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현가(絃歌, 현악기와 노래)를 업(業)으로 하는 전문음악인
현수(絃首)는 자의(字意)로만 보면 현수는 현악기를 연주하는 이들 중에 우두머리가 되며, 혹은 현수(絃手)로도 기록하고 있으므로 현악기를 연주하는 전문가[手]로 해석된다.
현수는 세종 13년 외방관기의 혁파에 따른 선상기(選上妓)에 대한 대안으로 경중 무녀의 딸과 함께 고려 대상이었다. 현수는 당시 외방에 소속된 노비를 혁파하고자 하여 거론된 이들이기 때문에 조선 초기부터 이들의 신분은 노비가 아닌 양인임을 알 수 있다.
현수는 궁중에서 필요시 입궁하였는데, 연산군 1년의 기록에 의하면 성종 때 나례에 입궁하였다. 현수는 연말 나례를 위해 미리부터 재인[광대]과 함께 궁에 들어와 정재를 준비해 올렸다. 이후 일반적으로 연산군이 퇴위하고 중종 반정으로 현수의 입궁은 금지되었을 것으로 생각될 수 있으나, 실제로는 중종 1년까지만해도 관례대로 관나때에는 광대와 함께 입궁하여 재주를 펼쳤으므로 이후로도 연말 나례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현수는 단순히 궁정나례에서만 활동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례가 궁정(宮庭)과 도상(途上)에서 모두 펼쳐졌듯이 현수도 궁정뿐 아니라 도상에서도 주악을 담당했다. 현수는 연산군 12년 어가를 맞이할 때 공인과 함께 향토 음악을 연주했다. 중종 23년 나례의 준비시에 의금부는 의례 정재인, 공인과 여기(女妓), 현수(絃首)를 준비하지만, 흉년으로 인해 중종은 현수를 제외하게 하였다는 기록에 의해 일반적으로 도상 나례에 참여하여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수가 나례 외에 궁에 입궁한 경우는 거의 없는데, 예외적으로 숙종 27년 숙정(淑正)이 새 무당과 두 궁인과 현수(絃手) 등과 더불어 방문(房門)을 걸어 잠그고 암암리에 기도하고 축원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내용은 중전(中殿) 민씨의 인형을 두고 화살을 쏘아 맞히는 의식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때 무당과 함께 들어온 이로 현수의 이름 자근녀(者斤女) 가 거론된 바 있다.
조선 중후기 이후 현수는 나례 외에도 국가 대례로서 연향을 위해 차출되었다. 숙종 28년 기록에 의하면 가례때 기녀의 수가 부족하여 형조에서는 무녀와 함께 현수를 충당하고자 하였으며 숙종은 이를 허락하였다. 경종 2년 존숭의례에 모자라는 인원을 현수로 채웠으며, 영조 16년의 기록 및 영조 20년(1744) 『사도세자가례도감의궤』에 의하면 부족한 여기의 수를 메우기 위해 현수(絃首)가 차출되었다.
이를 종합해보면, 현수는 조선 전기부터 궁정 나례를 위해 남녀광대들과 함께 차출되어 입궁하여 재주를 올린 이들을 말한다. 현수는 비단 궁정 관나때뿐 아니라 도상에서 펼쳐졌던 어가환궁의식과 조칙사 영접의식을 위한 도상나례에도 광대와 함께 참여해 일정한 역할을 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현수는 나례 외에도 국가의 연향의 충원을 위해 더욱 빈번하게 차출되었다.
○ 신분 및 역할
현수는 인조 7년 과세의 범위에서 빠져 있던 집단으로 무녀와 함께 거론되었으므로 당시 조선시대 천인에게는 세금을 걷지 않았던 사실에 기초하여 천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단 현수를 취하는 것은 첩이나 사노비와 정을 통하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인식되었다는 점에 의해 독립된 양인의 신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수는 민간의 연향에서 흥을 돋우는 민속음악인이었으며, 한편으로는 무의식에서 관련된 활동도 했다. 성종 2년 나이가 어리고 아리따운 이들을 모아 현수로 삼고 주육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여염을 떠들썩하게 하는 풍속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에 의해 민간의 잔치 등에서 음악활동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무의식에서도 일정 역할을 했는데, 인조 7년의 기록에 의하면 무적에 올라있어 무녀와 혼동될 수 있으나 신사를 주관하는 무녀가 아니라, 무녀를 도와 굿판에서 굿음악 등의 연주를 통해 신사의 분위기를 돋우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현수는 대체로 천인의 신분이었으며, 관기는 아니라는 기록이 우세하고 비록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창기도 아니었다.
비록 현수의 음악이 궁정여기의 그것과는 달랐지만 비여기(非女妓) 집단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음악적 역량은 갖추고 있었다. 연산군 11년 가흥청 내에서 새로 뽑힌 흥청여기들을 현수와 함께 머물게 하면서 음악을 전수받게 했기 때문이다. 또한 연산군은 11년 현수 물단(勿丹)ㆍ옥지(玉之)ㆍ종비(終非)ㆍ오존(吾尊)ㆍ자지(者只)ㆍ돌금[石乙今]으로 하여금 각각 풍물, 즉 민간악을 연주 할 수 있는 악기를 지니고 취홍원이나 경회루, 혹은 유악(遊樂)할 때 연주하도록 하면서 궁중 내 민간 풍속악을 일상화하였다. 즉, 연산군은 초기에는 향속의 현수의 음악이 궁중 여기의 음악인 운평악과 조화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으나 조금 지나서는 현수의 풍속악을 궁중 내에서 즐기고 전수하게 하였다.
현수는 이미 궁에 상주하며 악을 익혀온 운평이나 광희보다는 낮은 평가를 받기도 하였으나 본래 음악을 업으로 삼았기 때문에 일부는 실력 있는 자들도 섞여 있었다. 현수의 공연 내용은 광대와 함께 나례에 참여 하였으며, ‘향속(鄕俗)’대로 각 지방의 민속 음악을 연주했다. 현수가 연주한 민속음악은 갑자년 『진연의궤』에 기록된 ‘풍물차비’들이 담당했던 악기에 비추어 가야금과 거문고의 현악기를 위주로 타악기인 장고 외에 궁중 연주에 걸맞게 교방고와 방향이 추가 혹은 대체된 형태였을 가능성이 크다.
즉, 현수는 양인이자 천인으로 민간에서는 연향에서 민간음악 및 무의식을 행할 때 무당을 도와 굿음악을 연주하는 이들이었다. 현수는 민간에서 활동하다 때로는 궁정 나례를 위해 남녀광대들과 함께 차출되어 입궁하여 재주를 바쳤다. 비단 궁정 관나 때뿐 아니라 도상에서 펼쳐졌던 어가환궁의식과 조칙사 영접의식을 위한 도상나례에서도 광대와 함께 참여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나례뿐 아니라 국가의 큰 연향에 차출되어 충원에 담당했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엄격히 궁중과 민간의 음악은 단절되어 전해졌을 것으로 생각될 수 있으나 광대와 더불어 현수의 입궁과 음악 전수는 궁중 내 민간악이 유입되었다는 방증을 제시한다. 또한 연산군대 현수의 궁중내 합숙과정에서 융합된 음악문화는 연산군의 퇴위 후 전국에 퍼지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현수는 조선 중기 이후 새로운 음악 형성에 기여한 것으로 일정한 의의가 있다.
『고려사』 「악지」 『목은집』 『세종실록』 『악학궤범』 『용재총화』 『진연의궤』
사진실, 『한국 연극사 연구』, 태학사, 1997. 윤아영, 『왕실의 연말문화, 나례』, 국학자료원, 2022. 이혜구 역, 『신역 악학궤범』, 국립국악원, 2000. 윤아영, 「조선시대 현수(絃首)의 신분과 음악활동에 관한 연구」, 『역사민속학』 53, 한국역사민속학회, 2017.
윤아영(尹娥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