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의 오례 중 군례에 사용한 음악.
군례의 구성 요소는 시대에 따라 달랐고, 군례에 속한 각 의례에 사용하는 음악도 의례의 성격에 각각 달랐다. 고려시대에는 계동대나의(季冬大儺儀) 외에는 음악을 사용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군례는 사례(射禮), 군사훈련과 관련된 의례, 자연 현상과 관련된 재앙이나 역질을 물리치는 의례로 분류할 수 있다. 조선시대 군례에 사용한 음악은 세 번의 변화 과정을 거쳤다. 세종조의 군례에는 아악을 연주하였고, 성종조 이후에는 등가가 없어지고 전정헌가가 연주를 담당했으며, 음악도 아악을 연주하지 않고 〈역성〉, 〈여민락〉 등으로 대체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민간의 음악을 수용하는 등 향악을 중심으로 연주하였다.
군례는 오례의 하나로서, 『주례』에서 비롯되었고, 한대(漢代) 이후에는 대외적 군사 행위의 일면을 담게 되었다. 당대(唐代)에 정리한 고대 『주례』의 군례가 고려시대에 수용되었고,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고금상정례』 그리고 중국의 사서(史書)와 예서(禮書)를 참고하여 정립하였다. 군례의 음악은 의례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계동대나의의 음악은 고려시대로부터 전승된 것이고, 이 외에는 조선 초기부터 유래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조선 전기와 달랐다. 조선 군례악은 의례에 따라 병조 소속 연주자 혹은 장악원 악공이 담당했다.
군례악은 군례에 연주하는 음악이고, 군례는 오례(五禮)의 하나로이다. 군례를 비롯한 오례는 『주례』에서 비롯되었고, 고려시대에 중국으로부터 당대(唐代)에 정리된 『주례』의 군례를 수용하였다. 군례는 고려시대, 조선 초기, 조선 후기에 따라 차이가 있고, 음악도 각각 달랐다. 고려시대의 군례는 견장출정의(遣將出征儀), 사환의(師還儀), 구일월식의(救日月蝕儀), 계동대나의(季冬大儺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중 견장출정의에 음악을 연주하였으나, 그 성격 등에 대한 기록은 없다. 계동대나의에는 진자 24명, 집사자 12명, 악사 22명, 고각군 20명이 참여하였다. 악사 중 한 명은 방상시(方相氏)가 되고, 한 명은 창수가 되었다. 고각군 20명은 집기(執旗) 4명, 취각(吹角) 4명, 집고(執鼓) 12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것은 모두 취타 악기로써 군영악기의 성격을 보여 준다.
조선시대 군례의 종류는 전기와 후기가 달랐다. 조선 전기의 군례는 활쏘기[射禮]와 관련된 의례, 군사훈련과 관련된 의례, 자연현상과 관련된 재앙이나 역질을 물리치는 의례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사례에는 사우사단의, 관사우사단의, 대사례가 있었고, 군사훈련에는 대열의, 강무의, 취각령이 있었으며, 재앙을 물리치는 의례에는 구일식의(救日食儀)가 있었고, 역질을 물리치려는 의식에 계동대나의(季冬大儺儀)가 있었다. 군사 관련 의례가 아닌 구일식의와 계동대나의가 군례에 포함된 것은 군의 힘을 빌어 화외영내(和外寧內), 벽사진경(辟邪進慶) 하고자 하는 목적 때문이었다.
세종대(1407~1412)의 사우사단의, 관사우사단의 등 활쏘기 의례[射禮]에 음악을 연주한 악대는 등가와 헌가였다. 등가가 연주한 악곡은 알 수 없으며, 헌가는 화안지악(和安之樂)ㆍ성안지악(誠安之樂)ㆍ융안지악(隆安之樂)을 연주했다. 『악학궤범』 이후에는 전정헌가를 진설했고, 악사와 악공 모두 합쳐 15명이었다. 군사 훈련과 관련한 의례인 대열의에서는 대각(大角)ㆍ금(金)ㆍ고(鼓)ㆍ탁(鐸)ㆍ정(鉦)ㆍ비(鞞) 등의 악기를 신호에 사용하였다.
취각령에서는 중군(中軍)은 대각(大角), 좌군(左軍)은 중각(中角), 우군(右軍)은 소각(小角)을 불어 군사훈련의 신호로 삼았다. 강무의에는 악사 악공 합해서 15명과 가동이 참여했다. 대열의와 취각령은 『세종실록』에만 보이고, 그 이후에는 없어졌다. 대열의 등 왕이 거둥할 때 진설하는 노부에는 전부고취와 후부고취, 취각(吹角)과 금(金)ㆍ고(鼓)가 포함되어 있었다. 취각은 대각 2명, 중각 2명, 소각 2명으로 구성되었고, 금고는 금1ㆍ고2와 금1ㆍ고1의 두 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부고취와 후부고취 연주자는 장악원 소속이었고, 취각(吹角)과 금고(金鼓) 연주자는 병조 소속이었다. 자연재해나 역질을 물리치는 군례 중 구일식의에는 청색, 적색, 백색 세 종류의 북을 사용했다. 청색 북은 동쪽에, 적색 북은 남쪽에, 백색 북은 서쪽에 설치했다. 이 북은 궁중 음악기관에서 설치했다. 계동대나의에는 황금사목의 가면을 쓴 방상시 4명, 12세 이상 16세 이하의 진자 48명, 창수(唱帥) 4명, 집고(執鼓) 4명, 집쟁(執錚) 4명, 취적(吹笛) 4명이 참여했고, 악사ㆍ악공ㆍ여기가 음악을 연주했다.
조선 후기의 군례는 연사의, 친림시사의, 친림융무당문신삭시사의, 친림연융대시사의, 대열의, 성조의, 야조의, 용주도섭의, 친림춘당대호궤의, 친림호궤의, 구월식의가 있었다. 이와 같은 군례는 활쏘기[射禮] 계통, 군사훈련 계통, 군사 잔치(犒饋), 재앙을 물리치는 의례로 분류된다.
연사의에는 장악원에서 고악(鼓樂)과 고(鼓) 2개와 금(金) 2개를 진설하였고 친림사시의에는 고(鼓)와 쟁(錚)만 사용했으며, 친림연융대시사의에는 병조에서 취타를 진설했다. 대열의에는 대취타와 소취타를 연주하였고, 정(鉦)ㆍ나(鑼)ㆍ각(角)ㆍ나(螺) 등의 악기로 신호를 하였다. 친림춘당대호궤의에는 장악원에서 헌현을 진설했고, 친림호궤의에는 취고수와 세악수가 참여했다. 특히 세악수는 거상하는 동안 무환지악(武桓之樂, 軍樂)ㆍ징각지악(徵角之樂, 여민락)ㆍ소무지악(昭武之樂, 영산회상)을 연주했다. 성조의에는 내취가 정(鉦)ㆍ금(金)ㆍ나(鑼)의 타악기와 나(螺)ㆍ호적(胡笛)ㆍ나발>을 연주했고, 야조의에 참여한 악대는 알 수 없으나, 금(金)ㆍ정(鉦)ㆍ나(鑼)와 나발로 소취타와 대취타를 연주했다. 구월식의에는 쟁(錚) 다섯 개를 사용했다.
군악을 군례악으로 설명하거나 군례악을 군악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군악은 ‘군영음악’을 뜻하거나 〈군악〉이라는 특정 악곡을 뜻한다. 군례악은 군례에 속한 각 의례에 연주하는 음악을 통칭하는 것이므로 군례악과 군악은 서로 다른 의미이고, 구분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다.
『국조오례의』 『고려사』 『세종실록』 『악학궤범』
이숙희, 「조선조 군례에 사용한 음악의 종류와 성격」, 『한국음악연구』 32, 한국국악학회, 2002.
이숙희(李淑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