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조선초 문신 이색이 세말 궁중 나례에 참여하고 쓴 7언 36행의 한시
고려말 조선초 문신 이색이 세말 궁중 나례에 참여한 후 이를 묘사한 것으로 처음부터 제14행까지의 전반부는 구나 의식, 제15행부터는 관나희와 군신연에 관한 내용이다.
나례는 본래 역귀(병귀신)를 쫓는 연말 행사인 구나(驅儺) 의식에서 유래하여, 구나 의식의 앞뒤에 새롭게 추가된 다양한 궁중 의식을 두루 지칭하는 것이 되었으며, 이후 그 의미가 더욱 확대되어 광대 잡희가 함께 연행된 여타 의식 혹은 그 의식에 편성된 잡희까지도 나례로 칭하게 되었다. 구나행은 궁중 나례의 기원에 해당하는 구나 의식과 그에 병연된 각종 나희의 총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최초의 민간 기록물이다. 구나행은 『목은시고(牧隱詩藁)』 권 21에 수록되어 있다.
○ 구성요소 및 원리 이색의 시 구나행에 의하면 구나의(축역의식) 절차에 이어서 연출되었던 각종 나희가 묘사되어 있는데, 오방귀무(五方鬼舞)ㆍ사자무(獅子舞)ㆍ백택용(白澤踊)ㆍ토화(吐火, 불토하기)와 탄도(呑刀, 칼삼키기), 서역(西域)의 호인희(胡人戱)ㆍ처용희(處容戱)ㆍ백수희(百獸戱)와 같은 것들이다. 이색의 사위인 성현은 이후 궁정 나례를 묘사한 ‘관나’를 지었고, 여기에도 비슷한 나희로 농환(弄丸)ㆍ보삭(步索, 줄타기)ㆍ괴뢰희(傀儡戱, 인형극)ㆍ장간기(長竿技, 장대타기)ㆍ창우희(倡優戱, 광대희) 등을 소개했다.
행 | 해석 | 관련 의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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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天地之動何冥冥 | 천지가 움직이는데 어찌하여 어두우며 | 구나의 | |
2 | 有善有惡紛流形 | 선과 악이 있으나 어지러워 그 분간을 할 수 없고, | ||
3 | 或爲禎祥或祅蘖 | 혹은 상서로움이 있고, 혹은 재앙도 있는데, | ||
4 | 雜糅豈得人心寧 | 섞여있으니, 어찌 사람마음의 평안함을 얻겠는가 | ||
5 | 辟除邪惡古有禮 | 사악함을 없애는 오래된 예가 있으니, | ||
6 | 十又二神恒赫靈 | 12지신의 붉은 영령은 항식(恒式)이고, | ||
7 | 國家大置屛障房 | 국가에서는 크게 병장방을 설치하고 | ||
8 | 歲歲掌行淸內庭 | 매년의 행사로 내정을(역귀를 몰아내어) 깨끗이 하는구나. | ||
9 | 黃門侲子聲相連 | 황문진자들은 서로 소리를 이어 내며 | ||
10 | 掃去不祥如迅霆 | 불상(不祥)한 것을 쓸고 가는 것이 빠른 천둥과 같고, | ||
11 | 司平有府備巡警 | 관리는 평소 각 맡은바가 있어, 각 관청을 돌며 경계를 강화하니, | ||
12 | 烈士成林皆五丁 | 열사들은 숲을 이루는데, 모두 5개의 정이되는 구나. | ||
13 | 忠義所激代屛障 | 충의심에 격앙되어 액막이를 대신하여 | ||
14 | 畢陳怪詭趨群伶 | 기괴한 걸 다 베풀고 | ||
15 | 舞五方鬼踊白澤 | 오방귀와 백택의 춤을 덩실덩실 추고 | 관나희 | 무오방귀용백택(舞五方鬼踊白澤) |
16 | 吐出回祿呑靑萍 | 불 토해 내기 칼 삼키기의 묘기를 펼치네 | 토화(吐火),탄도(呑刀) | |
17 | 金天之精有古月 | 서역의 나라 사람 고월의 가면극에는 | 호인희(胡人戱) | |
18 | 或黑或黃目靑熒 | 혹은 검고 혹은 누렇고 눈은 새파란데 | ||
19 | 其中老者傴而長 | 그 중 늙은이는 굽은 허리에 키가 커서 | ||
20 | 衆共驚嗟南極星 | 모두가 남극 노인이라고 경탄하거니와 | ||
21 | 江南賈客語侏離 | 강남의 장사꾼은 사투리를 조잘대면서 | ||
22 | 進退輕捷風中螢 | 날리는 반딧불처럼 진퇴를 경쾌히 하지 | ||
23 | 新羅處容帶七寶 | 신라의 처용은 칠보를 몸에 장식하고 | 처용희(處容戱) | |
24 | 花枝壓頭香露零 | 꽃 가지 머리에 꽂아 향 이슬 떨어질 제 | ||
25 | 低回長袖舞太平 | 긴 소매 천천히 돌려 태평무를 추는데 | ||
26 | 醉臉爛赤猶未醒 | 발갛게 취한 뺨은 술이 아직 안 깬 듯하네 | ||
27 | 黃犬踏碓龍爭珠 | 황견은 방아를 찧고 용은 여의주 다퉈라 | (백수희(百獸戱)) | |
28 | 蹌蹌百獸如堯庭 | 춤추는 온갖 짐승이 요 임금 뜰 같고말고 | ||
29 | 君王端拱八角殿 | 군왕은 팔각전에 장엄하게 임어하시고 | 군신연 | |
30 | 群臣侍立圍疎屛 | 신하들이 군왕 병풍 에워 시립한 가운데 | ||
31 | 侍中稱觴上萬歲 | 시중이 술잔 들어서 만세를 축수하리니 | ||
32 | 幸哉臣等逢千齡 | 다행하여라 신들이 천재지회 만났음이여 | ||
33 | 海東天子古樂府 | 원컨대 해동 천자의 고악부 가운데 | 후기 | |
34 | 願繼一章傳汗靑 | 내 노래 한 장 이어서 역사에 전했으면 | ||
35 | 病餘無力阻趨班 | 병든 몸 힘이 없어 조반에도 못 나간 채 | ||
36 | 破窓盡日風冷冷 | 온종일 찢어진 창에 바람만 썰렁하구나. |
제1구에서 제14구까지 전반부에서는 가면을 쓴 창사(倡師)와 12지신, 진자(侲子, 아이 초라니)들이 등장하여 역귀를 쫓는 종교적 행사인 구나를, 제15구부터 제28구까지 후반부에서는 구나가 끝나고 여러 연희자가 입장하여 상연하는 가무백희(歌舞百戱)를 묘사하고 있다. 즉, 오방귀무(五方鬼舞)와 같은 제무(祭舞)와 불 토하기[吐火]와 칼 삼키기[呑刀]의 기기(奇伎), 서역호인놀이(西域胡人戱), 화교(華僑)의 답교놀이, 신라 이래의 처용무(處容舞)와 여러 짐승의 탈을 쓰고 추는 춤(百獸舞)이 이에 해당한다.
구나행은 고려시대 말 귀신 쫓는 구나의 의식과 함께 광대 잡희를 즐기던 관나 및 군신연이 병연되었던 상황을 알게 해주는 자료로서, 고려시대 세말 나례가 축역에서 오락으로 변화되었다는 기존의 시각과 달리 두 가지 성격이 모두 공존했음을 알려준다. 또한 본 자료는 고려시대의 궁중 나례가 조선시대에 확대 및 양식화되는 변화 과정을 비교할 수 있게 해주는 전거로서 가치가 있다.
『목은집』 『고려사』 「악지」 『조선왕조실록』 『용재총화』 『악학궤범』 『증보문헌비고』
윤아영, 『왕실의 연말문화, 나례 : 유교 제도화 과정과 왕실의 연말 문화』, 국학자료원, 2022. 이혜구 역, 『한국음악학학술총서 제5집 : 신역 악학궤범』, 국립국악원, 2000. 전경욱, 『한국 전통연희사』, 학고재, 2020. 이혜구, 「목은(牧隱) 선생의 구나행(驅儺行)」, 『한국음악연구』, 1957.
윤아영(尹娥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