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취라치(內吹螺赤), 조라치(詔羅赤)
조선 후기 선전관청에 속하여 입직, 시위, 연주를 담당한 군영악대
내취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바뀐 군제에 따라 조선전기의 내취라치(內吹螺赤)와 취각(吹角)의 제도를 계승하여 성립된 선전관청 소속 군영악대이다. 제일 먼저 등장한 내취는 출신 지역에 따라 서울 출신은 황내취, 지방 출신은 흑내취라고 했다. 이후 황내취는 원내취로 개칭되었고, 흑내취는 겸내취로 대치되었다. 원내취는 선전관청에 소속된 내취이고, 겸내취는 선전관청과 오군영에 이중으로 소속되어 있는 내취이다. 겸내취는 악기편성 등 음악의 성격에 따라 취타내취와 세악내취로 구분된다. 내취의 역할은 입직과 동가와 전좌에서의 시위, 군영의 호궤(犒饋), 사악(賜樂), 궁중의 연향에서 연주 등이었다. 취타내취 일부는 시위대에 속하여 내취군악대로도 활동했고 구군악대로도 불렸다. 1895년 선전관청 폐지 후 내취는 시종원에 이속되었으며, 1908년 궁내부 장악부로 이속되었다.
내취라는 명칭은 1682년(숙종 8)에 처음 나타나므로, 내취제도는 그 이전에 성립한 것이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군제가 바뀌고, 취고수, 세악수 제도가 생기자 내취 제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처음에는 출신 지역에 따라 황내취와 흑내취로 구분하여 명명했다. 이후 황내취는 원내취로 개칭되었고, 흑내취는 겸내취로 대치되었으며, 이것은 소속 기관에 따라 구분한 것이었다. 원내취는 선전관청에 소속이었고, 겸내취는 선전관청과 오영문에 이중으로 소속되어 있었다. 겸내취는 악기편성 등 음악의 성격에 따라 취타내취와 세악내취로 구분되었다. 1895년 선전관청이 철폐된 후 내취는 시종원에 이속되었고, 1900년 우시어청이 설치되자 우시어청으로 이속되었다. 한편 1895년 군영에는 내취군악대가 설치되었다. 1907년에 우시어청이 폐지되고, 내취군악대도 해산되었다. 1908년 내취는 궁내부 장악부로 이속되었다. 1913년부터 아악대에 세악내취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고, 1915년부터 취타내취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1895년 군악대가 설치된 후 시위대 소속 취타내취는 구군악대로도 불렸다.
내취는 조선전기의 내취라치(內吹螺赤)와 각(吹角) 제도를 계승한 군영악대이다. 취라치는 소속 기관에 따라 궁중에 속한 내취라치와 병조에 속한 외취라치로 구분되었다. 취각은 대각, 중각, 소각 연주자로 구성된 악대를 뜻하며, 노부에 진설되었다. 각(角) 연주자를 취라치라고 했다. 따라서 내취는 소속면에서는 내취라치를 계승한 것이고, 기능면에서 취각을 계승한 것이다. 그러나 내취는 악기편성 면에서 내취라치 혹은 취각과 그 성격이 다르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군제가 바뀌고, 취고수, 세악수 제도가 생기자, 취각은 내취로 대치되었다. 조선 후기 내취는 선전관청에 속한 군영악대였다. 내취라는 명칭은 1682년(숙종 8)에 처음 나타나므로, 내취제도는 그 이전에 성립한 것으로 봐야 한다. 처음에는 내취를 출신 지역에 따라 서울 출신의 황내취와 지방 출신의 흑내취로 구분하여 명명했다. 그 다음에는 소속 기관에 따라 선전관청에 소속된 원내취와 선전관청과 오영문에 이중으로 소속된 겸내취로 구분했고, 겸내취는 악기편성 등 음악의 성격에 따라 취타내취와 세악내취로 구분했다.
내취는 입직, 시위, 연주 등의 활동을 했고, 도예(徒隸)의 신분이기도 했다. 내취가 조선 전기의 내취라치를 계승한 점에서 내취라치(內吹螺赤)라고 한 경우가 있고, 도예의 신분이었던 점에서 조라치(詔羅赤)라고도 했다. 또한 1894년 12월 훈련대ㆍ신설대ㆍ지방대와 함께 제2차 개혁 내각 군무국에 시위대가 신설되었고, 이 시위대에 취타내취로 구성된 시위대 소속 내취군악대가 설치되었다. 내취군악대는 38명을 한 단위로 하는 두 개의 패로 구성되어 있었다. 시위대는 1895년 8월 22일에 훈련대로 편입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1900년 양악군악대가 설치된 후 내취군악대는 구군악대로도 불렸다. 한편 1895년 선전관청이 철폐된 후 내취는 시종원에 이속되었고, 1900년에 우시어청이 설치되자 다시 우시어청으로 이속되었다. 1907년에 우시어청이 폐지되었고, 1908년 내취는 궁내부 장악부로 이속되었다. 1908년 내취는 궁내부 장악부로 이속되어 군영악대로서의 기능이 없어졌다. 1913년부터 아악대에 세악내취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고, 1915년부터 취타내취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취타내취가 연주한 악기는 취고수가 연주하는 악기와 동일했고, 세악내취가 연주한 악기는 세악수가 연주한 악기와 동일했다. 취타내취가 연주한 악기는 나각, 나발, 대각, 호적, 정(鉦), 나(鑼), 고(鼓), 자바라(啫哱囉) 등이었고, 『조선악개요』(1917)에 수록되어 있는 구군악대의 악기는 나발, 나각, 자바라, 호적, 용고, 정(鉦), 나(鑼)이다.
세악내취는 피리2, 대금1, 해금1, 장구1, 북1로 구성된 삼현육각이었다. 내취의 복식은 호수(虎鬚) 혹은 작우(雀羽)를 꽂은 초립, 황철릭, 남전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내취의 역할은 입직과 동가와 전좌에서의 시위, 그리고 군영의 호궤(犒饋), 사악(賜樂), 궁중의 연향에서의 연주 등이다. 취타내취가 전승한 음악은 〈대취타〉이고, 세악내취가 전승한 음악은 〈취타〉ㆍ〈길군악〉ㆍ〈길타령〉ㆍ〈별우조타령〉ㆍ〈군악〉이다.
내취 중 취타내취는 〈대취타〉를 현재까지 전승될 수 있도록 했고, 세악내취는 삼현육각을 전승했다는 점에서 음악사적 의의가 있다.
이숙희, 『조선후기 군영악대 -취고수ㆍ세악수ㆍ내취-』, 태학사, 2007. 이숙희, 「조선조 행악연주복식과 대취타 연주복식의 관계」, 『대취타 복식 고증 토론회 결과』, 국립국악원, 2024.
이숙희(李淑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