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 아악사장(雅樂師長)을 역임한 함화진(咸和鎭, 1884~1949)이 1943년에 『가곡원류』를 계승한다는 의식으로 편찬한 활자본 가곡, 가사집
함화진은 이왕직아악부 아악사장 시절에 가곡 작품들을 널리 수집하기 시작했다. 아악부에 전해 내려오던 『가곡원류』 외에 또 다른 가집들을 발견하면서 본격적으로 작업을 진행해 드디어 1935년에는 완성된 가집의 ‘자서(自序)’를 마련했고, 1937년에는 등사판 『증보가곡원류』를 편찬했다. 이후 아악사장을 그만둔 후 1943년에 종로인문사에서 활자본으로 간행했고, 다시 광복 직후인 1946년에는 조선문화관(朝鮮文化館)에서 재간행했다.
○ 서지 및 편찬 정보
제책 형태는 1책 총 229면이고, 크기는 가로12.50cm×세로19cm이다. 표제는 『증보가곡원류』이고, 1943년 종로인문사에서 간행됐다. 속표지 중앙에는 ‘증보가곡원류 전(增補歌曲源流 全)’이라는 서명이 있고, 왼쪽 위에는 ‘전이왕직아악사장 함화진 편(前李王職雅樂師長 咸和鎭 編)’, 왼쪽 아래에는 ‘종로인문사 간’이라 되어 있다. 함화진은 1939년 이왕직아악부를 떠났는데. 이 책에는 이병기의 1942년 서문과 함화진의 1935년 등사본 서문이 차례로 실려 있다. 이후 광복 직후인 1946년에는 조선문화관에서 다시 간행했는데, 인쇄는 1943년 판형과 동일하나 속표지 편자 소개와 서문의 간기 일부에 차이가 있다. 재간행본에는 편자를 ‘구왕궁아악사장(舊王宮雅樂師長)’이라 했고, 이병기 서문에서는 간기 1942년을 삭제했다.
○ 구성과 체재
가곡 1,356수, 가사 12편을 수록한 이 가집의 전체 구성 체제는 다음과 같다.
① 「서문(序文)」, 「자서(自序)」, 「가곡원류서(歌曲源流序)」, 「청구영언서(靑丘永言序)」
② 「증보가곡원류 목차(增補歌曲源流 目次)」
③ 「시가와 음악의 개설(詩歌와 音樂의 槪說)」
④ 「논곡지음(論曲之音)」
⑤ 「가지풍도형용십오조목(歌之風度形容十五條目)」
⑥ 「매화점장단(梅花點長短)」, 「장고장구(杖鼓長矩)」
⑦ 「우조(羽調)와 계면조(界面調)의 분류(分類)」
⑧ 「남창현행가창순서(男唱現行歌唱順序)」
⑨ 「여창현행가창순서(女唱現行歌唱順序)」
⑩ 「남녀합창순서(男女合唱順序)」
⑪ 「사부 십이종(詞部 十二種)」, 「조부(調部)」
⑫ 「증보 가곡원류(增補 歌曲源流)」, 「가사 십이종(歌詞 十二種)」
⑬ 「작가씨명(作家氏名)」, 「본문색인(本文索引)」
①~⑪까지가 권두부이다.
①은 4개의 서문이다. 「서문」은 1942년의 이병기 서문이다. 이 글에서 현재 국악원에 소장된 『가곡원류』가 박효관 원고본이라고 전하고 있다. 「자서」는 함화진 자서인데, 『가곡원류』 외에 『해동가요』ㆍ『청구영언』ㆍ『해동악장』ㆍ『시조유취』 등에서 새로 발견한 작품들을 모았기에 표제를 『증보가곡원류』라 했음을 밝혔다. 「가곡원류서」는 박효관의 『가곡원류』 앞부분에 실린 「가곡원류」ㆍ「논곡지음」 두 글 중 「가곡원류」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청구영언서」는 김천택 편 『청구영언』의 정내교(鄭來僑, 1681~1759) 서문이다. 그러나 원 가집 서문의 ‘전악사(全樂師)’가 ‘김성기(金聖器)’로 바뀌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함화진이 참고한 『청구영언』은 19세기 가집 『청구영언』(육당본)임을 알 수 있다. 원전의 전악사는 1723년에 장악원 가전악(假典樂)에 오른 전만제(全萬齊)를 말하는데, 전승 과정에서 ‘전악사’가 ‘김성기’로 와전되었다.
②는 이 가집 전체의 목차이다. 여기에 ①을 포함하여 전체 작품 목록인 가곡의 모든 악곡과 12가사의 제목들이 포함되어 있다.
③은 시가와 음악의 관계에 대한 글이다. 필자를 따로 밝혀놓지 않은 것으로 보아 편자인 함화진의 글이다.
④~⑥은 『가곡원류』계 가집들의 앞부분에 실리는 음악 관련 글들과 동일하다. ④는 『가곡원류』계 가집의 앞부분에 실린 「가곡원류」ㆍ「논곡지음」 중 「가곡원류」는 앞의 서문으로 내보냈기에 이 항목에서는 「논곡지음」만 실었다. ⑤는 15개 악곡의 음악적 특징을 한문구로 표현한 것이다. ⑥은 가곡 장단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 중 「장고장구(杖鼓長矩)」는 「장고장단(杖鼓長短)의 오기이다.
⑦은 가곡 악곡을 우조와 계면조의 두 악조별로 분류한 것이다. 우조에 11개 악곡, 계면조에 13개 악곡이 나열되어 있다.
⑧~⑩은 가곡 한바탕의 가창 순서를 정리한 것이다. 남창ㆍ여창ㆍ남녀창 세 가지로 정리했다. 이 중 「남창현행가창순서」 아래에는 임시로 증감할 수 있다고 부기해 놓았다.
⑪은 십이가사와 시조 악곡이다. 「사부」는 현행 십이가사의 제목이고, 「조부」는 4개의 시조창 악곡명이다. 이 중 「조부」에는 현장에서 창작해 부르기도 하기에 사설은 생략한다는 부기가 있다. 이에 이 가집에는 시조창 사설은 싣지 않았다.
⑫는 이 가집의 본문이다. 「증보 가곡원류」는 남창 33개 악곡에 배속된 1,356수로 구성되어 있다. 「가사 십이종」은 십이가사 작품 전체이다.
⑬은 색인 모음이다. 「작가씨명」은 본문의 작가들을 가나다 순으로 배열했다. 자ㆍ호ㆍ관직 등을 간략 소개했다. 작품 본문에서는 작가명만 밝혀주었기에 작가 소개를 따로 만들었다. 「본문색인」은 작품의 첫 음보를 가나다 순으로 정리했다. 본문색인에는 악곡명도 함께 밝혀주었다. 가곡 작품 색인 뒤에는 십이가사 색인도 이어진다.
○ 작품 수록 양상과 세부 내용
작품 수록은 가곡과 십이가사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가곡은 「증보가곡원류」 항목에, 십이가사는 「가사(십이종)」 항목 아래에 작품들을 배열했다. 각각을 수록 편제 순서대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증보 가곡원류」
우조: 〈초중대엽〉(2수), 〈이중대엽〉(2수), 〈삼중대엽〉(2수), 〈장대엽〉(1수) 계면: 〈초중대엽〉(1수), 〈이중대엽〉(1수), 〈삼중대엽〉(1수) 〈후정화(북전)〉(1수), 〈이후정화(이북전)〉(1수)
우조: 〈초삭대엽〉(13수), 〈이삭대엽〉(197수), 〈중거〉(73수), 〈평거〉(38수), 〈두거〉(44수), 〈삼삭대엽〉(22수), 〈소용〉(13수) 〈반엽〉(8수)
계면: 〈초삭대엽〉(6수), 〈이삭대엽〉(200수) 〈중거〉(143수) 〈평거〉(93수) 〈두거〉(95수) 〈삼삭대엽〉(26수) 〈소용〉(1수)
〈언롱〉(42수), 〈평롱〉(125수), 〈계락〉(53수), 〈우락〉(33수), 〈언락〉(45수), 〈편락〉(7수), 〈편삭대엽〉(55수), 〈언편〉(12수)
「가사(십이종)」
〈수양산가(首陽山歌)〉, 〈양양가(襄陽歌)〉, 〈처사가(處士歌)〉, 〈권주가(勸酒歌)〉, 〈백구사(白鷗歌)〉, 〈황계사(黃鷄詞)〉, 〈죽지사(竹枝詞)〉, 〈어부사(漁父詞)〉, 〈춘면곡(春眠曲)〉, 〈상사별곡(相思別曲)〉, 〈행군악(行軍樂)〉, 〈매화타령(梅花打鈴)>
가곡 부분인 「증보 가곡원류」는 남창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형 작품인 본가곡은 우조와 계면조로 분류한 후, 각 조에 딸린 악곡명 순으로 배열했다. 장형 작품인 소가곡은 악조 표시 없이 악곡명으로 배열했다.
십이가사 부분인 「가사(십이종)」은 12개 가사 전체의 가사를 실었다. 총 12가사이지만, 〈권주가〉는 현행가(現行歌)와 구가(舊歌) 두 가지를 실었다. 〈죽지사〉에는 〈건곤가(乾坤歌)〉, 〈행군악〉에는 〈노요곡(路謠曲)〉의 이칭을 달아주었다.
본문 지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곡에서는 주목할 만한 편집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곡원류』(국악원본)은 856수인데 비해, 『증보 가곡원류』는 무려 500수나 많은 1,356수를 수록하여 엄청난 증보를 이루었다. 이처럼 작품 수는 늘어났지만, 작품배열 방식은 『가곡원류』의 악곡 순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악곡 중 달라지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소용’이 우조, 계면조가 모두 배치된 점이다. 『가곡원류』에는 계면 소용이 없다. 계면 소용은 주로 근대 초부터 불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하나는 소가곡 중 일부 악곡명을 당대 통용 명칭으로 정리했다. 『가곡원류』의 ‘〈만횡〉’을 ‘〈언롱〉’, ‘〈롱가〉’를 ‘〈평롱〉’으로 기록했다.
가창 순서에 맞는 악곡별 작품 배치이지만, 한 악곡 내에서의 작품들은 가나다 순이다. 전통적으로 가집의 노래들은 익숙한 관습구에 따른 작품 배열이 일반적이다. 이에 비해 작품의 가나다 배치는 활자 시대의 새로운 편집 방식을 반영한 것이다.
작가 표기는 작품 하단에 이름만 쓰고, 일체의 다른 정보는 제시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작가명을 전체 작품에 고루 충실히 기입했다. 특히 〈언롱〉ㆍ〈평롱〉ㆍ〈계락〉ㆍ〈언락〉ㆍ〈편삭대엽〉 등 소가곡에서도 작가명 기입이 나타나는 것은 이 가집만의 특징이다.
모든 작품은 가곡의 5장 분장법에 따라 띄어쓰기를 해주고 있다. 활자본에서도 가창을 염두에 둔 편집 방식을 취하고 있다.
작품은 기존의 것들을 가져왔지만, 동시대의 작품도 실었다. 하규일 2수, 함화진 11수, 신문 등에 실렸던 것으로 추정되는 6수 등 총 19수가 동시대 작품들이다. 함화진 작품 11수 중 8수는 아악부를 떠나기 전에 완성되었음이 함화진 자필 이력서에서 확인된다. 기존 작품에다가 동시대 작품을 추가해 작품 목록을 만드는 것은 역대 가집에서 흔히 사용되던 방식이다.
함화진 작품 수록에서는 1937년 등사본, 1943년 활자본 간행, 1946년 재간행 사이에 눈에 띄는 차이가 나타난다. 등사본에는 함화진 작품이 실리지 않았고, 첫 활자본 간행 때 실렸으며, 재간행에서는 7수가 삭제되고 4수만 실렸다. 첫 활자본과 재간행본은 동일 인쇄 판형을 사용했기에 삭제된 작품들은 빈칸 그대로 남겨졌다. 편찬자가 동일하다는 점에서 작품 삭제는 겸양의 뜻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증보가곡원류』는 가집명 자체가 『가곡원류』를 계승한다는 의식을 잘 보여준다. 이는 이 시기 『시조유취(時調類聚)』(최남선, 1928), 『시조집(時調集)』(신명균, 1934), 『역대시조선(歷代時調選)』(이병기, 1940) 등 대부분의 고시조집 발간이 음악이 아닌 문학 중심 편집으로 변화해 가던 상황과 관련된다. 이런 고시집 발간은 시조가 국민문학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됐던 시대 조류에 따른 간행이었다. 함화진은 세습 악사 집안 출신으로 1900년대 초부터 음악 일을 시작하여 1932년 이왕직 아악사장에 올랐다. 취임과 동시에 아악부 이습회(肄習會)를 이끌며 많은 공연을 치러냈는데, 성악 중에는 단연 가곡이 가장 많이 공연되었다. 음악인 함화진에게 가곡은 시가 아닌 노래였기에 당시 고시조집 발간 경향과는 다른 방식, 즉 악곡 중심의 가집을 출간했던 것이다. 아악사장이던 1937년에 등사판을, 아악부를 떠난 후에는 활자본 가집을 거듭 내놓으며 성악으로써의 가곡이 명맥을 이어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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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愼慶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