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례등록(儺禮謄錄)
조선 인조 4년(1626)에 중국 명나라 사신이 태자의 탄생을 알리는 조(詔)를 반포하기 위해 조선에 왔을 때 행한 나례를 준비하는 과정을 기록한 책. 1책. 규장각 소장.
『나례청등록』의 서문과 목차는 따로 수록되어 있지 않으나, 앞표지에 ‘병인(丙寅)’으로 적혀있어 조선 인조 4년(1626)에 편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내용으로는 중국 사신들의 이름과 일정, 그리고 이를 맞이할 때에 필요한 항목 및 오고 간 서신 및 공문서를 순서대로 수록하고 있다. 조선시대 영접 의식에서 설행된 나례와 관련된 유일한 단일 기록이다. 책의 표지에는 『나례등록』으로 되어 있는데, 현재는 『나례청등록』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조선에서 중국의 사신을 맞이할 때에는 이를 준비하는 임시기구로 나례도감을 설치하고 끝난 후에는 폐지하였는데, 광해군 때는 상설기관으로 나례청(儺禮廳)을 두고 그 업무를 맡도록 하였으며, 인조 6년(1628)에는 나례청의 준비 과정을 예조는 등록으로 남겼는데 이것이 『나례청등록』이다.
○ 구성요소 및 원리
『나례청등록』의 서문과 목차는 따로 수록되어 있지 않으나, 앞표지에 ‘병인(丙寅)’으로 적혀있어 조선 인조 4년(1626)에 편찬된 것임을 알 수 있고, 그 내용은 사신의 함명(銜名)ㆍ사신의 일정ㆍ좌목(座目)ㆍ계문(啓文)ㆍ감결(甘結)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나례청등록』에서 행사 준비와 관련된 사항은 헌가잡상분군질(軒架雜像分軍秩)ㆍ무역질(貿易秩)ㆍ폐전질(廢前秩)ㆍ화원(畵員)ㆍ장인(匠人)ㆍ재인(才人)의 순서대로 기록되었다.
사신의 이름은 강일광(姜日廣)이며, 사신들은 황태자 탄생을 맞아 서울에 6월 13일 입경하고 6월 21일 서울을 떠나는 일정으로 되어 있다.
좌목은 당시 우리 측 참여자의 자리를 차례대로 적은 목록을 말하는데, 판사(判事)에 김류(金瑬)ㆍ이귀(李貴), 지사(知事)에 김신국(金藎國)ㆍ정경세(鄭經世), 동지사(同知事)로 조희일(趙希逸), 도사(都事)에 김회종(金會宗)ㆍ권억(權澺)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다.
계문에는 나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서로 오고 간 문서들에 적힌 글을 수록하고 있다. 당시 사신을 맞이할 때 설치하는 나례와 산대[윤거산대]와 각종 잡상의 배설은 이전의 예에 따르는 것으로 결정하였다는 내용을 시작으로 행사의 준비에 필요한 인원의 차정, 물품의 조달, 나례잡상조작청(儺禮雜像造作廳)이나 잡상입치가(雜像入置家) 등의 장소확보, 나례설행장소로 혜민서(惠民署) 등이 기록되어 있다.
감결에는 소요물품 및 조달청과 나례청(儺禮廳)에 수송할 물품을 배정한 지역을 적고 있다. 당시 나례의 준비는 전통대로 좌변나례도감과 우변나례도감이 나누어 맡았는데, 소요 물품에 관해서는 필요에 따라 어느 한쪽이 주가 되어 담당하기도 했다.
헌가잡상분군질은 헌가와 잡상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인원을 나누는 내용을 적은 것이다. 당시 내용에 의하면 잡상으로 사자(獅子)ㆍ호랑이[虎]ㆍ낙타[駝]ㆍ소간(嘯竿)ㆍ어물(魚物)ㆍ생선(生鮮) 등을 지고 가는 군인들의 수가 정해져 있고, 헌가(軒架)를 밀고 끄는 인원으로 앞에서 말을 담당하는 열 명과 방민 백 명의 수가 기록되어 있다.
화원(畫員)으로 한선국(韓善國)을 비롯해 장인(匠人)으로 은장(銀匠) 김언서(金彦瑞) 및 이환장(耳環匠)ㆍ침장(針匠)ㆍ거장(車匠)ㆍ치장(冶匠)ㆍ화장(花匠)ㆍ소목장(小木匠)ㆍ칠장(漆匠)ㆍ뉴골장(杻骨匠)ㆍ제각장(蹄刻匠)ㆍ목수(木手)ㆍ교성장(巧性匠) 등에 각 장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재인(才人)으로는 경기 재인 광주의 기남(己男), 사랑동(思郞同) 등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재인들이 기록되었다. 원문은 규장각데이터베이스에서 텍스트와 이미지로 확인 가능하며, 전체 번역과 주석은 사진실의 『봉래산 솟았으니 해와 달이 한가롭네』(2017)에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나례청등록』과 실록의 기사에 의하면 좌변나례도감과 우변나례도감이 각각 좌변과 우변을 나누어 맡아 영접의식과 공연을 준비하였는데, 여기에서 거론되는 ‘헌가’에 관해서는 기존에 산대와 동물로 간주되어 음악과는 무관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나례청등록』에 나례의 설행 시 “공인은 장악원에 명하여 정해서 보낼 것[工人乙良 命掌樂院定送事]”이란 기록에 의해 당시 나례에는 광대들의 백희뿐 아니라 장악원의 음악도 베풀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영조 13년(1737)과 정조 8년(1784)의 영접의식 기록에도 인조 27년(1649) 이전까지는 장악원과 가무동이 참여하였는데, 이후 폐지되고 100년 이상 삼군의 음악으로 대치되었다는 내용에 의해 본래 영접 의식에는 장악원의 음악과 가무동의 무대가 함께 있었음이 추가로 지지된다.
『나례청등록』은 조선시대 영접 의식에서 나례를 설행한 것에 관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기록으로는 유일한 자료일뿐 아니라, 나례의 연행 양상을 간접적으로 추론할 수 있게 해주는 사료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목은집』 『고려사』 「악지」 『조선왕조실록』 『용재총화』 『악학궤범』 『나례청등록』 『증보문헌비고』
사진실, 『봉래산 솟았으니 해와 달이 한가롭네 : 왕실의 연회축제』, 태학사, 2017. 윤아영, 『왕실의 연말문화, 나례 : 유교 제도화 과정과 왕실의 연말 문화』, 국학자료원, 2022. 조원경, 「인조시대(仁祖時代)의 나례등록(儺禮謄錄)」, 『향토(鄕土)서울』 4, 1958.
윤아영(尹娥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