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이후 취타내취를 지칭하던 용어
구군악대는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기존 군영이 철폐된 후, 신설된 군영에 소속되어 있던 내취군악대, 곡호대, 양악군악대에 대비해, 조선후기부터 전승되어 온 <대취타>를 연주하던 취타내취를 말한다.
구군악대라는 용어는 1905년 시종원에 보내는 〈조회 시종원경 민영휘 제1호(照會 侍從院卿 閔泳徽 第一號)〉라는 문서에 처음 보이며, 여기에 구군악대라는 명칭과 더불어, 옆에 〈대취타〉를 부기해 놓았다. 조선 후기에는 군영악대의 명칭을 악대의 성격이나 소속에 따라 취고수, 세악수, 원내취, 겸내취(취타내취, 세악내취)라고 했다. 1895년(고종 32) 이후 내취군악대, 곡호대, 양악군악대 등의 군악대가 설치됨으로써, 그 이전의 군영악대 중 〈대취타〉를 연주하는 악대를 군악대라는 명칭에 대비하여 구군악대라고 했다. 〈대취타〉는 취고수와 취타내취가 모두 연주했지만, 구군악대는 취타내취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조선 후기 취타내취는 선전관청에 속해 있었으며, 1895년(고종 32) 선전관청이 철폐된 후 시종원으로 이속되었고, 1900년(광무 4) 우시어청이 설치되자 우시어청으로 그 소속을 옮겼다. 우시어청은 1907년에 폐지되었고, 취타내취는 1908년 궁내부 장악부로 이속되어, 그 소속과 성격이 군영악대에서 궁중악대로 바뀌었다. 궁중 악대로서의 취타내취에 대한 기록은 1915년부터 보이지 않는다.
군악대는 조선 말과 대한제국 시대에 군영에 설치된 악대로써, 내취군악대와 양악군악대의 두 종류가 있었다. 그리고 양악군악대가 성립되는 과정에 군영에서는 동호수ㆍ곡호수ㆍ나팔수 등의 연주자와 곡호대가 활동하는 기간이 있었다. 1900년 양악군악대가 설치된 후 시종원 소속 취타내취 혹은 내취군악대를 구군악대(舊軍樂隊)라고도 했다.
○ 구군악대
구군악대라는 용어는 1905년 시종원에 보내는 〈조회 시종원경 민영휘 제1호(照會 侍從院卿 閔泳徽 第一號)〉라는 문서에 처음 보이며, 여기에 구군악대라는 명칭과 더불어, 옆에 〈대취타〉를 부기해 놓았다. 『조선악개요』(1917)에 수록되어 있는 구군악대의 악기는 나발, 나각, 자바라, 호적, 용고, 정(鉦), 나(鑼)이며, 모두 취타악기이다. 구군악대라는 용어는 군악대가 설치되기 전에 있었던 옛날의 군악대라는 의미이며, 〈대취타〉를 연주하는 점과, 시종원 소속이라는 점, 악기편성, 그리고 군악대라는 용어 등으로 미루어 시종원 소속 취타내취 혹은 내취군악대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 내취군악대
내취 군악대는 1895년 종래의 취타내취를 개편하여 구성한 시위대 소속 군악대이다. 시위대는 1894년 12월 훈련대ㆍ신설대ㆍ지방대와 함께 제2차 개혁 내각 군무국에 신설된 부대이다. 시위대는 신설대 소속 공병 병력에서 2개 대대를 차출하여 시위 2개 대대로 편성되었다. 이들은 양번제로 3일씩 교대로 궁궐 시위 임무를 수행했다. 내취군악대는 각 38명으로 구성된 두 개의 패로 구성되어 있었다. 시위대는 1895년 8월 22일에 훈련대로 편입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내취군악대는 최초의 군악대이지만, 그 연주자가 취타내취이고, 악기편성이 취타악기이기 때문에 소속기관 외에는 취타내취와 변별되지 않는다.
○ 취타내취
취타내취는 선전관청에 속해 있었으며, 1895년(고종 32) 선전관청이 철폐된 후 시종원으로 이속되었고, 1900년(광무 4) 우시어청으로 그 소속을 옮겼다. 우시어청은 1907년에 폐지되었고, 취타내취는 1908년 궁내부 장악부로 이속되어, 그 소속과 성격이 군영악대에서 궁중악대로 바뀌었다. 궁중 악대로서의 취타내취에 대한 기록은 1915년부터 보이지 않는다. 1915년 이후 취타내취 출신들은 삼창취악단, 경성고악단, 조선악단, 태평조선악단 등 악단을 만들어 방송 등의 활동을 하거나 광무대와 같은 극장에서 선전활동을 하거나, 안장사 등 사찰에서 연주 활동을 했다. 이들 중 임원식(1886~?), 박순오, 최인서(1892~1978)는 겸내취로서 현재 전승되는 〈대취타〉를 전승했다.
○ 동호수, 곡호수
양악군악대가 설치되는 초기 단계에 군영에서 동호(銅號), 나팔, 북과 같은 악기를 도입하여 사용하는 과정이 있었다. 동호는 1882년 9월에 설치된 청국식 근대 조선군 체제인 친군우영(親軍右營)에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동호는 당시 청나라 노부에 편성된 것으로, 양악기가 아닌 전통악기이지만, 이 동호를 서양 나발로 추정하기도 한다. 나팔은 동호(銅號) 혹은 곡호(曲號)로 지칭했고, 나팔 연주자는 곡호수(曲號手)라고 했다. 1883년 경기도 광주유수 겸 수어사였던 박영효(1861~1939)는 독자적으로 병력을 양성했는데, 이 부대에서 이은돌(李殷乭)이 나팔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은돌은 1881년 11월 일본의 교도단 긴본 군악대에 유학하여 프랑스 악대지도자 다그롱(Gustave Charles Dagron)으로부터 코넷과 신호나팔, 악대교육, 군사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1882년 10월 22일에 귀국하여 1883년 4월 경기도 광주 유수로 좌천된 박영효한테 가서 일본호산학교 출신인 신복모와 함께 그곳의 광주병대 8백여명의 군사를 훈련하고 나팔수를 양성하였다. 1883년 4월 11일에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나팔 20개를 들여왔고, 12일에는 본영에서 사용할 나팔 4쌍을 일본에서 들여왔다. 이때 나팔을 들여온 사람은 민(閔)씨 성의 병조판서와 해연도총제사(海沿都總制使) 민응식(閔應植, 1844~?)이다. 즉 나팔은 늦어도 1883년 무렵부터 사용했고, 그 도입처는 일본이며, 공식적 과정을 거쳐 도입되었다고 하겠다.
○ 곡호대
나팔이 도입된 이후 양악군악대 성립 이전에 곡호대라는 악대가 성립되었다. 곡호대는 나팔 연주자인 곡호수와 북 연주자인 고수, 그리고 행정직인 부교로 구성되어 있었다. 1888년 이후 장위영ㆍ친군별영ㆍ경리청 등에 곡호대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구성이 체계적이지 않지만, 십장과 같은 직책이 보이는 것이 공통된다. 1894년 이전 시기의 초기단계 곡호대는 경리청ㆍ친군별영ㆍ장위영 등에 편제되어 있었고, 십장과 같은 우두머리의 명칭은 보이지만, 구성원의 종류나 숫자에 관한 규정은 찾아보기 어렵다, 곡호대가 체계화 되는 시기에는 중앙은 21명 단위 곡호대, 지방은 9명 단위 곡호대를 거쳐 21명 단위 곡호대가 설치되었다. 이 곡호대는 곡호수와 고수 그리고 부교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전국 군영에 모두 편제되어 있었다.
○ 양악군악대
양악군악대는 1900년에 설치되었다. 1896년(건양 원년) 10월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이 유럽을 시찰하고 돌아온 후 군악대를 설치하기를 주청함으로 인해 1900년에 군악대 설치령이 내려졌고, 1900년(광무 4)에 공포하는 절차로 이루어졌다. 양악군악대는 1900년 12월 19일에 두 개의 대로 편성되어 각각 시위보병연대와 시위기병대대에 배속했다. 1900년의 양악 군악대 편제는 대장(1등 군악장) 1, 부장(2등 군악장) 1, 1등 군악수(부 참교) 3, 2등 군악수(상등병) 6, 악수(樂手, 병졸) 27, 악공(樂工, 병졸) 12, 서기(書記, 참교) 1로 되어 있으며, 모두 5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1904년에 시위보병연대와 시위기병대대에 각각 운용되던 군악대를 폐지하고 2개 소대를 1개 중대로 하는 군악중대를 증편하였는데, 1개 중대는 중대장(1등 군악장) 1, 소대장(2ㆍ3등 군악장) 2, 소대장(정교) 1, 1등 군악수(부참교) 8, 2등 군악수(상등병) 12, 악수(樂手, 병졸) 54, 악공(樂工, 병졸) 24, 서기(부참교) 2의 104명으로 편제되어 있다. 양악군악대에서 사용한 악기는 대적(大笛, flute), 소적(小笛, piccolo), 호적(胡笛, oboe), 최고음생(最高音笙, Eb clarinet), Bb clarinet), 심음생(深音笙, bass clarinet), 최고음나팔(最高音喇叺, Eb piston), 보음나팔(保音 喇叺, saxhorn), 최강음나팔(最强音喇叺, alto trombone), 강음 나팔(强音喇叺(tenor trombone), 조심음나팔(助深音喇叺, baritone saxophone), 반심음나팔(半深音喇叺, bass trombone), 심음나팔(深音喇, bass saxophone), 최저음나팔(最低音喇叺, bass tuba), 삼각경(三角磬, triangle), 철금(鐵琴, glockenspiel), 소고(小鼓, s. drum), 대고(大鼓, drum), 등고(藤鼓, tambourine), 전조편(轉調片), 정음기(正音器, tuning fork), 제금(提琴, cymbal), 악보대(樂譜臺, 보면대)로 기록되어 있다. 이중 조전편, 정음기, 악보대는 악기가 아니지만, 연주에 필요한 도구이므로 함께 포함해서 기록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양악군악대가 사용한 악기의 도입과 관련하여 일본인 교관 호리모도 레이조(掘本禮造, ?~1882) 가 일본에서 나팔과 북을 가져왔다고 보는 설도 있고, 1897년에 러시아로부터 구입했다는 기록도 있다.
군악대 조직의 설계는 당시 궁내부 고문관으로 있던 미국인 산도(山島)와 총세무사(總稅務司)로 있던 영국인 박탁안(柏卓安)이 담당했다. 군악대를 훈련하여 연주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한 사람은 독일인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1916)이며, 군악대에서 연주한 악곡은 각종 애국가, 행진곡, 가곡, 무도곡, 예호 등이었다. 양악군악대 제도는 1907년 군대 해산과 함께 폐지되었고, 연주자들은 궁중의 의식과로 이속되었다. 궁중 소속 양악대는 1910년 한일합방과 1916년 에케르트(Franz von Eckert, 1852~1916)의 사망으로 해산되었다. 이왕직 양악대는 이후 경성악대라는 이름의 민간 자영단체가 되어 계속 명맥을 이어갔지만, 1930년대까지 겨우 명맥을 이어오다가 흩어지고 말았다. 그 후 악기의 일부는 휘문학교에 기증하고 일부는 이왕실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해방이 되자 서울시 경찰악대에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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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희(李淑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