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영접의식의 나례를 준비하기 위해 설치하였던 임시 관청.
조선에서 중국의 사신을 맞이할 때 이를 준비하는 임시 기구이다. 본래 태종 때에는 산대도감(山臺都監)으로 불렀으나 이후 나례청(儺禮廳) 혹은 나례도감(儺禮都監)으로 그 명칭이 정착되었다.
나례도감은 중국 사신을 맞아 나례를 준비하는 일을 맡았는데, 나례가 조선국의 중대사이자 물력이 많이 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담당 관청을 설치하고 때에 맞춰 각종 준비를 담당했다. 태종 2년(1402)에는 나례도감의 전신에 해당하는 산대도감을 두고 좌우변으로 나누어 맡아 영접의식을 준비했다. 이후 광해군 12년(1575) 이후 나례청이란 이름으로 상설 기관이 설치되었으나 각종 폐단으로 인해 인조 12년(1634) 폐지되었다. 숙종 29년(1703)에 좌우변 나례도감이 다시 임시로 설치되었으나 영조 원년에 좌우변의 제도는 폐지되고 영접도감으로 일원화되었다. 이후 정조 5년(1781)과 8년(1784)에 영접의식을 준비하면서 다시 좌우변으로 나뉘어 나례도감이 구성되었으나 순조 이후 나례가 실질적으로는 폐지되면서 나례도감도 더 이상 설치되지 않았다.
태종 2년(1402) | (좌변)산대도감 | (우변)산대도감 | |
광해군 12년(1575) | 좌변 나례청 | 우변 나례청 | |
광해군 13년(1576) | 좌변 나례청 | 우변 나례청 | |
인조 3년(1625) | 좌변 나례청 | 우변 나례청 | |
인조 4년(1626) | 좌변 나례청 | 우변 나례청 | |
인조 12년(1634) | 좌변 나례청(좌나례도감) | 우변 나례청(우나례도감) | |
↓ | ↓ | ||
숙종 29년(1703) | 좌변 나례도감 | 우변 나례도감 | |
↘ | ↙ | ||
일원화 | |||
↙ | ↘ | ||
정조 5년(1781) | 좌변 나례도감 | 우변 나례도감 | |
정조 8년(1784) | 좌변 나례도감 | 우변 나례도감 |
○ 구성요소 및 원리
나례도감은 영접의식을 위해 좌우변으로 나누어 설치된 기구이다. 이처럼 좌우변으로 채붕을 맺고 잡희를 베푸는 것은 우리나라 신라시대부터 내려오는 고사인데, 고려시대에는 좌우변을 사평순위부와 군기감이 각각 나누어 맡아 준비했고, 조선시대에는 의금부와 군기시가 이어받았다.
좌변나례와 우변나례는 그 연행 양상에서 차이가 있었는데, 인조 때의 나례와 관련해서 좌변 나례청은 주로 잡상과 재인을 담당했고, 우변 나례청은 용악과 가무동을 담당했다. 각각 좌우변 나례청의 준비 및 연행 양상 및 비용을 인조 때를 중심으로 비교, 제시하면 다음 〈표 1〉과 같다.
영접의식의 나례(의) | ||
---|---|---|
좌변 나례 | 우변 나례 | |
준비 기관 | 군기시(좌변 나례청) | 의금부(우변 나례청) |
산대의 명칭 | 잡상, 산대, 잡의, 잡물, 잡희, 정재, 잡상희, 나례, 산붕, (좌)채붕 | 헌가, 용악, 헌가악, (우)채붕 |
무대 형태 | 잡상을 세운 산 모양의 의물 | 헌가악을 올린 무대 |
연행자 | 잡상담지군, 재인(才人) | 장악원 전악(典樂), 악공(樂工), 악생(樂生), 장악원 악사와 악공, 가무동 |
연행양상 | 잡상의 설치 및 잡희(붕희(棚戱)) 연출(사자, 호랑이, 낙타, 소간, 어물, 생선 등 +장간기, 땅재주, 탈춤, 줄타기 등) | 헌가악의 연주 및 가무 공연 |
(악공의 헌가악 연주+가무동(歌舞童)의 성악과 정재) | ||
조성 인력 | 수군 1,300명 | 수군 1,400 |
조성 비용 | 헌가보다는 상대적으로 비용이 적게 들어가는 설치물 | 잡상보다는 상대적으로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무대 준비 |
연행 목적 | 기쁨(悅) | 위로(慰) |
조선 세종 32년(1450)에 사신을 맞이할 때 도상에서 악을 연주하는 것이 관행이었다는 기록 및 인조 때 『나례청등록』에 악공은 장악원이 담당하였다는 기록 등에 의해 영접의식에서 좌우변은 산대를 맺고 백희를 베푸는 것과 함께 세종 이후 음악을 쓰는 것 또한 중요한 구성이었다.
양변으로 채붕을 맺고 잡희를 베푸는 것은 우리나라의 오랜 전통이지만, 세종 이후 도상에서 잡희 외에 장악원의 음악도 한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좌우변 나례도감은 좌변에서는 영접의 기쁨을, 우변에서는 긴 여정을 위로하는 연행을 베풂으로써 조화로운 영접의식의 구성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고려사』 「악지」 『나례청등록』 『목은집』 『악학궤범』 『용재총화』 『조선왕조실록』 『증보문헌비고』
사진실, 『봉래산 솟았으니 해와 달이 한가롭네』, 태학사, 2017. 윤아영, 『왕실의 연말문화, 나례』, 국학자료원, 2022. 윤아영, 「나례(儺禮) 준비 기관의 변천과 양변(兩邊)의 전통」, 『국악원논문집』 26, 국립국악원, 2012. 윤아영, 「영조의(迎詔儀)시 도상 나례(途上 儺禮) 첨입과정 및 성격에 관한 연구」, 『한국음악연구』 50, 한국국악학회, 2011. 윤아영, 「조선 환궁의식(還宮儀式)과 중국 환궁의식(還宮儀式)의 변별에 관한 연구」, 『한국음악연구』 54, 한국국악학회, 2013. 조원경, 「仁祖時代의 儺禮謄錄」, 『鄕土서울』 4, 서울역사편찬원, 1958.
윤아영(尹娥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