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성 무보(李炳星 舞譜), 정재의(呈才儀), 이병성 정재노트
두봉(斗峯) 이병성(李炳星, 1909~1960)이 1922년 가을부터 1930년까지 이왕직아악부를 통해 학습한 창사 및 정재와 그 음악을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 형식으로 정리한 기록물.
『창사와 정재철』은 이병성이 1922년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제2기생으로 입소한 이래 무동(舞童)으로 훈련하고, 출연하며 익힌 10편의 정재(처용무, 향령무, 무고, 보상무, 춘앵전, 가인전목단, 수연장, 만수무, 봉래의, 장생보연지무①)와 하규일(河圭一, 1867~1937)에게 학습한 10편 정재의 창사를 펜글씨로 정리한 자필 기록물이다. 하규일은 1926년부터 이왕직아악부 촉탁으로 아악생과 아악수보, 아악수들에게 가곡을 지도하였다. 이 기록물의 표지에는 ‘1931년(소화 6년) 3월’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므로, 이때 ‘呈才(정재)’의 춤 절차[舞儀, 呈才儀]가 정리ㆍ완성되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한편 이 책자에는 조선권번(朝鮮券番)과 이왕직(李王職)의 판심(版心)이 있는 세로쓰기 줄칸 용지에 3편의 정재(장생보연지무②, 무산향, 고구려무) 무의가 추가되어 있다. 이처럼 섞인 기록들이 모두 1931년에 작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앞과 뒤에 묶인 추가 용지들은 다른 시기에 첨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기록은 일제강점기인 이왕직아악부의 아악부원 양성소에서 무동정재와 창사를 학습하고 계승한 양상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정재 창사집이며, 무보 자료이다.
『창사와 정재철』은 이병성이 1931년에 작성한 10편 정재와 그 외 다른 내용의 기록들을 섞어 엮은 필사본 책자이다. 이 기록물은 이흥구(李興九: 국가무형유산 학연화대합설무 보유자)가 개인 소장하고 있다. 이흥구는 이병성의 장남 이동규(李東圭: 국가무형유산 남창가곡 보유자)에게서 1985년경 전해 받았다고 한다. 당시 낱장으로 받은 이병성의 정재 관련 자료를 한데 묶은[綴] 것이 지금의 『창사와 정재철』이다. 이병성의 노트 또는 정재노트라고 불린다.
1919년부터 이왕직아악부에서는 궁중 음악 전승의 안정화를 위해 아악수의 인원 충당을 목표로 부설 아악부원양성소를 개설하였다. 근대교육 체제로 운영된 이 기관에 이병성은 1922년 제2기 아악생으로 입소했다. 이병성은 당시의 아악수장 이수경(李壽卿, 1882~1955)의 아들로 피리를 전공했고, 양금도 겸공하였다. 세습의 타고난 음악성을 발휘하며 하규일(河圭一, 1867~1937)에게서 가곡도 섭렵하였다. 아악생들의 무동정재는 그의 부친 이수경이 주로 지도하였다.
이병성의 정재 관련 학습ㆍ공연 내력을 살펴보면, 그는 1922년 가을에 무동으로 선발되어 정재를 학습했고, 1923년 3월 25일 순종 탄신 오순 경축연회가 있던 인정전에서 처음으로 공연하였다. 당시 무동은 아악생 1기생 중 2명, 2기생 중 9명, 총 11명이 선발되었다. 그때 무동들이 공연한 정재는 〈가인전목단〉, 〈장생보연지무〉, 〈연백복지무〉, 〈무고〉, 〈포구락〉, 〈보상무〉, 〈수연장〉, 〈춘앵전〉까지 8종목이었다. 그 외 〈처용무〉는 신체가 장대한 사람이 연행하는 것이었으므로 아악수 2명과 제1기 아악생 3명이 처용 5인무를 담당하였다.
이 연회의 무동정재 공연을 계기로 아악부원양성소 아악생들은 1923년 5월 14일 신문기자대회(창덕궁 연무장)와 1924년 1월 15일~25일에 교토를 방문하여 정재를 공연하였다. 그리고 순종 탄신 축하연은 1924년과 1925년에도 거행되었는데, 특히 1925년에는 인정전에서 무동정재를 여흥으로 관람했다고 한다. 이때 이병성이 무동으로 참여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무동으로 선발된 후, 지속적으로 정재 공연 활동이 이왕직 관련 공연 환경에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병성은 1926년 3월 3일에 졸업하였고, 4월 4일 졸업생 모두 아악수보로 임명되었다. 동기인 김천흥이 1927년 1월에 아악수로 임명받았다고 하니, 이병성도 그 비슷한 시기에 아악수로 임명되었을 것이다. 그 사이 제3기 아악생들도 입소하였다. 그해 4월 26일 순종이 승하하면서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수와 아악수보들은 장례에 따른 음악 연주를 담당하였다. 순종 사후에는 1930년 7월에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 1897~1970) 내외의 근친(覲親: 어버이를 뵘) 행사가 특별히 마련되었다. 이 공연에서 연행된 정재 10편(처용무, 처용무, 향령무, 무고, 보상무, 춘앵전, 가인전목단, 수연장, 만수무, 봉래의, 장생보연지무①)이 『창사와 정재철』에 기록된 창사와 무보의 내용이다.
이병성은 이때 아악수로서 〈처용무〉를 춤추었다. 제1조에 편성된 이병성(李炳星-청처용)ㆍ박성재(朴聖在-적처용)ㆍ김계선(金桂善-황처용)ㆍ고영재(高永在-흑처용)ㆍ박노아(朴老兒-백처용)가 춤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계선과 고영재는 1923년에도 공연했던 기존 아악수이고, 박노아(기존 이름 박흥균)는 1기생, 박성재와 이병성은 2기생으로서 〈처용무〉를 추게 된 것이다. 이병성은 『창사와 정재철』을 1931년 3월에 작성한 후, 1932년에는 아악수장(雅樂手長)이 되었고, 1938년에는 아악사(雅樂師)로 승진했다. 『창사와 정재철』은 1931년 이후 후배 아악생들의 정재 교육 교재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이병성은 1939년에 아악부를 사퇴하였다.
이병성은 1926년 촉탁으로 초빙된 하규일의 수제자가 되었으므로, 1930년대에는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의 수요회 때에 하규일과 함께 가곡 창자로도 활동했다. 조선권번의 용지에 정재 등 기생 관련 기록을 남겨 『창사와 정재철』에 첨가한 것은 대략 이 시기에 이병성이 필사했던 족적일 것이다. 아악부를 떠난 이병성은 하규일이 관여했던 조선권번의 가곡 교사로 1940년부터 재직하였다.
○ 체재 및 규격
1책 100면 50장(앞‧뒤 표지 포함)
4가지 용지를 한 권으로 엮은 기록물
1. 조선권번 판심 용지: 17cm×25cm (세로칸 길이: 19.2, 가로 11칸)
2. 무지 용지: 19cm×25cm
3. 이왕직 판심 용지1: 17.7×25cm (세로칸 길이: 22.5, 가로 13칸)
4. 이왕직 판심 용지2: 17cm×25.5cm (세로칸 길이: 20.5, 가로 10칸)
○ 소장처(자)
이흥구(李興九, 1940)[중요무형문화재 학연화대합설무 보유자]
○ 편찬연대 및 편저자 사항
책의 앞표지 겉면 중앙에는 ‘呈才(정재)’가 세로로 쓰였고, 우측 아래에는 ‘昭和六年三月(소화 6년(1931) 3월) / 李丙星(이병성)’이 있다. 이병성의 병자는 ‘炳’인데, ‘丙’은 오류이다.
다음 속지 3면에는 멋을 부린 글씨로 ‘唱詞及 呈才綴 / 昭和六年三月 日 / LBS’가 있다. 따라서 이 노트는 1931년 3월에 이병성에 의해 자필로 남겨진 자료임을 알 수 있다. 반면 다음 장인 찢어진 조선권번 용지에는 ‘昭和十五年八月卄六日 斗峯’(소화15년 8월 26일 두봉)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소화 15년은 1940년이며, 이병성이 조선권번에서 가곡 교사로 이직한 시기이다.
그보다 앞서, 이병성은 10편 정재의 창사와 무의를 무지 용지에 기록하여 1931년 3월에 『창사와 정재철』을 마무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조선번권 판심 용지로써 〈선유락(船遊樂)〉과 〈고구려무(高句麗舞)〉가 이 노트에 더해졌다. 그와 더불어 이왕직 판심의 용지에도 〈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와 〈무산향(舞山香)〉, 〈처용가(處容歌)〉 및 〈봉래의(鳳來儀)〉 무가(舞歌) 등을 기록하여 추가했는데, 그 시기는 알 수 없다.
이병성의 『창사와 정재철』은 네 가지의 다른 용지가 사용되었다. 처음과 끝에 조선권번 판심 용지가 9장이고, 이왕직 판심 용지가 10장이다. 핵심 내용인 10편 정재의 창사와 무의는 27장이 무지 용지에 펜글씨로 필사되었다. 이왕직 판심 노트는 다시 두 가지로 나뉘는데, 세로줄 13칸짜리는 6장, 10칸짜리는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앞 표제 2장, 빈면 1장과 뒤표지가 1장으로 총 50장이다. 서로 다른 내용 용지 네 가지를 후대에 합본한 자료이다.
이병성의 『창사와 정재철』의 구성 및 내용을 표로써 정리‧제시한다.
용지 | 구분 | 구성 내용 | 면/100면 | 장/50장 |
---|---|---|---|---|
앞표지 | 겉 표지 | 소화 6년(1931) 3월 이병성 | 1-2면 | 2장 |
속 표제 | 창사와 정재철 1931.3/ LBS | 3-4면 | ||
조선권번 | 파손지 | 소화 15년 8월 26일/ 두봉(斗峯) | 5-6면 | 5장 |
공연자명단 | 9월 19일 조선박람회 정재무 거연자명 | 7면 | ||
공연 종목 | 제1일 19일(목)~제4일 22일(일) | 8면 | ||
무의 | 선유락(船遊樂) | 9-12면 | ||
빈면 | - | 13-14면 | ||
이왕직13칸 | 정재목차 | 처용무(處容舞)~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 | 15면 | 1장 |
창사 실기 | 여러 정재무 창사 자구와 어법 | 16면 | ||
무지 | 창사 | 처용무(처용가서), 춘앵전, 봉래의 | 17-20면 | 5장 |
장생보연지무, 무고, 향령무, 가인전목단 | 20-22면 | |||
수연장, 보상무, 만수무 | 22-25면 | |||
빈면 | - | 26면 | ||
무도/무의 | 처용무 | 27-31면 | 22장 | |
빈면 | 무산향 창사(세로줄칸 종이 붙임) | 32면 | ||
향령무 | 33-34면 | |||
무고 | 35-38면 | |||
보상무 | 38-41면 | |||
무도/무의 | 춘앵전 | 41-44면 | ||
가인전목단 | 44-48면 | |||
수연장 | 48-53 | |||
만수무 | 53-56면 | |||
봉래의 | 57-62면 | |||
장생보연지무 | 36-70면 | |||
이왕직13칸 | 무의 | 장생보연지무(2) | 71-73면 | 4장 |
빈면 | - | 74면 | ||
창사/해제 | 차용가{의해(意解)/주해(註解)} | 75-77면 | ||
빈면 | - | 78면 | ||
표제 | 정재의(呈才儀) 「무산향/소화 14년(1939)1월 | 79면 | =4장 | |
빈면 | - | 80면 | ||
무의 | 무산향 | 81-83면 | ||
빈면 | - | 84-86면 | ||
이왕직13칸 | 창사 | 봉래의 무가(舞歌) | 87면 | 1장 |
향령 창사 치사 | 88면 | |||
조선권번 | 무의 | 선유락(추정) | 89면 | |
빈면 | - | 90면 | 4장 | |
고구려무 | 91-95면 | |||
빈면 | - | 96면 | ||
뒤표지 | 빈면 | - | 97-98면 | 2장 |
겉표지 | 99-100면 |
이병성의 『창사와 정재철』은 정재 10종을 무지 용지에 차례로 기록한 후에 『정재(呈才)』라는 표지 제목과 연도를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5쪽에 해당하는 찢긴 지면에는 ‘昭和十五年八月卄六日 斗峯(소화 15년(1940) 8월 26일 두봉)’이 있다. 이 5쪽부터 14쪽까지의 용지 판심에는‘株式會社 朝鮮券番(주식회사 조선권번)’이 인쇄되어 있다. 그중 7쪽에는 조선박람회(朝鮮博覽會) 출연자 명단과 9월 19일(목)~22일(일)의 오전과 오후에 공연한 춤 종목의 이름들이 표기되었다. 이병성은 이왕직아악부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조선권번에서도 가곡 교사를 겸직했던 이력으로 인해 ‘조선권번’의 용지를 사용한 기록이 앞과 뒤에 합본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왕직 표기의 판심 용지에는 장생보연지무〉의 무의가 재차 기록되었다. 그다음에는 〈처용가〉의 의해(意解)와 주해(註解)를 덧붙였다. 그리고 ‘소화 14년(1939)년 1월’의 표기와 함께 ‘정재의 「무산향」’이 덧붙여졌다. 또 그다음에는 〈봉래의〉와 〈향령〉의 무가(舞歌), 즉 창사를 또 한번 붙였다. 그리고 다음 ‘조선권번’ 판심이 있는 용지에는 4인이 연행하는 〈고구려무〉 가 최종 추가되었다. 따라서 이 자료는 일관된 체제의 기록물은 아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이왕직아악부 무동정재와 창사의 창법, 그리고 조선권번 기녀의 정재 연행 양상을 동시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정재 목차] 處容舞(처용무) 響鈴舞(향령무) 舞鼓(무고) 寶相舞(보상무) 春鶯轉*(춘앵전) 佳人剪牧丹(가인전목단) 壽延長(수연장) 萬壽舞(만수무) 鳳來儀(봉래의) 長生寶宴之舞(장생보연지무) * 춘앵전의 한자는 ‘春鶯囀’인데, ‘轉(구를 전)’으로 표기되었다. ‘囀(지저귈 전)’이 쓰여야 한다.
이왕직아악부에서 무동정재를 학습하고 계승한 일제강점기의 정재 전승 양상을 살필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이 자료는 성경린의 정재 노트, 『무의(舞儀)』의 원본임이 비교 연구되었다. 또 일제강점기 조선권번 기녀들의 〈선유락〉과 〈고구려무〉 전승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현재 국립국악원 정재는 고 김천흥(金千興, 1909~2007)에 의해 1980년대 정립되었다. 『창사와 정재철』의 저자 이병성은 김천흥과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제2기의 동기생이며, 두 사람은 무동으로 함께 활동하였다. 이 둘의 정재 전승의 기억이 공유됨을 전제로, 이 자료는 국립국악원의 1980년대 정재의 복원 재현 작업이 이왕직아악부의 전통을 계승한 것임을 말해 준다.
국립국악원, 『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8 -이흥구』, 국립국악원, 2013. 김천흥, 『心韶金千興舞樂七十年』, 민속원, 1995. 김천흥, 『심소 김천흥 선생님의 우리춤 이야기』, 민속원, 2005. 성경린, 『나의 인생관: 노을에 띄운 가락』, 휘문출판사, 1979. 성경린, 『성경린 수상집 雅樂』, 경원각, 1975. 김영희, 「이왕직 아악부의 궁중무 전승」, 『무용역사기록학』 42, 무용역사기록학회, 2016. 김재락, 「남창가곡 평조 언락의 창법 비교연구: 하규일, 이병성, 이주환, 김경배를 중심으로」, 경북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22. 이수정, 「순종탄신 오순 경축 기념연의 무동정재와 음악」, 『무용역사기록학』 42, 무용역사기록학회, 2016. 이수정, 「이왕직아악부의 조직과 활동」,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5. 이종숙, 「이왕직아악부의 정재음악 연구: 이병성‧성경린 무보를 중심으로」, 『공연문화연구』 34, 한국공연문화학회, 2017.
이종숙(李鍾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