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고전무용연구소
한성준이 1937년에 설립하여 1941년까지 활동한 조선 고전무용 전문 교육ㆍ공연기관
조선음악무용연구회는 1937년 12월 한성준(韓成俊, 1874~1941)을 중심으로 전통음악ㆍ무용계 인사들이 설립한 조선의 고전무용 전문 교육기관이자 공연단체이다. 1938년부터 1941년까지 4년간 조선의 춤을 근대 무대에 적합한 양식으로 집대성하여 공연하였고, 이를 전승할 고전무용 전문가를 양성했던 단체의 활동은 근현대 한국 전통춤 유산의 맥과 계보를 잇는 예술적 성과로 인식되고 있다.
1930년대는 창극, 연극, 영화, 악극, 양악 등 공연예술이 다채로워지고, 신무용과 서양에서 유입된 무도와 레뷰 등 새로운 춤 문화에 대중의 이목이 주목된 시기였다. 반면, 예로부터 전해져온 조선 고유의 춤 무대는 좁아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현실을 목도한 한성준은 설 자리를 잃어가는 조선춤의 보급과 근대 무대에 걸맞은 무대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1937년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설립과 운영은 한성준이 그간 몸담았던 경성구파배우조합, 조선정악회, 조선음률협회, 조선성악연구회 등 예술 단체에서의 활동, 고수 및 무용 지도자로서의 경험이 근간이 되었다. 단체의 공연 시기는 1938년부터 4년에 불과했으나 오늘날 전통춤으로 명명되며 전해지고 있는 승무, 살풀이, 태평무, 학무, 한량무, 훈령무 등 다수의 작품이 집대성되었다.
○ 설립 목적 및 주요 구성원
한성준은 소멸되어가는 조선의 무용과 음악을 연구, 발굴, 복원하고 후진을 양성하여 이를 보급, 전승, 부흥, 대중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1937년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설립하였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는 당시 권번의 활동과 별개로, 민간에서 일반인들에게 조선의 고전무용을 전문적으로 교육하고 작품화하여 공연하는 독보적인 단체로 여겨졌다. 1937년 12월 28일 창립총회에 명고수이자 조선 고전무용의 대가였던 한성준을 비롯하여 김석구, 김덕진, 이강선, 장홍심 등이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초대 회장 나종철, 부회장 현철, 이사장 김석구가 선정되었다. 당시 회원은 31명으로 한성준이 무용 교수자로 활동했던 조선성악연구회 회원들과 최승희의 손위 남자 형제인 최승일 등이 참석하였다. 해외 공연으로 창립위원이 될 수 없었던 최승희는 창립 준비금으로 600원을 기부하여 단체의 조직에 힘을 보탰다.
○ 운영 방식 및 체계
창립 초기 음악부, 무용부, 가극부, 출판부로 조직의 체계를 마련하였고, 연구생 교육, 발표회 개최, 연구회보 발행으로 활동을 계획하였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는 연구회에 입소한 연구생에게 도제식 교육을 제공하였고, 조선무용과 음악 학습, 졸업시험, 공연으로 이어지는 운영 방식에 따라 조선 고전무용의 맥을 잇는 전문 무용가를 양성하였다. 활동을 위해 경운정 47번지(현 종로구 경운동 교동초등학교 건너편)에 2층 한옥집을 연구회관으로 신축하였고, 1층은 한성준의 주거와 연구생들의 숙소, 2층은 연습실로 사용했다.
○ 교육 과정 및 내용
오전에는 취미로 춤을 배우러 다니는 일반인 수업, 오후에는 연구생을 대상으로 한 전문인 수업이 진행되었다. 취미반은 〈즉흥무〉와 기본춤을 배웠고, 연구생들은 〈승무〉를 춤의 바탕으로 삼아 2~3년간 집중적으로 연습했다. 한성준은 개인별 지도와 반복 훈련을 통한 원리의 터득을 중요시했다. 그가 먼저 〈승무〉를 선보인 후 연구생들의 연습이 이어졌고, 〈승무〉가 완성되어야만 비로소 다른 춤을 전수해 주었다. 한성준 외에 경기도 출신 예인 이동안, 김광채가 춤을 가르쳤다. 매년 6월경 한성준 생일을 겸해 졸업시험을 시행하였고, 시험과목은 〈승무〉와 〈즉흥무〉였다. 특히 〈즉흥무〉를 통해 전문무용수로서의 개성과 창의력의 발휘를 살폈다. 시험에 통과한 연구생들은 한성준의 다른 춤인 〈검무〉, 〈학춤〉, 〈한량무〉, 〈태평무〉 등을 익힐 자격을 부여받았고, 단체의 공연에 출연하였다.
○ 주요 공연 활동과 작품
공연 활동은 1938년부터 1941년까지 4년간 전개되었다. 기록으로 전해지는 연도별 공연의 발자취는 다음과 같다.
1938년 5월 2일 첫 공연이 부민관에서 열렸다. 전조선향토연예대회 ‘고전무용대회’에 조선음악무용연구회 회원 전원인 삼십여 명이 출연하였고, 6월 23일 조선일보사의 기념 사업 일환으로 부민관에서 열린 ‘고전무용대회’에 회원들이 모두 출연하였다. 같은 해, 8월 31일부터 9월 10일까지 ‘조선고전음악무용대회’ 서선순업 공연을 열어 황해도 해주, 신주, 사리원, 진남포, 평양, 연안, 개성 지역을 순회하였고, 9월 17일부터 10월 7일까지 함경도 함흥, 청진, 회령, 북청, 신포, 원산 등지를 순회하며 북선순업 공연을 이어갔다. 이듬해, 남선순업 공연을 열어 2월 21일부터 3월 20일까지 30일간 충청도 대전부터 공주까지 일대를 순회하였다. 1940년 2월 27일 일본공연 추진을 기념하는‘도동기념공연’이 조선일보사의 후원으로 부민관에서 열렸고, “조선 고전무용의 호화판”으로 각광받았다. 7월 동경 히비야 공회당을 비롯하여, 대판, 경도, 명고옥 등 일본 순회공연에 한성준을 비롯한 삼십여 명의 남녀 회원들이 참여하였고, 30일 동경 와세다연극박물관에서 열린‘조선무악감상회’에서 조선 고전음악과 무용을 공연하였다. 같은 해 10월 중순에 열린 북선만주순업 공연은 원산, 연길, 목단강, 하얼빈 등 조선 동포들이 이주한 만주 일대에서 진행된 공연으로 한성준과 회원 삼십여 명이 참여했다. 공연 활동의 마지막 해인 1941년, 1월 23일부터 26일까지 4일간 ‘조선음악무용의 밤’ 공연이 우미관에서 개최되었다. 지난해 일본과 만주 순회공연으로 단체의 기량이 한층 쌓인 무대로, 한성준을 비롯한 삼십여 명의 단원이 출연하였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공연은 첫해부터 객석이 만원이 되는 대성황을 이루었고, 고전무용을 본 관객들은 춤에 담긴 찬란한 옛 정취에 빠져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4년간 무대에 오른 작품과 출연자는 다음과 같다. 〈승무〉(이강선, 이선), 〈단가무〉(조연옥, 조금향), 〈검무〉(이강선, 이선, 장홍심), 〈한량무〉(박진홍, 홍경숙, 이남호, 조효금), 〈신선음악〉(이경옥, 이화은, 이수송, 김주경, 최수성, 방용현, 김덕진, 지용구, 이경옥, 한연화, 김효정), 〈상좌무〉(조효금, 김재분, 한입분), 〈살풀이춤〉(한영숙, 이강선, 장홍심, 이춘경, 이선, 강춘자), 〈사자무〉(백만금, 한학심, 홍경숙, 한연화), 〈태평무〉(이강선, 장홍심, 한영숙, 강춘자), 〈학무〉(한성준, 조효금, 한입분), 〈급제무〉(한성준, 이정업, 김봉업, 김세준, 김광채, 김만삼, 이충선, 방용현, 김덕진, 한희종, 홍경숙, 박진홍, 방응규), 〈사호락유〉(이수송, 이화은, 김주경, 한성준, 김효정, 조효금, 김재분), 〈농악〉(김재선, 김광채, 이정업, 이재원, 이충선, 한영숙, 조연옥, 박진홍, 홍경숙, 조금향, 장홍심), 〈소경춤〉(박천복, 이정업), 〈군노사령무〉(조금향, 조연옥, 한영숙, 박농옥), 〈훈령무〉(한성준), 〈바라무〉(한영숙), 〈도라지타령무〉(강춘자, 한영숙), 〈신선무〉(한성준, 권오봉), 〈아리랑무〉, 〈동자무〉, 〈노승무〉, 〈농악무〉, 〈망건편가무〉, 〈애국행진곡〉, 단가, 〈맹인덕담〉, 《춘향가》, 《심청가》, 가야금병창, 가야금산조, 〈군노사령악〉. 이렇듯 조선음악무용연구회가 무대화한 작품은 민간의 춤과 음악에서 조선 문화를 소재로 한 창작춤까지 다채로웠고, 창립인 중 하나였던 장홍심과 한성준의 손녀 한영숙(1920~1989, 국가무형유산 승무ㆍ학춤 전 보유자), 강선영(강춘자, 1925~2016, 국가무형유산 태평무 전 보유자) 등 한성준의 제자들을 거쳐 현재까지 한국 전통춤 유산으로 전승되고 있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는 일제강점기 서양 문화예술의 유입과 새로운 춤의 등장에 관심을 잃어가던 조선 전통춤의 맥을 지키고 후학을 양성한 근대 무용 전문 교육 기관으로, 일반인에게 조선의 춤을 교육, 보급함으로써 춤의 민간화, 대중화, 전문화에 기여하였다. 또한 독자적인 공연을 기획하고 지역 곳곳에 유통하여 흥행에 성공한 전통춤 전문 예술 단체로, 조선의 민속예능과 춤을 정리하고 창작하여 형식미를 갖춘 예술작품으로 집대성하였다. 이 시기 한성준은 〈태평무〉, 〈훈령무〉, 〈군노사령무〉 등 새로운 작품을 안무하였고,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작품은 고전무용으로 명명되어 조선 고유의 춤 양식과 기법을 신무용과 구분 지었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는 무용 단체였지만, 조선성악연구회 회원들과 경기 및 충청 출신의 기악 연구자들이 합류하였고 무용장단과 반주음악이 남도기악을 중심으로 하였기에, 조선 전통음악 전문 단체로도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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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李姃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