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음)의 음높이를 정하기 위해 사용한 원통형의 관
중국에서 기원전 3세기의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처음 등장한 율관은 율의 음높이를 정하기 위해 사용한 원통형의 관을 의미한다. 이러한 율관은 도량형(度量衡)의 기준으로도 사용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율관의 길이를 정하는 문제는 여러 『악서(樂書)』에서 찾아볼 수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악학궤범(樂學軌範)』에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중국 고대 문헌 중 기원전 3세기의 『여씨춘추(呂氏春秋)』 「중하기(仲夏記)」에 황제(黃帝)의 명으로 황종 율관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12개의 서로 음높이가 다른 율관을 제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황종 율관이 기준이 되고, 이것을 바탕으로 나머지 11개의 율관이 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율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율관의 길이이며, 『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 등의 옛 문헌을 보면 이 길이를 정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이서정률법(以黍定律法)이고 또 하나는 후기지법(候氣之法)이다. 우리나라의 『악학궤범(樂學軌範)』 「십이율위장도설(十二律圍長圖說)」에 율관의 길이와 제작 방법 등이 기록되어 있다.
○ 설명 율관은 율의 음높이를 정하기 위해 사용되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율관이 길이이다. 『한서』 「율력지」 등의 옛 문헌을 보면 율관의 길이를 정하는 방법에는 이서정률법과 후기지법의 두 가지가 있다고 설명한다. 이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면, 먼저 이서정률법은 길이를 재기 위해 썼던 곡식인 기장 알을 세로로 쌓아 만든 종서척(縱黍尺)과 가로로 쌓아 만든 횡서척(橫黍尺)으로 구분하고, 이를 기준 삼아 율관의 길이를 산출하는 방법이다. 다음으로 후기지법은 계절의 변화로 율관이 잘 만들어졌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우선 만들어진 율관 여러 개에 불에 타고 남은 가루인 재를 넣어 땅속에 묻는다. 그리고 동지(冬至)에 묻어두었던 율관 중에서 땅 밖으로 재가 드러나는 것을 황종 율관으로 삼는 것이다. 이러한 후기법은 여러 자연적 조건이 다양하기 때문에 이후 많은 비판이 있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세종 시기의 박연(朴堧, 1378~1458)이 율관을 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1차 율관 제작은 1425년(세종 7) 해주에서 발견한 기장을 기준으로 황종 율관을 만들고, 이를 중국 아악기와 비교하였는데 서로 음률이 맞지 않았다. 따라서 1427년(세종 9)에 중국 편경의 황종에 맞추어 밀랍으로 거서 모양을 만들어 2차 율관을 제작하였고, 이 율관을 기준 삼아 아악기 중 하나인 석경(石磬)을 제작하여 왕께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박연은 1차 율관 제작이 중국 아악기와 맞지 않은 이유가 가뭄으로 인해 기장이 작았던 까닭이라고 하면서, 3차 율관 제작을 요청하는 상소문을 올렸지만, 이후 3차 율관을 제작하였다는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악학궤범』의 「십이율위장도설」에는 율관의 길이와 제작 방법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율관은 율의 음높이를 정하기 위해서도 중요하고, 도량형의 기준으로도 사용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왕권을 상징하는 의미도 갖는다.
『악학궤범』 김수현, 『조선시대 악률론과 『시악화성』』, 민속원, 2012. 남상숙, 『악학궤범 악론 연구』, 민속원, 2009. 송방송, 『한겨레음악대사전』, 보고사, 2012.
남상숙(南相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