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歌詩), 악시(樂詩), 가사(歌辭/歌詞), 악사(樂詞), 가곡(歌曲) 고려ㆍ조선조의 제향과 연향 등 궁중 공식행사에서 악(樂)ㆍ무(舞)와 융합체를 이루어 가창해온 시가 장르들을 아우르던 역사적ㆍ관습적 명칭
송나라로부터 대성신악(大晟新樂)과 유교적 예악제도가 고려에 도입되면서 악장 또한 그에 맞추어 구비되기 시작했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시(詩)》(한대(漢代) 이후에는 《시경(詩經)》)에 실린 시편(詩篇)들을 자신들의 악장으로 원용했고, 고려 또한 그 영향을 받았으며, 그 영향은 조선으로 계승되었다. 한시 형태이든 우리 고유의 노래 형태이든 고려와 조선의 악장은 단순히 시문학의 규범적 장르 명이 아니다. 음악ㆍ무용과 함께 융합무대예술의 한 축이자 유교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동아시아의 중세적 보편성과 개별 왕조들의 특수성을 복합적으로 구현하는 시가 장르들을 하나로 묶던 역사적ㆍ관습적 명칭이었다.
‘음악과 시(詩)・사(詞)의 결합’으로 보는 악장의 개념은 《시》에서 나온 것이다. 《시》 3백 편은 모두 옛 악장으로서 풍(風)[각 지방의 풍속을 그려내고 백성을 교화시키며 정치에 대한 비난이나 찬미 등을 풍유적(諷諭的)으로 드러낸 민간 노래]ㆍ아(雅)[정사의 잘되고 못됨을 관찰하여 찬미하거나 풍자하는 노래]ㆍ송(頌)[선왕들의 공덕을 송축하는 묘당(廟堂)의 노래]으로 분류된다. 주나라가 융성할 때는 《시》에 실린 개별적 시편들이 바로 악장이었으나, 주나라 이후 역대 왕조들의 경우《시》는 경(經)으로서 자신들의 악장을 제작할 때 따라야 할 모범적 선례였다. 이처럼 주나라에서 《시》의 시편들과 악장은 하나였으나, 후대 왕조들에게 《시경》은 주대(周代)의 악장집일 뿐이었으므로, 그들은 《시경》에 실린 시편들을 의방(依倣)하여 자신들의 악장을 만들게 된 것이다. 『고려사』 「악지」에는 아악ㆍ당악ㆍ속악ㆍ삼국속악 등에 관한 설명과 함께 예종 11년(1116)의 《태묘악장》, 공민왕 16년(1367)의 《휘의공주혼전대향악장(徽懿公主魂殿大享樂章)》, 공민왕 20년의 《친향태묘악장(親享太廟樂章)》 등과 당악정재 5곡[〈헌선도(獻仙桃)〉ㆍ〈수연장(壽延長)〉ㆍ〈오양선(五羊仙)〉ㆍ〈포구락(抛毬樂)〉ㆍ〈연화대(蓮花臺)〉], 〈석노교(惜奴嬌)〉 등 송악(宋樂) 43편, 〈무고(舞鼓)〉ㆍ〈동동(動動〉ㆍ〈무애(無㝵)〉 등 속(향)악정재 3편, 신라의 〈동경(東京)〉ㆍ백제의 〈정읍(井邑)〉ㆍ고구려의 〈내원성(來遠城)〉 등 삼국속악 14편이 실려 있는데, 이것들이 공식문서에 등장하는 고려의 악장들이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고려의 악장을 계승했고, 예조 등 국가기관과 정도전(鄭道傳) 등 문신들이 의례(儀禮)의 필요에 따르거나 자의(自意)에 의해 악장을 지어 바치기도 했다. 세종 11년 예조에서는 ‘새로 제작한 〈가성덕(歌聖德)〉과 〈축성수(祝聖壽)〉 등 악장 2편을 악부(樂府)에 기재하여 연향(宴享)에 사용하게 해 달라’는 계문을 올렸고, 태조 2년 정도전은 〈몽금척〉 등 5곡의 악장을 지어 바치면서 “역대 이래로 천명을 받은 인군에게 무릇 공덕이 있으면 반드시 악장에 나타내어 당시를 빛나게 하고 장래에 전하여 보이게 되니, 그런 까닭으로 ‘한 시대가 일어나면 반드시 한 시대의 제작이 있게 된다’고 하였습니다.(…)삼가 천명을 받은 상서와 정치를 보살핀 아름다운 점을 기록하여 악사(樂詞) 3편을 짓고 전문(箋文)에 따라 바칩니다.”라고 했으며, 정인지(鄭麟趾)는 「용비어천가서(龍飛御天歌序)」에서 ‘조선조 창업의 왕통체계와 주나라 창업의 그것이 상호 부합하니, 주공이 예악을 제정하여 〈면(緜)〉ㆍ〈생민(生民)〉ㆍ〈황의(皇矣)〉ㆍ〈칠월(七月)〉 등의 시가 있다’고 함으로써 「용비어천가」가 《시경(詩經)》의 정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악장임을 강조했다. 이상과 같이 《시경》-송-고려-조선조로 이어지는 시기의 공식 문헌들로부터 악장의 유래와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 용어의 성격
악장이란 용어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음악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고려조 음악이 실질적으로 큰 변화를 맞이한 계기는 송나라로부터 대성악을 수입하여 태묘에 제향을 올린 일이었다. 이 대성악이 바로 고려 아악(雅樂)의 기틀이 되었고, 전래되어오던 향악(鄕樂)과 신라 때부터 중국에서 도입하여 쓰던 당악(唐樂)을 합쳐 속악(俗樂)으로 명명하면서 아악과 구분하게 되었다. 이처럼 송의 대성악은 고려 때 제향에 쓰인 아악이고, 조선 세종 때는 박연(朴堧) 등이 한ㆍ당ㆍ송의 전적을 참고하여 주나라 제도에 근사한 아악을 새로 제정하였다. 아악악장은 모두 4언 시로 되어 있고 속악은 고려 당악에 속한 산사(散詞)들과 〈동동〉 등 우리 말 가사들로서 일정치 않은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개 아악은 제례악에 쓰였고 연향 등에는 속악이 쓰였다. 조선 악장은 고려 악장을, 고려 악장은 중국 송 악장을 각각 수용했다. 4언8구로 되어 있다는 점 외에도, 첫째 부분에는 제사의 대상을, 두 번째 부분에는 그 대상이 이룩한 생전의 치적과 덕을, 마지막 부분에는 제사 과정 및 기원(祈願)을 배치하는 등 내용 전개 방법이 모두 동일하다. 요소마다 운자(韻字)를 배치하고 있는 점이나 표현 수법도 차이가 없다. 《시경》 이래 역대 왕조들을 거치면서 '상황[제사]ㆍ대상[선대 조종]ㆍ감정 표현 방식[찬양]ㆍ규모와 연주되는 음악' 등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내용들은 악장의 맥락을 형성함으로써 동아시아 중세적 보편성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악장의 범주 안에 속하는 작품들은 표기에 따라 한시체ㆍ한시현토체ㆍ국문체[혹은 국한혼용체] 등으로 나뉘고, 한시체의 경우는 《시경》 시ㆍ초사ㆍ송사 등으로 국문시의 경우는 고려속악가사ㆍ경기체가ㆍ신시체(新詩體) 등으로 그 관습적 장르들의 양상이 다양하게 드러난다. 서사송시체로 분류되는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까지 감안하면 다양한 표기법이나 형태의 시가문학 장르들이 복잡하게 혼재된 실체가 악장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ㆍ관습적 장르인 악장에 일관된 시문학 장르로서의 독자적 의미를 부여하기란 불가능하다. 문학 장르가 되려면 문학적 기법과 어조ㆍ내용ㆍ창작의도 등에서 뚜렷한 일관성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시경》 시 이래 역대 악장들은 정재(呈才)[혹은 악무(樂舞)]의 노랫말로 쓸 것을 전제하고 지은 것들이므로 형식이나 구조, 창작 의도의 면에서 기존의 시문학 장르들과는 엄연히 구분된다.
○ 형태적 특징 및 정착양상
역대 왕조 교사악장(郊祀樂章)들의 근원적 텍스트는 《시경》이고, 일부 연향악장들도 《시경》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실제 《시경》 시 텍스트를 그대로 갖다 쓰지는 않았으나 그 집구(集句)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고, 악장의 형태나 주제의식 또한 《시경》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예컨대 공민왕대의 〈휘의공주혼전대향악장〉 6수는 거의 모두 《시경》 시 텍스트를 수용하여 ‘짜깁기’ 수준으로 만들어낸 것들이고, 「신찬태묘악장」 또한 〈제6실악장〉의 제2구를 제외한 모든 텍스트들이 《시경》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조선조로 넘어와서도, 예컨대 태종 조 악조(樂調)의 악장들 중 《시경》 시가 15편에 달할 정도로 악장에서 차지하던 《시경》의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이처럼 고려조에서는 《시경》 시 자체를 악장으로 쓰기도 하고, 《시경》 시편의 구절들을 따다가 조립하기도 하며, 시구들을 그대로 따오지 않으면서 표현이나 구성법이 《시경》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양상으로 악장 제작의 관습이 형성되었고, 그 관습은 조선조 악장의 일부로 계승되었다.
조선 초기 종묘ㆍ원구ㆍ사직ㆍ선농ㆍ선잠 등 제향의 악장들은 새로 지었으나, 음악은 중국계 아악을 사용했다. 태종대에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이는 중국계 아악이 세종에 의해 비판된 것은 음악 뿐 아니라 악장까지 조선 특유의 양식으로 확립될 것임을 암시하는 단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음악과 함께 악장의 정비가 활발하게 추진되는데, 악장의 개념이나 존재 의의 혹은 기존 악장에 대한 재평가 등이 이루어지는 것도 같은 시기의 일이다. ‘당시 관습도감의 향악 50여성과 삼국 및 고려시대 민간의 우리말 노래들도 정치의 득실을 상상해 볼 수 있어 족히 권계(勸戒)의 자료가 될 만하다는 것, 조선조 개국 이래 예악이 크게 성행하여 조묘아송지악(朝廟雅頌之樂)은 이미 갖추어졌으나 민간 가요의 노랫말들은 채록할 방법이 없어 문제가 있다는 것, 옛날의 채시법(採詩法)에 의거하여 시장이어(詩章俚語) 즉 우리말 시장(詩章)들 뿐 아니라 오륜의 올바름에 관계되어 족히 권면할만한 것들과 광부원녀(曠夫怨女)의 노래로서 변풍(變風)을 면치 못한 것들도 모두 찾아 수집해 올리게 해 달라’는 등 예조의 계문을 보면, 조선조에서 《시경》 이래 역대 왕조 악장의 관습과 함께 당대 민간의 노래들도 광범하게 수용하고자 했음이 확인된다.
‘시가를 짓는 것은 모두 선왕의 성덕(聖德)과 신공(神功)을 칭찬하기 위한 것이므로 반드시 성률에 맞추어 향당 방국으로 하여금 노래하고 읊고 외우게 함으로써 사모하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는 점을 전제로, ‘왕후 부인들의 방중 악가였으나 향국에 번진 「주남」ㆍ「소남」, 천자가 신하 혹은 귀빈들과 잔치하거나 사신을 보내고 위로하는 악가로서 연례와 향음주에도 통용되던 〈녹명〉ㆍ〈사모〉ㆍ〈황황자화〉, 본디 천자가 조회를 보는 노래였으나 두 임금이 서로 만나 보는 음악으로 통용된 〈문왕〉ㆍ〈대명〉ㆍ〈면〉, 원래 천자가 종묘에서 사용한 악가였으나 원후(元侯)의 제향에도 〈사하〉ㆍ〈번〉ㆍ〈알〉ㆍ〈거〉’ 등을 들고, ‘〈용비어천가〉는 조종의 성덕과 신공을 가영하기 위해 지은 것이니 마땅히 상하에 통용하여 칭양의 뜻을 극진히 해야 하며, 그것을 종묘에만 사용할 것이 아니라 〈여민락〉ㆍ〈치화평〉ㆍ〈취풍형〉 등의 악을 공사 연향에 모두 통용하게 해달라’는 요지의 계문을 의정부에서 올리자 왕이 가납하였다. 그와 동시에 문무(文武)의 춤곡을 만들어 《보태평》, 《정대업》이라 부르고 별도로 상서(祥瑞)의 감응된 바를 취재하여 발상(發祥)이란 곡조를 지었으며, 〈환환곡(桓桓曲)〉ㆍ〈미미곡(亹亹曲)〉ㆍ〈유황곡(維皇曲)〉ㆍ〈유천곡(維天曲)〉ㆍ〈정동방곡(靖東方曲)〉ㆍ〈헌천수(獻天壽)〉ㆍ〈절화(折花)〉ㆍ〈만엽치요도최자(萬葉熾瑤圖嗺子)〉ㆍ〈소포구락(小抛毬樂)〉ㆍ〈보허자파자(步虛子破子)〉ㆍ〈청평악(淸平樂)〉ㆍ〈오운개서조(五雲開瑞朝)〉ㆍ〈중선회(衆仙會)〉ㆍ〈백학자(白鶴子)〉ㆍ〈반하무(班賀舞)〉ㆍ〈수룡음(水龍吟)〉ㆍ〈무애(無㝵)〉ㆍ〈정읍(井邑)〉ㆍ〈진작(眞勺)〉ㆍ〈이상곡(履霜曲)〉ㆍ〈봉황음(鳳凰吟)〉ㆍ〈만전춘(滿殿春)〉 등의 노래들을 속악으로 정한 것은 이 노래들의 가사를 악장으로 공식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회례악(會禮樂)으로 쓰기 위해 만든 《보태평》ㆍ《정대업》이 세조대에 이르러 약간의 수정을 거친 뒤 《종묘제례악》과 진풍정(進豊呈)ㆍ양로연(養老宴) 등에도 통용되기 시작했다. 특히 《시경》 이래 역대 왕조에서 꾸준히 지속되던 4언의 악장은 조선의 건국 이후 창작 악장들의 다양한 시형들과 심지어 민간가요까지 들어옴으로써 형식의 다양성을 구현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여민락〉ㆍ〈치화평〉ㆍ〈취풍형〉 등 공(公)ㆍ사(私) 연향에 두루 쓰이던 악장이 〈용비어천가〉인데, 그 ‘국문가사-한문시 병치(竝置)’ 구조가 단순히 의미전달의 목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민락〉의 악장으로는 한문시[수장(首章)ㆍ2장ㆍ3장ㆍ4장ㆍ졸장(卒章)]를, 〈치화평〉ㆍ〈취풍형〉의 악장으로는 국문가사와 한문시들[〈치화평〉: 수장~16장, 졸장/〈취풍형〉: 수장~8장, 졸장]을 각각 사용한다는 점에서 〈용비어천가〉의 ‘국문가사-한문시 병치’ 구조는 분명한 이유를 갖고 있었다. 수장과 110~125장을 제외한 한문시 전체는 4언8구의 형식으로 기존 정격악장의 형태를 완벽하게 지키고 있으나, 국문가사의 경우는 외견상 새로운 형태이다. 세종의 입장에서 예악전통의 동아시아적 보편성을 단절시킬 수 없었고, 동시에 중국계 아악을 사용하는 경우의 문제점을 스스로 밝힌 바와 같이 음악이나 악장의 조선적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무리 없이 해결하고 궁극적으로 조선의 음악과 악장의 독자성을 확립하기 위한 방안으로 나온 것이 ‘국문가사-한문시 병치 구조’였다. 〈용비어천가〉를 연주하기 위하여 고려조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향악과 당악을 사용했다는 사실과, <용비어천가>의 음악적 형식이 〈진작(眞勺)〉 및 〈북전(北殿)〉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전강(前腔)ㆍ중강(中腔)ㆍ후강(後腔)ㆍ대엽(大葉)ㆍ삼엽(三葉)ㆍ사엽(四葉)ㆍ오엽(五葉)’의 확대 발전형이라는 점 등을 감안한다면, 이런 의도는 충분히 달성된 것으로 보인다.
〈용비어천가〉 제작자들이 ‘민속의 칭송을 캐 모았다’고 밝힌 말은 노래의 소재들을 민간에서 수집했다는 점과 왕조에 대한 민심의 귀부(歸附)를 함축하며, ‘감히 조묘의 악가에 비길 수 없다’는 말은 조묘의 악가가 의례적이고 작위적인 내용을 지닌 반면, 〈용비어천가〉는 자연스럽고 진실에 입각한 사적(事跡)들의 실재성을 바탕으로 만들었음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즉 백성들이 모두 참여하여 실제 있었던 일들을 자신들의 노래 형식으로 읊어낸 〈용비어천가〉가 비록 변격이라고는 해도 부분적으로 정격 악장의 요소를 갖추고 있는 한 정통악장의 범주에 속한다는 점을 강조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용비어천가〉가 악장으로서의 동아시아적 보편성을 갖고 있다면, 같은 시기의 〈월인천강지곡〉은 완벽하게 조선적 특수성을 고수한 악장이다. 4언체 정격악장의 계속성을 보여줄 필요도 없었고, 드러내려는 내용의 증거능력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의 사적들을 끌어들일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용비어천가〉와 같이 완전하긴 하나 구차한 방법을 채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정책적으로 배척당하던 불교의 경우 최소한의 표현법만 도입해 쓰는 데 그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형태적ㆍ내용적으로 동아시아의 중세적 보편성과 조선적 특수성을 구비함으로써 〈용비어천가〉는 조선조 악장의 완결편이 되었다. 그 후 인조조와 숙종ㆍ영조조의 종묘악장론이나 순조대 효명세자가 주도한 연향악장의 확충 등에서 보듯 시대적 양상에 따른 음악과 악장의 변화 혹은 변질이 두드러졌으며, 그런 현상은 왕조의 쇠락과 맞물리는 문제였다. 특히 연향악과 악장의 경우 체제의 정대한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 향락의 현장에서 찬송 대상 개인의 장수와 복을 기원하는 담론으로만 기능하면서 본질적인 생명은 끝났다고 보기 때문이다.
○ 세계관 및 주제의식
《시경》과 아악ㆍ당악 등 중국의 음악과 악장들의 도입으로 고려나 조선의 음악 및 악장은 상당히 세련될 수 있었다. 우리 고유의 향악마저 당악과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중세적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 도입하여 궁중음악의 한 부분으로 쓰고 있던 당악의 기본 정신이자 주제가 송도(頌禱)였고, 그 현실적 필요성을 절감하던 우리나라 중세왕조들에서 그런 표현 관습을 도입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서왕모 등 신선의 배역을 수행하는 여악들이 당악정재의 무대에서 임금에게 장수와 행복을 빌어주던 행위도 그 필요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따라서 당악정재들과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맺고 있던 속악정재들이 송도의 표현과 관습을 모방하는 것은 당연했다. 예컨대 속악정재의 하나인 ‘동동’이 본뜬 것은 헌선도 등 당악정재들이나 보허자 등 개별 음악의 표현 관습이었고, 속악악장 <동동>은 당악정재의 악장들로부터 본뜬 송도를 ‘임금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으로 바꾸어 다양하게 표현함으로써 그 나름의 독자성을 구현할 수 있었다.
아악과 아악악장이 쓰인 문묘제례, 사직제례, 선농ㆍ선잠제례, 풍운뇌우제례 등과, 향악이 쓰인 종묘제례 등은 국가제례의 중심에 서 있었으며, 왕조의 정치적・이념적 정당성을 주장하고 왕실의 권위를 확보함으로써 왕조 존립의 보편적 가치와 지속의 당위성을 선양하려는 목적의식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들 제례악의 상당부분은 중국에서 도입한 아악이었고, 악장 역시 상당부분 중국 역대 왕조의 그것들과 유사했다. ‘악장의 유사성이나 동질성을 통해 당시 동아시아 문명론의 표준과 보편성을 확보하겠다’는 왕조의 중세적 욕망도 이런 사실로부터 확인된다.
《시경》에서 발원된 역대의 악장은 송 대에 이르러 집대성[정리・개편・신제]되었고, 악곡・악기・악장 등 음악의 제반 요소들과 함께 의례 등 콘텍스트 전반이 고려에, 고려를 통해 조선에 각각 수용되었다. 국가의례에 사용되었고 동아시아 중세적 보편성의 범주 안에서 악장의 존재를 문헌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대가 고려와 조선이었다. 중국왕조들과 고려 사이에 악장 제작 의도나 관습 및 주제의식 상의 차이는 거의 없었고, 고려와 조선 간의 차이도 없었다. 왕조들 간의 정치적・외교적 긴밀도와 유교적 예악제도의 유사성은 밀접하게 연관된다. 따라서 시대나 지역의 차이를 넘어 왕조 악장들이 공유하던 유사성은 보편성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아악악장만 그런 것이 아니다. 연향에 주로 쓰이던 당악이나 당악악장도 마찬가지였다. 제왕의 만수무강이나 복을 빌어주는 것이 궁중 연향의 목적이었고, 그 언어적 메시지가 바로 악장이었으며, 통치 질서의 정점에 있던 제왕의 만수무강은 왕조의 안정에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 악장이 궁극적으로 노린 것은 ‘왕조 영속의 당위성’을 고취하여 왕조를 안정적으로 발전시키는 일이었다. 그러자면 악장에 이상정치의 꿈을 형상화할 필요가 있었다. 제왕이 선정을 베풀면 백성은 제왕에게 충성을 바치게 된다는 태평시대의 이상을 다양한 표현 속에 담아내고자 한 것이 악장이었다. 악장이 경세문학(經世文學)인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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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익(曺圭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