 『정재무도홀기』와 유사하게 정재의 연행 순서와 그 내용을 참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자료라는데 의의가 있다. 그에 비해 이병성의 『창사와 정재철[唱詞及呈才綴]』은 1931년(소화6년) 3월에 작성한 무보 종류이므로, 『무의』와는 그 목적과 용도가 다른 성격의 기록물이다. 그리고 이병성의 기록을 모본으로 필사한 성경린의 『이왕직아악부 무보』 역시 무보의 종류이다. 이병성과 성경린의 10편 정재에 대한 춤 설명과 절차 및 음악 등은 『무의』보다 내용이 구체적이며, 실용적이다.
예를 들면, 『무의』의 〈처용무〉 음악은 〈봉황음〉 일기(一機)ㆍ중기(中機)ㆍ급기(急機)가 연주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병성과 성경린의 〈처용무〉 무보에는 〈수제천(壽齊天): 일명 횡지(빗가락)정읍〉ㆍ〈향당교주(鄕唐交奏)〉ㆍ〈중령산(中靈山)〉ㆍ〈세령산(細靈山)〉ㆍ〈염불(念佛)〉이 실제 연주된다고 기록되었다. 〈봉황음〉은 조선 전기 세종이 기존 〈처용가〉의 음악에 가사를 새로 지어 올린 악곡명으로, 조선 후기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이를 마치 당시 <처용무>를 출 때 연주한 것 같이 기록한 것이다. 즉, 『무의』는 이왕 전하 내외를 위한 연회에 공연된 정재의 리플렛을 진상한 목적이 두드러지는 데 반해, 두 무보는 아악부의 학습 및 지도를 위한 교재라는 성격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무의』는 연회의 주요 참석자에게 아악부 무동정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제공된 인쇄물이었다. 이후, 1931년 이병성은 아악부원 양성소 후배들이 정재를 배우고 실연할 수 있도록, 잔치를 앞두고 학습한 정재의 실기를 기초로 상세한 무보를 기록ㆍ정리한 것이다. 그것을 성경린이 다시 필사할 때 정재의 순서를 재편하였고, 선배의 필사상의 오류를 바로잡아 『이왕직아악부 무보』로 제작하였다. 하지만 『무의』의 정재 배열순서가 1930년 환국연에서의 공연 순서인지는 현재 알 수 없다. 이병성, 성경린이 제시한 여러 참고문헌의 정재 배열 순서는 모두 다르게 기재되어 있고, 심지어 『무의』의 정재 배열도 그 엮은 순서를 명확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 제2기인 이병성은 1922년 늦가을에 무동으로 선발되어 1923년 순종황제 오순 탄신기념 연회에서 무동으로 활약했다. 이병성은 1926년 3월에 양성소를 졸업했고, 이어서 아악수보(雅樂手補)와 아악수(雅樂手), 아악수장(雅樂手長)으로서 당시 후배를 지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이병성은 이왕직아악부의 첫 번째 무동으로 동기들과 함께 선발되어 순종 앞에서 김천흥(金千興, 1909~2007) 등과 함께 공연했었다. 성경린은 1926년 4월에 제3기로 입소하여 1931년에 졸업했다. 영친왕 내외분 위로잔치를 준비하던 1930년에는 성경린과 함께 이주환(李珠煥=福吉, 1909~1972)ㆍ김보남(金寶男, 1912~1964)ㆍ김강본(金岡本)ㆍ이점룡(李點龍)ㆍ태재복(太在福)ㆍ왕종진(王宗鎭)이 무동으로 선발되었다. 이들과 함께 제2기 선배인 김천흥(金千興)ㆍ김선득(金先得)ㆍ서상운(徐相雲) 또한 무동으로 출연했다. 그러나 〈처용무〉만은 키가 크고 몸집이 장대한 선배와 선생급에서 공연했는데, 이병성은 이 당시 〈처용무〉 주자로 동기 박성재(朴聖在)와 제1기 선배 박노아(朴老兒), 그리고 기존 아악수인 고영재(高永在)ㆍ김계선(金桂善)과 함께 〈처용무〉를 담당했다. 이병성은 이때 이미 신체적으로 장성했으므로, 여린 모습의 무동으로 활동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김천흥, 『心韶金千興舞樂七十年』, 민속원, 1995. 김천흥, 『심소 김천흥 선생님의 우리춤 이야기』, 민속원, 2005. 성경린, 『나의 인생관: 노을에 띄운 가락』, 휘문출판사, 1979. 성경린, 『성경린 수상집 雅樂』, 경원각, 1975. 김영희, 「이왕직 아악부의 궁중무 전승」, 『무용역사기록학』 42, 무용역사기록학회, 2016. 이수정, 「이왕직아악부의 조직과 활동」,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5. 이종숙, 「조선후기 궁중 연회용 처용무 변화에 대한 연구」, 『무용역사기록학』55, 무용역사기록학회, 2019. 『동아일보』, 「玉顔을 흐린 歷歷한 哀愁」, 1928.05.02. 『매일신보』, 「李王同妃兩殿下 玉顔華麗히 還駕」, 1930.07.09.
이종숙(李鍾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