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유교 경전에 의하면 헌가는 제후가 사용하는 당하악이다. 고려조에 대성아악이 유입되면서 헌가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조선조 제례 악대에는 아부악현(雅部樂懸)의 헌가와 속부악현(俗部樂懸)의 종묘영녕전헌가(宗廟永寧殿軒架)가 있다. 신악(新樂) 창제 후에는 조정의례 및 예연에서 신악을 비롯한 속악을 연주하는 전정헌가(殿庭軒架)가 출현하였다.
헌가는 유교 경전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으며 한반도에서는 고려조에 대성아악 유입 이후 조선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형의 헌가가 사용되었다.
헌가의 시원은 당하악에서 찾을 수 있다. 『서경(書經)』 「우서(虞書)」에는 ‘당하에서 관악기와 도고를 설치하고 생과 용을 번갈아 연주한다(下管鼗鼓, 笙鏞以間)’이라고 하여, 당하에는 관악기와 타악기가 설치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주례』에 따르면 헌가는 제후가 사용하는 악대라고 하였다. 한나라의 정현(鄭玄, 127~200)은 동서남북 네 면에 종경을 설치하는 천자(天子)의 궁가(宮架)와 달리 헌가는 남쪽에 악기를 설치하지 않고 세 면에만 종경을 설치하는데 이는 왕이 남면하는 방향을 피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고려조에 대성아악(大晟雅樂)이 유입되면서 편종(編鍾)ㆍ편경(編磬)ㆍ일현금(一絃琴)ㆍ삼현금(三絃琴)ㆍ소생(巢笙)ㆍ화생(和笙)ㆍ지(箎)ㆍ적(笛)ㆍ축(柷)ㆍ어(敔) 등이 편성된 헌가가 당하에 설치되어 제례와 조정의례에서 음악을 연주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 태종대 작성된 『세종실록』 「오례」 ‘길례서례’ 소재 헌가에는 당우삼대(唐虞三代)의 법을 따라 헌가에 현악기를 편성하지 않고 관(管)ㆍ약(籥)ㆍ생(笙)ㆍ우(竽)ㆍ소(簫) 등 관악기와 편종ㆍ편경ㆍ축ㆍ어 등 타악기만으로 편성하였다.
이후 성종대의 『국조오례의』 및 『악학궤범』에도 아부악현의 헌가는 현악기가 제외된 편성을 띄고 있다.
1464년(세조 10) 이후로 종묘영녕전제례에 신악을 사용하게 되면서 아ㆍ당ㆍ향악기를 모두 포함한 종묘영녕전헌가가 속부악현으로 새로이 출현하는데, 이 악현에는 가야금ㆍ현금ㆍ당비파ㆍ향비파 등의 현악기와 관악기가 두루 편성되었다.
세종대에는 제례뿐 아니라 회례에도 아악을 사용하면서 회례 헌가가 출현하기도 하였다.
신악 창제 이후 회례를 비롯한 모든 조정의례에 속악이 사용되면서 전정헌가(殿庭軒架)가 출현하였다. 전정헌가는 향ㆍ당악기 중심으로 편성되고 헌가가 갖춰야 할 아악기도 갖춘 악대로 조선 후기까지 여러 조정의례에서 왕의 출입과 신하들의 배례 등 절차에 음악을 연주하였다.
고종이 황제국을 선포하며 대한제국 체제로 운영된 이후로는 궁중의례에 헌가 대신 궁가(宮架)가 사용되면서 악대 또한 황제국 위상에 맞게 개정되었다.
고려조에 처음으로 아악기로 구성된 헌가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조선 건국 후에도 제례와 여러 조정의례에 헌가를 사용하였다. 신악 창제 후 신악을 비롯한 속악을 연주할 수 있는 속부악현의 종묘영녕전헌가와 조정의례에 사용되는 전정헌가가 정립되었는데 조선의 형편에 맞는 새로운 헌가가 생겨났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고려사』 『서경』 『세종실록』 「오례」 『악학궤범』 『주례』
김종수, 「朝鮮前期 雅樂 樂懸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4. 임미선, 「조선시대 殿庭軒架와 登歌」, 『民族音樂學』 17, 서울대학교 동양음악연구소, 1995. 임미선, 「朝鮮朝 殿庭軒架의 文獻的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7.
임영선(林映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