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가(胡笳)
갈대잎을 말아 만든 초적류 관악기
전통 시대 행렬과 연향에 사용되었던 관악기이다. 고구려 고분에 기마 악대에서 연주된 것이 나타나 중국과 같이 고취에 편성된 악기에서 기원을 찾으며, 고려시대 군대 행렬에서 호가가 연주되었다. 신라시대에는 가 반주에 춤을 추는 가무가 있었고, 조선시대 광희악에 호가가 혀로만 소리내는 관악기로 소개되었으며, 조선 후기 궁중 연향 악대에 편성되어 연주된 기록이 있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호들기, 초금 등 여러 가지 초적류 악기를 의미하는 일반 명칭과는 구별된다. 조선 후기 연향의궤에는 초적류와 다른 형태로 나무로 만든 지공이 세 개와 여덟 개인 두 가지 가가 나타난다.
가(笳)는 세로로 부는 관악기이다. 4세기 후반의 고구려 고분 안악3호분 회랑 벽화의 행렬도에 수레 뒤를 따르는 기마악대에서 고(鼓)ㆍ배소(排簫)ㆍ요(鐃) 등과 함께 연주된 것이 나타나는데 이는 중국 한나라, 오나라의 고취 및 수나라의 후부요취 편성에 소와 가가 함께 연주된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중국 문헌에 의하면, 본래 서역에서 중국 북쪽 지방을 거쳐 한나라에 전래되었기 때문에 흔히 호가라고 불렸다고 한다. 『사기』 「악서」에 “소가는 피리와 유사하나 지공이 없다. 노부에 사용되었다. 뱍양이 서융으로 들여와 만든 바 갈대 잎을 말아서 분다”, “호가는 피리와 유사하나 지공이 없다. 노부에 사용되었다. 백양이 서융으로 들여와 만든 바 갈대 잎을 말아서 분다”라고 기록되었다. 『태평어람』에 『채염별전』을 인용하여 “가란, 호인(胡人)들이 갈대 잎[蘆葉]을 말아 불어서 악을 연주하였으므로 호가라고 부른다” 하였다. 송(宋)대 진양의 『악서』에는 “호부(胡部)의 죽지속(竹之屬)에는 노가(蘆笳), 대호가(大胡笳), 소호가(小胡笳)가 있으며, 양의 뼈를 깎아서 만들거나 갈대 잎을 말아서 만들고 지공이 없고, 후세에 노부(鹵簿)에 사용하였다”고 하였다. 고구려의 가의 모양과 형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중국과 같이 고취에 편성되었던 악기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한국의 가에 관한 언급은, 『삼국사기』에서 “가무(笳舞)가 신라 나밀왕(奈密王)때 지은 것”이라고 한 기록에서 나타난다. 통일신라 신문왕 9년 연회에서 “가무는 감(監) 여섯 명, 가척(笳尺) 두 명, 무척(舞尺) 한 명에 의하여 연주되었다”고 하여, ‘가’ 반주에 춤을 추는 공연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신라의 ‘가’는 신라 토우에 나타나는 종적 관악기의 일종이라는 견해도 제시되었다.
고려 때 기록으로는 이규보의 『동국이상국후집』 제4권 고율시 98수 중에 ‘시취임엽당가성(時吹林葉當笳聲)’이라는 내용이 있다. 위 기록에서는 풀피리를 가와 다르게 묘사하고 있으나 상호 악기 소리의 흡사함을 나타내고 있다.
조선 시대 초적류 악기의 기록은 연산군 대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연산군실록』에는 “광희악(廣熙樂) 중에 호가를 잘 부는 자로는 철근(哲近)ㆍ귀손(貴孫) 등이 있으며, 적(笛)과 필률(觱篥)은 곡조를 익히기 쉽겠으나 호가는 혀로만 소리를 내는 까닭에 배우기 어려우니 많은 인원에게 전습케 하라”는 내용이 있어, 호가가 대금과 피리와 구별되며 혀로만 소리를 내는 관악기의 특징이 드러난다. 또한, 초적을 잘 부는 운평 알운선이 가를 연주한다는 기록이 있어 가가 초적류 일종임을 알 수 있다.
여러 종류의 초적류 악기는 조선 전기 악서 『악학궤범』에서 초적(草笛) 하나로 묶여진다. 초적(草笛) 항에는 “갈대 잎사귀를 말아서 만들고, 지금은 자작나무 껍질을 쓰기도 한다. 나뭇잎이 단단하고 두꺼운 것이면 다 만들 수 있다.”라 하였다. 또한, 『악학궤범』에 “갈대[蘆] 잎사귀를 말아서 초적을 만드는데, 그 모양이 가의 머리와 같다.” 하였고, 조선 후기 『종묘의궤』의 필률 도설에도, “대나무로 관을 만들고, 갈대로 머리[수]를 만든다. 모양은 호가와 유사하고, 아홉 개의 구멍이 있다”한 것을 미루어, 가의 모양이 종적 형태의 관악기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가는 조선 후기 궁중 연향의 등가에 편성되었는데, 1828년(순조 28) 2월 순원왕후 40세 경축 진작에 가가 연주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진작의궤』 권1 35장 악기풍물에 기록된 설명에 의하면, 가 한 쌍이 방향ㆍ해금ㆍ당금ㆍ생ㆍ당적 등 여러 악기와 함께 장악원에서 새로 제조되었고, 가를 연주한 악공과 가의 그림이 소개되었다. 단, 조선 후기 의궤에 소개된 가는 나무로 만들어져 조선 전기 초적류의 가와는 다른 형태이다. 가는 약 70년 동안 궁중의 잔치 때마다 연주되었다. 1892년(고종 29) 고종 즉위 30주년 경축 진찬에서 악현에 편성되어 연주된 이후, 1901년과 1902년 『연향의궤』에는 악기 그림만 포함될 뿐 연주된 기록이 없고, 그 이후의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고, 현재는 악기의 실물도 전하지 않는다.
『무자진작의궤』에 악기의 상단부에 뚫려 있는 한 개의 취구와 몸통의 중간 아랫부분에 뚫린 세 개의 지공을 가지고 있으며, 그 몸통의 길이가 3척 5촌이고, 몸통의 둘레가 4촌가량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취구와 그 반대쪽은 몸통 부분보다 약간 볼록하게 튀어나온 것이 외관상 특징이고, 다른 관악기처럼 대나무로 제조되지 않고 산유자나무로 제조된 점도 특징이다.
『무자진작의궤』(1828)와 『기축진찬의궤』(1829)의 가는 지공이 3개이지만, 『무신진찬의궤』(1848), 『정축진찬의궤』(1877), 『정해진찬의궤』(1887), 『임진진찬의궤』(1892)의 가는 지공이 8개로서, 지공 수에 차이가 있다.
중국 고대 가는 한나라 때 서부의 흉노로부터 수입된 것으로 유공(有孔)과 무공(無孔)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하였다. 무공의 가는 고취악대로 편입되어 당송 시기까지 전승되었다. 한나라 고취악에 쓰였던 가도 지공이 없는 형태로 세로로 부는 단관악기였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 수나라의 요취부의 전통을 이은 한나라의 단소요가를 보여주는 고구려 안악 제3호분의 기마악대에 나타나는 가도 그것을 한 손으로 잡았는데 악기의 길이가 잡은 손의 약 3배쯤 되며, 지공이 없는 원뿔형 형태이다. 신라악의 가무(笳舞)에 2인이 연주한 가는 바로 유율의 호가로 짐작되며, 조선 후기 새로 제조되어 연향 의궤에 나타나는 가는 각각 3공과 8공을 가진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조선시대 시문(詩文)에 나타나는 호가는 특정 장소에서만 연주된 악기가 아니라 어느 곳에서나 들을 수 있는 대중적인 악기이며, 유독 많은 사료에서 전장에서 슬픈 음색을 나타내거나 전장을 대변하는 악기로 표현된다. 또 서역의 놀이문화 속에 등장하거나 기쁨을 나타냈을 뿐 아니라 춤 반주로도 사용되는 등 여러 장소에서 다양한 연희형태를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무공과 유공의 가가 역사적으로 어떠한 관계를 맺고, 전승되었는지 불분명하지만, 관악기 가가 우리나라에서 꾸준히 연주되어왔다는 사실이 한중 악기사에서 주목하여야 할 중요한 사안이다.
『삼국사기』 『연산군실록』 『악학궤범』 『종묘의궤』 『무자진작의궤』 『기축진찬의궤』 『무신진찬의궤』 『정축진찬의궤』 『정해진찬의궤』 『임진진찬의궤』 『고종신축진찬의궤』 『고종임인진연의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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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혜(吳䝷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