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金鐃), 소금요(小金鐃), 소정(小鉦), 요령
아악(雅樂) 일무(佾舞)의 무무(武舞)에 무기(舞器)로 사용하는, 혀[舌]가 없는 요령 형태의 타악기
요(鐃)는 혀[舌]가 없고, 위에 자루가 달린 작은 요령 형태의 악기다. 요(鐃)는 아악(雅樂) 일무(佾舞) 중 무무(武舞)의 무기(舞器)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무무(武舞)에 무기(舞器)를 사용하는 전통은 고려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무무(武舞)에 두 개의 요(鐃)를 배치했으나, 조선 시대의 회례(會禮)에는 동쪽과 서쪽에 요(鐃)를 각각 한 개씩 배치했고, 길례(吉禮)에는 무무(武舞)의 동쪽에 요(鐃) 한 개를 배치했다. 요(鐃)의 연주 방법은 왼손으로 자루를 잡고, 오른손으로 퇴를 잡고 쳤다.
요(鐃)는 『주례』에 사금(四金)의 하나로 소개되어 있다. 사금은 순(錞)・탁(鐲)・요(鐃)・탁(鐸)을 말하며, 여섯 종류의 북과 함께 용도에 맞게 사용되었다. 무무(武舞)에 무기(舞器)를 배치하는 것은 고려 시대부터 시작되었고, 요(鐃)는 고려 시대부터 사용했다. 조선 초기의 무무(武舞)에 사용한 무기(舞器)는 고려 시대와 달랐다. 조선 시대에는 순(錞)・탁(鐲)・요(鐃)・탁(鐸)・응(應)・아(雅)・상(相)・독(牘)을 무무에 배치했으며, 회례(會禮)와 길례(吉禮)에 사용한 악기의 숫자와 방식이 달랐다. 회례(會禮)의 무무에는 동쪽과 서쪽에 모두 요(鐃)를 배치했고, 길례(吉禮)의 무무에는 동쪽에 요(鐃)를 배치했다. 그러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부터 회례(會禮)의 무무에 무기를 배치하는 방식은 없어지고, 길례(吉禮)의 무무에 무기를 배치하는 방식만 전승되었다. 요(鐃)를 비롯한 무무에 무기를 배치하는 전통은 『악학궤범(樂學軌範)』까지 보이고, 조선 후기에는 전승이 단절되었다.
『주례』에 요(鐃)는 사금(四金)의 하나이며, 요(鐃)를 울려 북을 그치게 한다고 했다. 중국 송나라 휘종(1101~1126) 때 사람인 진양(陳暘)이 지은 『악서(樂書)』에 요(鐃)는 아악(雅樂) 일무(佾舞) 중 무무(武舞)에 무기(舞器)로 배치되어 있다. 무무에 탁을 사용한 이유는 탁으로 무사(武事)를 떨치고, 대중을 경고하여 절도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설문해자』에 의하면, 한나라 고취곡에 요가(鐃歌)가 있었는데, 요가(鐃歌)를 사용한 이유는 무무(武舞)가 물러나는 까닭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무무(武舞)에 무기(舞器)를 배치하는 것은 고려 시대부터 시작되었고, 도(鼗) 2명, 단탁(單鐸) 2명, 쌍탁(雙鐸) 2명, 금순(金錞) 담지 4명, 금순 연주자 2명, 요(鐃) 2명이 동서쪽에 나뉘어 섰다. 조선 초기에 무무에 사용한 무기는 고려 시대와 달랐다. 조선 시대에는 순(錞)・탁(鐲)・요(鐃)・탁(鐸)・응(應)・아(雅)・상(相)・독(牘)을 무무에 배치했으며, 회례(會禮)와 길례(吉禮)에 사용한 무기의 숫자와 방식이 달랐다. 회례(會禮)의 무무에는 동쪽과 서쪽에 모두 요(鐃)를 배치했고, 길례(吉禮)의 무무에는 동쪽에 요(鐃)를 배치했다.
요(鐃)는 혀[舌]가 없고, 위에 자루가 달린 작은 요령 형태의 악기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는 아악기로 분류되어 있고,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금부(金部)로 분류되어 있다. 요(鐃)라는 명칭을 가진 악기는 두 종류가 있다. 부구(浮漚)를 요라고도 하지만, 부구는 자바라처럼 생긴 것으로, 형태면에서 무기로 사용되는 요(鐃)와 서로 다른 악기이다.
요(鐃)의 연주법은 왼손으로는 자루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퇴를 잡고 치는 방식이다. 문무가 들어가고, 무무가 나올 때 악생 한 사람이 이것을 치며 들어와 춤추는 사람의 오른편에 서서 네 자로 된 가사의 제3자에 치고, 제4자에 그쳤다.
『고려사(高麗史)』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세종실록(世宗實錄)』 『악서(樂書)』 『악학궤범(樂學軌範)』 이숙희, 『국악기의 문양과 장식』, 국립국악원, 2006. 『林尹 註譯』, 『周禮今註今譯』, 『臺灣商務印書館』, 1987(중화민국 76년). 『薛宗明』, 『中國音樂史 樂器篇』, 『臺灣商務印書館』, 1990(중화민국 79년).
이숙희(李淑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