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에 결성된 전통연희회사. 또는 경성에 최초 설립된 관영 실내 극장.
협률사는 1902년 고종(재위 1863~1907)의 어극 40년 칭경예식(稱慶禮式)을 위해 모집했던 예인(藝人)들이 칭경예식이 연기되어 무용(無用)하게 되면서 이들을 활용하여 설립한 영리 목적의 전통연희회사였다. 이들은 칭경예식을 위해 설치한 서구식 극장 형태인 400석 규모의 관영 실내 극장 희대(戱臺)를 운영, 관리하면서 이곳을 전용 공연장으로 사용하였고 이를 계기로 희대 역시 협률사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다.
1902년에 전통연희회사가 사용한 협률사(協律社)란 명칭은 교방사(敎坊司)의 이칭이었던 협률사(協律司)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1894년(고종 31)에 중앙 관제 개혁이 시행되면서 1895년(고종 32) 예조(禮曹) 소속인 장악원(掌樂院)은 궁내부(宮內府)로 이속되어 장례원(掌禮院) 소속의 협률과(協律課)로 개칭된다. 1897년(고종 34) 대한제국이 수립되고 1900년 협률과는 다시 교방사로 승격, 개칭되었다. 이처럼 장악원의 명맥을 이었던 교방사는 개칭 이전 협률과의 업무를 승계하였던 만큼 협률사(協律司)라는 이칭으로도 불리었다. 또한 협률사(協律司)는 칭경예식을 위해 모인 예인들과 별개로 관기(官妓)와 예기(藝妓)를 모집해 새로운 음률(音律)을 교습하기도 했다. 따라서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이 시기 상업적 목적으로 결성된 전통연희회사 협률사(協律社)는 사실상 궁내부 관할의 관영 실내 극장이었던 희대를 전용 공연장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당시 황실의 음악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고 있던 교방사의 이칭으로 불리었던 협률사(協律司)에 준거해 사용된 용어라는 데 무게를 둘 수 있다.
○ 역사적 변천 과정
협률사는 고종의 칭경예식을 주도했던 주무 장봉환(張鳳煥, 1869~1929)이 행사가 연기되면서 군악대의 경비를 마련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이왕에 모인 예인들을 중심으로 결성한 전통연희회사였다. 이렇게 조직된 협률사는 1902년 12월 4일에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戲)란 공연 제목으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여 다수의 예인들이 참여해 다양한 전통연희를 선보이며 첫 유료 공연을 개최했다.
협률사는 1902년 12월 말 또는 1903년 1월 첫 주경에 첫 번째 공연과 동일한 제목인 소춘대유희로 두 번째 공연을 선보였다. 당시 이 무대를 직접 관람했던 프랑스인 고고학자 에밀 부르다레(Emile Bourdaret, ?~?)의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까지 실내 극장명은 ‘희대’라고 지칭되고 있었다. 그러나 1903년 2월 무렵의 협률사 공연부터는 애초의 극장명인 희대는 사용되지 않고 극장과 전통연희회사 모두 협률사로 지칭된다. 에밀 부르다레가 관람했던 협률사의 두 번째 소춘대유희 공연에서는 악사들의 연주, 광대들의 줄타기와 널뛰기, 어릿광대의 공놀이와 무동놀이, 광대들의 가면극, 배우들의 희극 <마른 나무에 꽃이 피다(남성 판소리 창자들이 분창 형식으로 공연한 창극 《심청전》으로 추정)>, 특별 출연한 궁중 무용수들의 춤 등이 공연되었다.
두 번째 공연 이후 협률사는 소리광대인 창부(倡夫)들을 중심으로 《춘향가》·《화용도타령》 등의 창극 위주의 공연을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협률사는 영업과 관련한 자체적인 문제, 풍기 문제, 민생 경제의 어려움에 따른 고종의 칙령(勅令) 등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정지와 개장을 반복하다가 1904년 3월 중순경 폐지(廢止)되었다. 1906년 3월 협률사는 궁내부 참서관 김용제(金容濟, ?~?)와 철도국장이었던 최상돈(崔相敦, ?~?), 고희준(高羲駿, ?~?)이 일본인 고문 가등(加藤, ?~?)의 자본 출자로 운영, 복설되면서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하지만 복설된 협률사의 활동은 순탄하지 않았다. 협률사는 당시 사회적으로 대두되고 있던 풍속개량론에 입각한 음란패속과 관련한 사회적 비판의 중심에 있었다. 더불어 황실 소속의 공연장이 사적(私的) 영리를 추구한다는 문제가 거론되면서 이를 근거로 봉상시(奉常寺) 부제조(副提調)였던 이필화(李苾和, ?~?)가 협률사 폐지를 위한 상소문을 올리면서 결국 고종의 칙령에 따라 1906년 4월 혁파(革罷)되기에 이른다.
영업이 중단된 협률사는 1907년 초부터 관인구락부(官人俱樂部)가 사용하면서 연희장으로서의 기능을 잠시 상실하였다. 그러나 일 년도 못되어 경시청이 연희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하면서 전통연희뿐 아니라 활동사진 상영과 강연회 개최 등 다목적으로 활용된다. 1908년 7월 김상천(金相天, ?~?), 박정동(朴晶東, ?~?), 이인직(李人稙, 1862~1916) 이상 3인은 경시청의 허가를 받아 관인구락부가 상주하던 연희장을 인수, 개조해 원각사(圓覺社)라 개칭했다. 가기(歌妓)와 창부를 모집해 공연 활동을 전개한 원각사는 1908년 11월 이인직을 중심으로 《은세계(최병도타령)》라는 신연극(분창 형식의 창극)을 무대에 올리며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했지만 대중들의 큰 호응을 얻지 못하면서 주로 전통창극에 기반한 공연을 지속하다가 1909년 11월경에 문을 닫았다.
한편 이 시기 협률사는 지방순회공연을 목적으로 조직한 전통연희단체를 지칭하는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주로 대명창을 필두로 조직되었던 협률사는 민간협률사라고도 불리었는데 송만갑(宋萬甲, 1865~1939)협률사, 김창환(金昌煥, 1855~1937)협률사 등이 결성되어 활동했다.
1902년 전통연희회사로 출발해 자신들이 공연하던 극장의 명칭으로도 불리던 협률사는 이전까지 주로 야외라는 열린 공간에서 연행되던 전통연희를 실내무대로 유입시킴으로써 전통연희가 초기 극장의 간판 공연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이후 설립되는 사설극장의 핵심 공연으로 정착하게 되는 창극과 같은 새로운 공연물을 탄생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특히 협률사는 사설 극장의 공연 방식과 공연 레퍼토리 등에 큰 영향을 주면서 근대적 공연문화 형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데 그 상징성이 있다고 하겠다.
김민수, 「초창기 창극의 공연양상 재고찰: 협률사와 원각사의 공연활동을 중심으로」, 『국악원논문집』 27, 2013. 김민수, 「1900년대 창극의 형성에 관한 재고찰」, 『음악과 현실』 62, 2021. 박 황, 『창극사연구』, 백록출판사, 1976. 정진국 역,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 글항아리, 2009. 조영규, 『바로잡는 協律社와 圓覺社』, 민속원, 2008. 「광고」, 『제국신문』, 1902. 12.4. 「논설, 협률사구경(계속)」, 『제국신문』, 1902.12.16. 「이씨상소」, 『황성신문』, 1906.4.19.
김민수(金珉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