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요, 도회민요, 신속요, 신작민요
민요풍의 창작 가요
신민요는 넓은 의미에서 19세기 말 이후 성행한 근대민요로 분류되나 좁은 의미의 신민요는 일제강점기, 특히 1930년대 민요풍 양식과 외래 양식을 섞어 창작된 민요풍의 대중가요와 광복 이후 민요가창자들에 의해 창작된 민요풍의 노래를 지칭한다.
1910년대 이후 『무쌍신구잡가無雙新舊雜歌』라는 잡가집에 〈신제 이팔청춘가〉, 〈신제 농부가〉 등 기존 민요 제목 앞에 ‘신(新)’이라는 접두어가 붙는 새로운 악곡들이 등장하였다. 1920년대 이후에는 유성기음반으로 발매된 악곡 중 “신식”, “신”이란 접두어가 붙은 통속민요가 다수 발매되었다. 박부용이 부른 〈신방아타령〉, 이애리수가 부른 〈신아리랑〉 등의 그것이다. 잡가집 유행과 유성기 음반 산업의 성장과 맞물려 기존 민요 텍스트를 새로운 시대 정신에 맞는 가사로 개작하거나 서양 관현반주로 편곡하여 부르고, 때에 따라서는 전통가창자 뿐만 아니라 양악 가창자들과 합창단이 부르면서 가창 스타일이 바뀌는 등 양ㆍ국악이 섞이는 혼종적 양식이 유행하였다. 이에 따라 신속요, 신민요, 신작민요, 도회민요 등의 갈래명이 등장하여 이러한 혼종적 양식의 민요를 지칭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좁은 의미의 신민요를 중점적으로 기술한다. 1930년대 유성기음반 산업의 성장과 함께 도시를 중심으로 유행한 신민요는 음반사가 주도하는 기획, 작곡, 작사, 노래, 연주 등 체계적인 분업과 협업을 통해 상품으로 유통된 민요풍으로 된 대중가요이다. 신민요가 대중가요의 인기 장르로 자리를 잡게 된 계기는 1934년 〈꽃을 잡고〉, 〈처녀총각〉, 〈노들강변〉 등의 신민요가 연속적인 음반 흥행을 이루면서부터이다. 1930년대 트로트의 인기를 능가한 신민요의 부흥에는 박부용ㆍ왕수복ㆍ선우일선ㆍ이화자ㆍ이은파ㆍ장일타홍ㆍ김옥진 등 기생 출신의 신민요 가수들의 활약과 함께 문호월ㆍ김교성ㆍ전기현ㆍ김송규ㆍ이면상 등의 작곡가, 박영호ㆍ조명암ㆍ김다인 등의 작사가들이 큰 몫을 하였다.
신민요는 선법이나 장단 등에 있어 기존의 전통민요와 연관되면서도 왈츠, 스윙, 폭스트로트 등의 리듬을 혼용하거나 편곡, 화성 등에 있어 양악 및 일본 가요와 같은 외래 음악적 요소를 수용한 혼종적 양식으로 생산되었다. 신민요가 경토리(진경토리, 반경토리)에 기반을 둔 선율이 굿거리ㆍ자진모리장단의 리듬 반주로 창작된 스타일이 다수를 차지하는 가운데 메나리토리, 육자배기토리, 일본의 요나누끼 장단 음계로 된 소수의 곡들도 유행하였다. 전통 토리에 기반하되 피치나 요성에 있어 양악화 된 신경토리, 신반경토리 등을 사용하였고 편곡 역시 콜롬비아선양악합주단, 오케선양교향악단 등에 의해 전통악기와 양악기가 혼합된 선양(鮮洋)합주로 이루어졌거나 일본빅타관현악단, 일본포리도루관현악단 등 양악기로만 이루어진 편성이 많았다. 吳山正吉 , 仁木他喜雄 등의 일본인 편곡자들이 편곡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민요의 상당수는 경기민요나 서도민요에 능통했던 기생 가수들에 의해 불림으로써 전통 특유의 멋과 맛이 들어간 시김새가 살아있고 반주에서는 전통악기의 선율 역할이 두드러졌기에 당시 트로트와 상대적으로 구별되는 ‘조선적 내음새’로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광복 이후 신민요는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전승되었다. 첫째, 〈노들강변〉, 〈태평가〉, 〈울산아가씨〉, 〈궁초댕기〉 등 전통민요의 특성이 잘 살아있는 1930년대의 신민요는 해방 이후 전통민요 가창자들에게 수용되어 통속민요의 하나로 계승되었다. 또한 한일섭의 〈동백타령〉, 박귀희의 〈꽃타령〉 등 전통음악인들이 직접 창작한 신민요가 해방 이후 다수 만들어져 전통가창권에서 널리 불려졌다. 둘째, 1950년대 이후 대중가요의 하나로 자리 잡아 김세레나, 김부자 등 대중가수로서 활동하는 신민요 가수들에 의해 한양합주의 반주로 가창되었다. 그러나 대중가요의 하위 갈래로 전승된 신민요는 미국 대중음악의 본격적인 유입 및 수용자층의 세대변화와 맞물려 1970년대 이후 급격히 쇠퇴하였다. 한편 전통민요권으로 흡수된 〈노들강변〉, 〈태평가〉 등 극소수의 신민요는 〈도라지타령〉, 〈아리랑〉 등의 근대민요와 함께 경기민요 가창자들에게서 경기민요의 레퍼토리로 지금도 애창되고 있다. 한편 북한에서도 〈노들강변〉, 〈조선팔경가〉, 〈능수버들〉 등은 ‘민요의 보편화, 현대화 과정’의 산물로서 높이 평가되어 전승되었으며, 신민요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 인식은 이후 ‘민요식 노래’라 불리는 북한의 민요 창작 원리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좁은 의미의 신민요는 일제강점기에 음반 상품으로 창작되고 유통된 민요풍 대중가요로서 당시 신민요에 대한 인식은 ‘유행가와 민요의 비빔밥’이란 말로 잘 압축된다. 1930년대 콜럼비아, 빅타, 오케 등을 필두로 시장의 규모가 커지면서 당시 트랜드의 하나인 조선적인 것에 대한 수요에 부응하기 위하여 향토색이 강조되면서도 당시 도시적 감성에 맞는 가요, 즉 도회민요’로서 창작된 신민요는 유행가와 전래민요가 이종교배(異種交拜)된 혼종적 성격의 산물이었다. 전통민요 어법을 일부 계승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유행가(당시 트로트)의 반주 및 편곡 양식을 계승함으로써 일종의 퓨전 가요가 만들어진 것이다. 신민요가 전통민요와 다른 점은 구전으로 전승된 것이 아니라 창작된 민요이다. 작곡가와 작사가가 있고 특정 가수가 취입한 노래로서 대중가요의 일반적 관행을 따른다는 데 있다. 많은 신민요가 악곡에서 경기민요의 선율 양식을 차용하거나 리듬에서 전통장단을 수용하기도 하나 작곡가들은 대부분 대중가요를 작곡했던 이들로 구성되었고 편곡 역시 전통악기와 양악기가 혼합되거나 양악기로만 이루어진 편성이 많았으며 다수의 일본인 편곡자들이 편곡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민요의 상당수는 음계나 가창에서 경기민요나 서도민요에 능통했던 기생 가수들에 의해 불림으로써 전통 특유의 멋과 맛을 살리기 위해 시김새를 살리고 반주에서는 전통악기의 선율 역할이 두드러지면서 당시 트로트와 상대적으로 구별되는 ‘조선적 내음새’를 풍김으로써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신민요의 혼종적 성격으로 인하여 신민요에 대한 평가는 전통민요의 변질과 퇴보로 보는 견해와, 민요가 시대에 적응하면서 대중가요로 변한 자생적인 대중가요로 보는 두 개의 상반된 평가가 대립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이분법적 시각을 넘어서서 ‘외래 음악의 향악화’와 ‘민요의 양악화’가 만나는 접점 지역으로서 신민요의 양가성(兩價性) 그 자체를 주목하려는 관점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이소영, 『20세기 한국음악의 혼종적 음악하기 -신민요를 중심으로-』, 민속원, 2018. 이소영, 『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국사편찬위원회, 2011. 이소영, 「일제강점기 신민요의 혼종성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7. 이소영, 「해방 후 남ㆍ북한의 혼종적 음악하기」, 『한국민요학』 29, 한국민요학회, 2010.
이소영(李昭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