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와 춤, 각종 재주를 의미하며 주로 국가 연향 및 의식 등에 편성된 종합 볼거리를 말함
본래 가무백희는 자의상 가무와 백희가 함께 편성되는 것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국가 연향이나 의식에 편성된 종합 공연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 고구려 고분벽화에 이미 그 흔적이 나타나고, 신라시대 이후 백희와 가무가 결합되어 양식화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연등회와 팔관회, 계동나례와 환궁 및 영접의식 등에, 조선시대에는 각각 궁정 및 도상나례의 특성에 맞게 편성되었다. 가무백희는 백희가무, 백희잡기, 산악백희, 산대잡희 등과 동의어로 쓰였고 조선시대 이후 나례와 통용되었다.
우리나라의 가무백희 역사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이미 나타나있다. 고구려 〈무용총〉에는 무용을 하는 이들과 〈각저총〉에는 백희의 기원에 해당하는 각저희(角抵戲)를 관람하는 장면이 있다. 또한 〈수산리 고분〉과 〈팔청리 고분〉에는 나무다리걷기와 〈장천 1호분〉에는 방울받기인 농환(弄丸)이, 〈약수리 고분〉에는 곤봉받기, 〈수산리 고분〉, 〈팔청리 고분〉, 〈약수리 고분〉에는 곤봉과 공을 엇바꾸어 받기, 〈수산리 고분〉과 〈장천 1호분〉에는 바퀴 돌려올리기인 무륜(舞輪), 〈약수리 고분〉과 〈팔청리 고분〉에는 말타기 재주인 마상재(馬上才), 〈팔청리 고분〉, 〈안악 제3호분〉의 행렬도에는 칼재주부리기, 〈각저총〉과 〈장천 1호분〉에는 각저희[씨름], 〈무용총〉과 〈안악 제3호분〉에는 수박희(手搏戱) 등 곡예와 체육에 해당하는 연희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안악 제3호분〉의 가면희(假面戱)로 보이는 춤과 북, 장구, 완함, 배소, 장소 등의 악기 연주가 보이며, 〈장천 1호분〉에는 원숭이 재주 부리기와 같은 동물곡예 등 산악과 백희에 해당하는 연희들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신라시대에는 가무와 백희가 결합된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나 당대의 기록은 거의 찾기 어렵다. 다만 김종한이 1923년 쓴 『조선사략』에 의하면 고려왕이 법왕사를 창건하고, 왕륜 등이 도내에 열 개의 절을 창건하고, 또한 팔관회를 베풀었는데, 매 겨울 중동에 궁궐의 뜰에 윤등을 놓고, 모두 사방에 향등을 벌려놓고, 또한 양쪽에 채붕을 맺었으며, 앞에서 백희가무를 올렸다고 기록하면서, 이 모든 것이 신라의 고사라고 적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예종 11년 12월 ‘대나(大儺)’의 기록에 의하면 왕이 궁중에서 관악(觀樂)하는 가운데, 창우(倡優, 광대), 잡기(雜伎, 광대)부터 외관유기(外官遊妓, 지방관청 소속 여자 기생) 등이 양대(兩隊)로 나뉘어서 각각의 우두머리를 친왕으로 삼고, 재기(才技)를 다투어 올렸다. 참여한 이들의 신분에 의하면 창우와 잡기는 백희를, 외관유기는 가무를 올렸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라시대 이후 우리나라의 양대로 나뉘어 채붕을 맺고 잡희를 병연하던 가무백희의 전통은 고려시대에 연등회, 팔관회 뿐 아니라 계동 나례 때에도 존재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시대 도상에서는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영접의식과 왕의 어가를 맞이하는 의식에서 가무백희가 펼쳐졌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조사가 입국하는 곳인 임진강 변에서부터 사평순위부와 군기감이 준비하여 맞아들이는데, 이 때에도 역시 두 대로 나뉘어 영접의식을 준비했다.
고려시대 어가 환궁시 가무백희가 편입된 기록이 존재한다. 인종 1년(1123) 중국인 서긍이 저술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의하면 고려 어가환궁의 절장에 백희와 악부(樂部)의 절차가 나란히 이어졌다. 의종 24년(1170) 어가 환궁시에 국자학과 학생들이 가요를 올리고, 관현방과 대악서는 채붕을 맺고 백희를 올렸다. 원종 5년(1264)의 어가 환궁시에는 내학 및 외학소속 관리와 생도가 표와 가요를 바치고, 창녀와 악공으로 구성된 양부의 팔방상은 주악(奏樂)하고 다투어 백희를 바쳤다. 공민왕 2년(1353) 환궁의식에는 성균관과 12생도가 가요를 올리고, 교방에서는 기악을 바쳤다.
조선시대에도 가무백희는 궁정과 궐 밖에서 각각의 의식에 맞게 편성되었다.
계동 나례때의 가무백희는 조선 초 세조 때 문신인 서거정의 시 ‘후원관화입시’에 의하면 어원 동쪽에서 관화(觀火)할 때 백희가 다투어 바쳐지고 군신들이 함께 춤추며 즐겼다. 성종 때 성현의 문집 『용재총화』와 악서 『악학궤범』에 의하면 관나(觀儺)와 관처용(觀處容)에는 악사, 여기, 악공, 가동, 무동 등을 동반한 악(樂)과 함께 정재인들은 백희를 펼쳤다.
조선시대 도상에서도 가무백희는 국가 주도로 양변에 나뉘어 설치되었다. 대표적으로 영접의식과 어가환궁시의 가무백희가 있다.
영접의식의 가무백희는 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후 조준의 상소문에 의하면 먼저 당악을 아뢰고, 다음에는 향악과 창우의 가무가 있었다. 한편, 영접의식의 가무백희는 조선 초기부터 나례라고 하는 용어와 혼용되어 나타나는데, 도상에서의 각종 잡희를 나례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조선 태종 1년(1401) 무렵이다. 영접의식에 편성된 가무백희는 조선시대 내내 중국사신을 맞이할 때는 나례라는 이름으로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절대 폐할수 없는 대상이었다. 따라서 조선 정조 때까지 실제 시행되었고, 순조 때 『빈례총람』에 기록된 나례를 마지막으로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어가를 맞이할 때 좌우로 채붕을 맺고 가무백희하던 전통은 조선시대 세종 때부터 변화되기 시작한다. 본래 세종 이전까지는 어가 환궁시 중도에 성균관 생도 등이 가요를 바치고, 어가가 궐문에 도달하면 산대를 맺고 나례로 맞이하던 형식이 전부였다. 그러나 세종 6년(1424) 「오례의」 ‘거가 환궁(車駕還宮)’의 기록에 의하면 어가가 이동할 때 수행하던 고취악 외에 백희가 추가되면서 변화가 생겼다. 이와 같은 형식은 단종이 세종을 부묘하고 환궁할 때의 어가환궁의식에서도 이어졌고, 성종 때부터는 삼분하여 가요를 올리던 절차가 더욱 명확해졌다. 성종 1년(1470) 거가환궁시에는 어가를 고취와 예산붕 및 잡희로 수행하고, 성균관생원과 여기 및 기로가 각각 가요를 바쳤으며 궁궐문 앞에 도달하면 좌우 채붕을 맺고 여기와 우인이 백희가무를 올렸다. 성종 6년(1475) 어가환궁시에는 백희로서 광대 학희가 어가의 앞에 편성되었다고 하여 세종이 첨입한 백희가 학희였음을 간접적으로 알게 해준다. 즉, 조선 환궁의식은 세종 때 이동식 가무백희가 추가된 이후 성종 때 종합공연으로서의 전체 양식이 완성된 것이다. 다만, 도상에서 어가 환궁시 가무백희를 올리던 전통은 영접의식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찍 폐지되었는데, 명종 22년(1567) 어가 환궁시 나례잡희와 삼가요 및 궐문앞의 가무백희가 시행되었고, 광해군 7년(1615) 길가를 장식하고[가로결채(街路結綵)] 유생ㆍ기로ㆍ교방이 각각의 위치에서 가요를 올리는 것[儒生耆老敎坊歌謠]을 끝으로 대부분 시행되지 않았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조선 후기 이후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 구성요소 및 원리
가무백희와 관련된 기록은 한반도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기록이 전한다.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백희 관련 용어로는 선진시대(先秦時代) ‘기기(奇技)’ 혹은 ‘기위희(奇偉戱)’를 꼽고 있다. 이 외에도 시대에 따라 가무의 용어와 함께 백희(百戲)는 잡기(雜技), 각저(角觝), 각저희(角抵戲), 대각저(大角抵), 각저지희(角抵之戲), 산악(散樂) 등의 다양한 용어와 혼용되었다.
가무백희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전해오는 설에 의하면 하나라 걸왕시대에 이미 창우(倡優, 광대)와 주유(侏儒, 난쟁이)의 기(技)가 있었다고도 하지만, 사료상으로는 주(周)나라 때부터 문자 기록들이 비로소 산발적으로 나타난다. 『주례』에 부노(扶盧, 攀緣矛柄, 장대타기)와 농환(弄丸, 공던지기)이 있고, 동서에 ‘산악(散樂)’과 관련된 상술도 있어 현재까지는 이것이 가무백희의 기원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단서로 보인다. 또한 『주례』에는 백희 관련 간접적인 내용도 더불어 보이는데, 역시 동서 「정인(旌人)」에 “정인은 산악(散樂)과 이악(夷樂)을 담당하여 가르치는 사람이다[旌人掌敎舞散樂, 舞夷樂]”라는 구절과, 이에 한나라 정현(鄭玄)이 단 주에 의하면 “산악은 야인으로서 악을 잘하는 자이며, 지금의 황문에 있는 광대와 같은 것이다[散樂, 野人爲樂之善者, 若今黃門倡矣]”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주대에는 이미 광대들이 산악(민간음악)과 이악(외래음악)을 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백희의 또다른 명칭인 각저희의 용어는 진(秦)나라때부터 등장한다. 이세황제(二世皇帝, BC. 209~207)는 감천궁(甘泉宮)에서 “작각저우배지관(作角抵優俳之觀)”하였으며, 이때 사용하기 시작한 각저희라는 명칭은 서한 때까지 사용되었다. 정식으로 “백희”라는 명칭이 등장한 것은 동한 이후이며, 백희라는 용어의 등장 이후로는 각저희라는 명칭보다는 백희가 일반화 되었다. 백희의 용어는 백희의 양상이 완전히 달라진 원(元)대 이전까지는 우세하게 사용되었다. 원대 이후로는 각종 악무잡기를 부르는 독립된 명칭이 구분되어 쓰이게 되고, 공연 방식이 변화하며 잡기(雜技)나 마희(馬戲) 등의 용어가 백희를 대체하였다. 따라서 궁정 백희에 관한 용례를 살펴보고자 한다면, 최하로는 송나라 이전이 될 것이나, 송대는 민간백희가 성행한 시대이기에 그 이전시기인 당대를 최고점으로 잡을만하다. 즉, 백희 명칭의 정착과정은 ‘기기(奇技)’에서 ‘산악(散樂)’을 거쳐 ‘각저(角觝)’에서 ‘백희(百戲)’로 이행되었으며, 원대 이후 백희는 산악류와 기예류가 분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부가하여 원대의 산악류는 종합 ‘잡극’으로 변한 반면, 기예류는 원대에는 몽고족의 특성에 맞게 각종 마장 마술이 지배층 사이에서 성행하게 됨에 따라 ‘마희(馬戱)’라는 용어도 ‘잡기’와 동등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후 명청 시기부터는 원대의 용어가 답습되었다.
한반도에서 가무백희와 관련된 비교적 자세한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나타난다. 인종 1년(1123) 고려를 방문한 서긍이 저술한 『선화봉사고려도경』에 영접의식의 절차 중 가무백희와 관련된 내용이 전한다. 우선 그 절차는 신기대(神旗队)→기병(騎兵)→요고(鐃鼓)→천우위(千牛衛)→금오위(金吾衛)→백희(百戲)→악부(樂部)→예물(礼物)→조여(詔輿)→충대하절(充代下節)→선무하절(宣武下節)→사부(使副)→상절(上節)→중절(中節)로 구성되는데, 가무백희와 관계된 절차는 3번째 요고와 6번째 백희, 7번째 악부이다.
3번째 절차인 요고는 명가군(鳴笳軍)에 이어 요고군(鐃鼓軍)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당시의 악기편성은 가(笳)를 부는 군인들이 가장 앞서고, 그 뒤로 요고(鐃鼓), 즉 쇠방울(내지는 징)과 북에 해당하는 군인이 뒤따르는 형태로 훗날의 고취악대 중 전부고취에 해당한다. 6번째 절차인 백희는 동서의 「악률(樂律)」 항에 의하면 수백명으로 편성되어 있다. 악부는 백희와 함께 고려의 양부악을 연주하는 것인데 당시 상황에 맞게 조의를 표하는 뜻으로 지이부주(持而不奏)로 연주되지는 않았으나, 『고려사』 노부의 구성에 비추어 후부고취에 해당하는 취라군사(吹螺軍士) 10인이 해당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서긍은 고려의 영접의식의 절장을 애써 중국 의장과 동일한 것으로 고유성을 부정하고자 했으나, 백희(대) 만큼은 중국 황제뿐 아니라 기타 각종 노부의장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임을 인정한 바 있다. 즉, 고려시대 의장은 중국의 의장과 비교하여 공통점도 있으나 ‘백희’ 만큼은중국 의장에는 없는 것으로 고려의 고유한 것임을 중국측 시각에서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것이다.
고려시대 연등회에서도 가무백희는 중요하게 편성되었다. 연등회는 소회일과 다음날의 대회일의 이틀에 걸쳐 치러지는데, 소회일에는 편전에서 관악백희(觀樂歌舞)하는 행사와 봉은사에서 조상에게 음복하는 알조진의(謁祖眞儀)로 구성된다. 소회일의 관악백희에는 교방주악과 무대진퇴(舞隊進退) 및 백희잡기가 포함되었다. 대회일에도 역시 편전에 소회일과 마찬가지로 관악백희하는데, 단 대회일에는 헌수연 및 사연을 동반했다.
조선시대의 궁중 내에서 가무백희가 함께 편성된 예는 세말 나례때가 유일했다. 『악학궤범』과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에 의하면 나례의 절차 중 하나인 관나시에는 궁중 내 여기에 의한 〈연화대〉 정재를 비롯해, 때에 맞춰 입궐한 광대들의 광대희와 민간 여성음악인인 현수(絃首, 絃手)에 의한 음악이 있었고, 이색과 성현 등의 문집의 기록을 통해 광대들의 각종 재주 및 광대 화희 등이 펼쳐졌다. 고려시대 백희 중 하나였던 학희, 연화대희, 처용희 등은 조선시대에 전해지며 각각 〈학무〉, 〈연화대무〉, 〈오방처용무〉로 양식화되어 궁중정재로 채용되었다. 특히 조선시대 연말 궁중에서는 화산대를 설치하고 광대가 백희를 펼쳐보였는데, 당시 가면을 쓴 광대는 등에 화포가 얹어진 나무판을 짊어지고, 이 화포에서 불꽃이 다 나올 때까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화희를 연출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가무백희는 국가 의전에 포함되면서 자세히 알려졌다. 조선 성종 19년에 사신으로 조선에 온 동월이 지은 『조선부』에 도상에서의 백희잡기가 소개되어 있는데, "예산붕(曳山棚, 曳山臺)이 있었는데, 자라는 산을 이고 봉래산과 영주산이 있는 바다 해를 싸고 있다( 광화문 밖에 동서로 오산(鰲山)의 두 자리가 벌여 있는데, 높이가 성문과 같고 극히 교묘하다)"고 하였다. 이것은 산대 두 개를 설치한 것을 묘사한 것이다. 또한 "원숭이는 아들을 안고 무산협(巫山峽) 물을 마신다. 사람의 두 어깨에 두 어린아이를 세우고 춤을 춘다."는 내용과 "땅재주를 넘으매 상국(相國)의 곰은 셀 것도 없고, 긴 바람에 울거니 어찌 소금 수레를 끄는 훌륭한 말이 있겠는가?"로 당시 영접의식의 면면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된 조선 측 자료로 『해동역사(海東歷史)』에 수록된 ‘영조의’ 기사가 있다. 길가에는 비단과 그림을 걸어 장식하고, 원숭이 잡상을 올린 두 대의 오산을 중심으로 각종 백희, 즉 땅재주에 해당하는 근두(筋斗, 땅재주)와, 줄타기, 장대놀이, 사자와 코끼리 장식, 봉황춤 등이 연출되었다.
중종 31년(1536)의 기록에 의하면 양변으로 나뉘어 각각 산대를 설치하고 정재인과 재인에 의한 정재와 잡희가 마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중국측 사신이 입국한 후에는 각 역참 도착 및 입경시 모화관에서 좌변에는 잡상과 나례가, 우변에는 가무동과 헌가(악)이 편성되었다. 특히 가무백희는 중국의 사신을 맞이할 때 필수 요소였는데, 이와 같은 모화관에서의 가무백희 기록은 글과 함께 그림으로도 전하고 있다. 도상의 나례는 정기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국가 중대사에 속했기 때문에 미리 산대도감이나 나례청, 나례도감과 같은 기구를 설치하고 준비하였으며, 이 당시의 일을 기록한 『나례청등록』(1626)과 같은 문헌에는 가무백희의 준비과정이 전한다.
조선시대 가무백희의 기록은 그림으로도 남아있는데, 영조 원년(1725) 여러 차례 조선에 파견되었던 청나라 관리 아극돈이 조선으로 네 번째 사행을 오면서 함께 대동한 화공은 20장짜리 화첩 〈봉사도〉를 남겼다. 이 중 백희가 나타난 장면은 제7폭과 제11폭인데, 제7폭에는 모화관에서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 펼쳐졌던 줄타기, 접시돌리기, 땅재주, 탈춤 등이 묘사되어 있고, 제11폭에는 장간기, 즉 솟대타기의 기예가 묘사되어 있다.
조선시대 어가 환궁시에도 가무백희가 주요하게 편성되었다. 가무백희는 산대나례 등의 이름으로 편성되었는데, 어가와 함께 움직이며 베풀거나 어가를 맞이하면서 베푸는 형태로 되어 있었다. 어가와 함께 움직이는 것은 다시 어가의 앞에서 3종이, 어가의 뒤에서 1종이 있었는데, 어가의 앞에는 취고수가 연주하는 전부(前部)의 고취(鼓吹)와 예산대(曳山臺, 예산붕(禮山棚))에 올린 잡상과, 그에 병연된 우인(優人, 광대)이 올리는 학희(鶴戱)가 있었으며, 어가의 뒤에는 세악수가 연주하는 후부(後部)의 고취(鼓吹)가 뒤따랐다. 이 중 예산대는 산모양의 수레이기는 하나 이 또한 단순 잡상이 아닌 각종 상징적인 인형들을 배치하여 하나의 공연물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도상에서 준비하고 있다가 왕의 어가가 지나갈 때 올리는 공연으로는 삼가요가 있었다. 이 삼가요는 말 그대로 세 번에 걸쳐 가요를 진상하는 절차인데, 각 계층을 대표하는 이들, 즉 기로(耆老), 유생(儒生), 여기(女妓)가 각각 송축하는 뜻의 노래와 춤을 바친 것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왕이 광화문에 들어가기 직전에는 문의 양쪽에 대산대를 설치하고 기다리던 여기들과 어가를 따르던 우인이 합하여 공연을 펼쳤다. 어가는 동쪽에 위치한 종묘에서 서북 방향에 있는 경복궁을 향해 움직였는데 당시 삼가요는 종루와 혜정교, 도관 앞에서 올려졌다. 이는 현재 각각 보신각 근처, 세종로 사거리, 세종로 북쪽에 해당된다. 이를 두고 광해 7년의 기사는 새롭게 첨가된 삼가요와 백희는 본래 국왕 행차에 없는 것이 새롭게 첨가된 것으로 각종 물력이 많이 드는 화려한 공연 형태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알려주고 있다. 어가가 광화문에 도달하면 양쪽에 크게 산대를 설치하고 나례 잡희를 올렸다고 하므로, 가무백희는 어가와 함께뿐 아니라 어가가 이르는 종착점까지 긴밀하게 편성되도록 계산된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가무백희는 궁중 및 도상에서의 각종 의식 등에 편성되었다. 일반적으로 궁중 내에서 광대에 의한 백희가 암암리에, 그것도 마지못해 그리고 연중 단 하루 정도만 시행할 수 있었던 잡희로 간주되었다면, 도상에서의 가무백희는 국가의 주도 아래 산대의 전시와 정선된 전통 민간문화였다는 점에서 대비된다. 더 궁극적으로 궁 밖 의전에 포함된 가무백희는 인근국과 문화적으로 구별되는 핵심요소로 간주되었으며, 이 근거는 일부 사대주의자들이 중국에 없는 것이라는 이유로 제거가 요구될 때마다 지속력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었다. 따라서 가무백희는 우리 민족의 문화적 정통성을 나타내주는 것이자 국가의 고유성을 가시적으로 나타내주는 증표의 하나로 유용하게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고려사』 「악지」 『고려사절요』 『나례청등록』 『목은집』 『빈례총람』 『성호사설』 『세종실록』 『승정원일기』 『악학궤범』 『용재총화』 『일성록』 『조선사략』 『주례』 『해동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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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영(尹娥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