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민락〉
고려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당악정재 음악으로 쓰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전승이 단절되었다. 조선 말엽 궁중음악에 아명이 사용되면서 〈여민락〉의 아명으로 '오운개서조'가 쓰였고, 오늘날에도 〈여민락〉의 아명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리하여 오운개서조는 본래 당악정재의 음악과 〈여민락〉의 아명으로 혼용되고 있다.
오운개서조는 고려시대에 송나라에서 들어온 당악정재 중 〈오양선(五羊仙)〉과 〈연화대(蓮花臺)〉를 출 때에 연주된 악곡 중 하나로 쓰이기 시작하였고, 조선조에는 당악정재와 고취악으로 용도가 확대되었다.
○ 역사 변천 과정 五雲開瑞朝
『고려사』 「악지」에는 오운개서조가 당악정재 〈오양선〉과 〈연화대〉의 음악으로 쓰였다. 『악학궤범』 권4 「시용당악정재도설」에는 〈오양선〉, 〈금척(金尺)〉, 〈근천정(覲天庭)〉에 쓰였다. 고려시대에는‘오운개서조인자(五雲開瑞朝引子)’로 곡명이 쓰였고, 『악학궤범』에서도 주로‘오운개서조인자’로 쓰였다. 다만, 〈오양선〉에서는 ‘오운개서조인자’와 ‘오운개서조’ 두 가지 형태의 곡명이 쓰인 차이가 있다. 『고려사』 「악지」에서 〈연화대〉에 쓰인 '오운개서조인자'가 『악학궤범』에서는 전인자(前引子)와 후인자(後引子)로 바뀌는 변화가 있었다. 그 외 오운개서조는 세종대 세자가 조참(朝參)할 때의 고취악으로 ’오운개서조 미후‘가 쓰임으로써 용도가 확대되는 경향을 보였다. 성종대에 편찬된 『경국대전』에 악공을 선발하는 시험곡으로 당악에 들어 있으며, 세종대의 음악을 기록한 『대악전보』 에도 그 곡명이 보인다.
조선 후기에 오운개서조는 궁중연향 때의 연례악, 조참 때의 고취악 등으로 쓰이면서 전승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당악정재 반주악으로 쓰였던 오운개서조는 〈향발〉, 〈무고〉 등과 같은 향악정재의 반주악으로 쓰이는 변화가 있었다. 고종 19년(1882)의 『정재무도홀기』에 전하는 〈봉래의〉의 반주음악으로 〈보허자령(步虛子令)〉에 임시로 붙인 이름으로도 쓰였다. 대한제국기였던 1901년에 행한 진연에서도 무고의 반주악으로 쓰인 기록이 보이나, 오늘날에는 연주되지 않는다. 현재 전하는 악보가 없어 구체적인 음악 내용은 알기 어렵다.
한편, 오운개서조는 〈여민락〉을 가리키기도 한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오운개서조는 〈여민락〉의 아명으로 쓰는 관행이 생기면서 고려시대와는 전혀 다른 곡을 가리키는 곡명이 되었다.
○ 음악적 특징
전하는 악보가 없어 음악적 특징을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다만, 조선조에 오운개서조가 정재반주 외에 조참 때 고취악으로도 쓰였던 점을 고려하면, 정재반주로 연주되었을 때와 고취악으로 연주되었을 때의 악대 악기편성에 따른 음향적 차이는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운개서조는 고려시대 송나라에서 전래된 이래 조선 전기까지 당악정재의 음악으로 쓰이는 한편, 세종 이후 조참 때의 고취악 용도로도 쓰이는 등 천년에 가까운 긴 역사가 있는 궁중음악이다.
『경국대전』 『고려사』 「악지」 『악학궤범』
이혜구 역, 『신역 악학궤범』, 국립국악원, 2000.
임미선(林美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