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성악원(朝鮮聲樂院), 조선음악연구회(朝鮮音樂硏究會)
1934년에 설립된 판소리와 창극 중심의 전통음악인 단체
1934년 4월 설립된 조선성악원(朝鮮聲樂院)이 전신이다. 그해 5월 조선음악연구회(朝鮮音樂硏究會)로 개칭하여 재출범하였으며, 7월에는 다시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로 개칭하고 그사이 부서별 운영 체계를 갖추었다. 다수의 판소리 명창과 일부 기악 명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이전의 많은 음악인 단체들처럼 조선음률의 부흥과 예술인 육성을 목표로 내세웠다. 1910년대 이후 여러 단체가 명멸했으나 1930년에 설립된 조선음률협회에 이은 1934년의 조선성악연구회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활동 성과를 보여주었다. 이후 광복 이전까지 조선성악연구회는 판소리와 창극을 공연하는 예술인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조선음률협회가 음악인들의 음반 녹음을 장려했다면, 조선성악연구회는 창극의 양식을 정립하여 판소리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1934년 경성 공평동 29번지의 한옥 한 채를 기증받아 이동백(李東伯, 1866~1949), 김창룡(金昌龍, 1872~1943) 등 음악인 십여 명이 설립한 조선성악원이 그 시작이다. 조선가무의 연구 및 가객의 양성과 홍보를 목적으로 출발하였다.
○ 역사 변천 과정
공평동 29번지의 기증 받은 한옥에서 출발한 조선성악원이 조선음악연구회를 거쳐 조선성악연구회로 재출범할 때에는 사무소도 관훈동 4번지로 이전했다. 이후 1937년에는 익선정 159번지로 다시 옮겼는데, 사무소로 쓰인 익선정의 가옥은 박록주 명창의 후원자인 순천 사람 김종익이 매입하여 기부한 것이라 한다. 김초향 명창 또한 익선정에 있던 자신의 집을 조선성악연구회의 사무소로 기부했다고 증언했다. 이런 복잡한 상황 때문에 언제 누가 사무소 공간을 기부했는가에 관해 여러 자료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핵심적인 인적 구성은 조선성악원을 설립할 때부터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당대의 명창, 명인 십여 인을 중심으로 조선성악연구회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그들의 제자나 지방에서 상경한 음악인들이 합류하면서 세가 확장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해산된 시점은 명확히 지정하기 어렵다. 대중에게 판소리와 창극계를 상징하는 단체로 각인되었기 때문에 광복되면서 사회 구조가 급격히 재구성되기 전까지는 존재감을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의 한국판소리보존회가 그 명맥을 잇는다고 표방하는 것도 그러한 맥락 위에 있다.
○ 설립 목적 및 설립 주체
조선성악원의 설립은 조선음률협회(朝鮮音律協會)가 해산된 후 결속력이 느슨해진 음악인들을 다시 규합하려는 취지로 기획된 것이다. 활동 목적은 조선가무의 연구, 가객의 양성과 홍보 등을 통해 쇠잔해 가는 조선음률의 부흥을 도모하는 데에 있었다.
창립에 참여한 음악인은 이동백, 김창룡, 한성준(韓成俊, 1875~1941), 오태석(吳太石, 1895~1953), 심상건(沈相健, 1889~1965), 김종기(金宗基, 1902~1940), 김초향(金楚香, 1900~1983), 박록주(朴綠珠, 1905~1979), 김채련(金彩蓮, ?~?) 등 십여 명이었다. 당대 판소리 명창들이 주축이며 창극 공연에 참여하는 기악 명인들도 포함된 구성이다. 당시의 관련 기사들에서 생략되었을 이름들을 감안하면, 이후 단체의 명칭이 두 번 바뀌면서도 설립 취지와 인적 구성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다만 조선성악연구회로 재출범할 때에는 업무별로 부서를 나누었는데, 이는 조선성악연구회의 주요 활동에 창극 공연의 비중이 커지면서 그를 관리할 필요에 따라 구축한 체계라 할 수 있다.
○ 조직의 체계와 구성원
1934년에 개최된 조선성악연구회 제1차 총회에서 이동백이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 상무이사 정정렬(丁貞烈, 1876~1938), 회계이사 한성준, 서무 김용승(金容承, ?~?)으로 이사진을 구성했다. 주요 부서로는 기악 연주부, 교습부, 흥행부, 외교부 등을 조직했다. 이후 조선성악연구회에서 공연한 거의 모든 작품에 각색으로 참여한 김용승이 처음부터 임원을 맡은 것을 보면, 이 단체의 주요 사업이 창극 제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상무이사인 정정렬은 연출과 작곡을 도맡았다. 판소리 교육은 송만갑(宋萬甲, 1865~1939)이 왕성하게 진행했다.
당시의 기사로 확인되는 조선성악연구회의 총회는 모두 7회인데, 1937년 5월부터 1년간 김창룡이 맡았던 기간을 제외하면, 은퇴를 선언하기 전까지 이동백이 늘 이사장이었다. 따라서 조선성악연구회의 활동과 관련된 기사에는 으레 이동백이 등장하며 실제로도 그의 인기가 가장 높았다. 판소리 명창 이외에도 한성준, 신쾌동(申快童, 1910~1977), 오태석, 정남희(丁南希, 1905~1984) 등 본래 연주자 출신인 이들도 단체의 운영 및 창극 공연에 활발하게 참여했으며, 근대오명창의 다음 세대인 조상선(趙相鮮, 1909~?), 임방울(林芳蔚, 1905~1961), 김연수(金演洙, 1907~1974), 김여란(金如蘭, 1907~1983), 임소향(林素香, 1918~1978) 등도 합류했다.
○ 음악활동과 활동무대
조선성악연구회의 주요 활동은 명창대회 형식의 공연과 창극이었다. 명창대회는 1920년대 중반에 시작되어 이후 민속악 공연을 대표하는 공연 형식으로 유행했는데, 조선성악연구회의 구성원들은 당대 최고의 명인, 명창들이므로 자연스럽게 각종 명창대회의 주요한 출연진이 되기도 했다. 명창대회가 개인으로서의 공연 활동이라면, 창극은 조선성악연구회라는 단체의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조선성악연구회는 음악인 단체를 표방하지만 기실 창극 공연단으로 간주해도 될 만큼 창극 공연에 열중했다.
조선성악연구회에서 가장 많이 공연한 창극 작품은 〈춘향전〉, 〈심청전〉 등 비교적 대중에게 익숙한 것들이었다. 희창극 〈배비장전〉(1936.02.09.-13)과 연쇄창극 〈유충렬전〉(1936.06.08.-11)을 각각 공연하였고 그 후로 한 차례씩 더 공연하기도 하였으나 상대적으로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 외에도 신작으로 〈숙영낭자전〉(1937), 〈편시춘〉(1937), 〈농촌야화〉(1938), 〈옹고집전〉(1938), 〈옥루몽〉(1940) 등을 공연했으나 대개 일회성에 그쳤다. 또한 전승5가 가운데에서도 창극으로 구현하기 어려운 〈적벽가〉는 한 번도 공연하지 않았으며, 〈토끼타령〉의 경우는 최초의 가면극이라는 광고를 앞세워 한 차례 공연했을 뿐이다.
김용승의 각색과 정정렬의 연출을 중심으로 레퍼토리의 다양화나 내적 변화가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당시에 유행했던 다양한 신극들과 공연 기반을 공유했다는 점은 능동적 혁신을 위한 고민에 있어서 근본적인 한계로 작용했다. 따라서 조선성악연구회는 대중에게 익숙한 작품들 위주로 창극 공연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판소리의 보급과 교육 사업에도 노력했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중학 이상의 지원자에게 무료로 판소리를 강습한다고 해도 찾아오는 강습생이 없다며 조선성악연구회의 간판 명창인 이동백이 탄식할 정도였다.
1934년 창립 직후 몇 차례의 실험적 창극 공연에서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던 조선성악연구회는 1936년의 〈가극 춘향전〉 공연을 기점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그것은 흥행잠재력이 가장 높은 〈춘향전〉을 택한 점, 조선일보사의 지원, 동양극장의 지도 등을 통해 이룬 성과라 할 수 있다. 특히 동양극장으로부터는 최신식의 극장 시설뿐 아니라 연기 지도와 조명ㆍ의상ㆍ효과는 물론 경영기법에 대해서도 상당한 수혜를 입었다. 당시 동양극장의 전속극단으로는 청춘좌와 호화선이 있었으나, 조선성악연구회도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무대를 사용했다. 동양극장에서는 조선성악연구회의 지방 순회 창극 공연에 직원을 파견하여 실무를 돕기도 했다. 이를 통해 비로소 창극의 양식이 정립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전통음악계 내부의 인력이나 기술이 아닌 동양극장의 선진적 노하우에 크게 영향을 받은 점은 창극 양식의 태생적 한계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런 상황 자체는 자생의 기반이나 급변하는 시대에 대한 적응력을 미처 갖추지 못한 상태의 판소리계로서는 매우 다행스러운 기회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약화된 판소리의 전승력이 창극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통해 활로를 모색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노재명, 『조선성악연구회의 발자취를 따라서』, 채륜, 2017. 이태화, 『일제강점기의 판소리 문화 연구』, 박이정, 2013. 김성혜, 「조선성악연구회의 음악사적 연구」,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박주희, 「1920~1930년대 전통예술 전문단체의 활동 연구」,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2. 성기련, 「1930년대 판소리 음악문화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이태화(李泰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