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틀, 만기(慢機)ㆍ중기(中機)ㆍ급기(急機), 일기(一機)ㆍ이기(二機)ㆍ삼기(三機), 만(慢)ㆍ중(中)ㆍ삭(數)
고려로 부터 전해진 향악의 빠르기 관련 음악형식
삼기란 만기(慢機)ㆍ중기(中機)ㆍ급기(急機)를 가리킨다. 하나의 노래가 느린 템포(慢機)ㆍ중간 템포(中機)ㆍ빠른 템포(數機)의 세 가지 템포로써 세 절로 되어 있는 음악형식을 말한다. 이러한 형식을 ‘세틀형식’이라고 하고, 이렇게 되어 있는 노래를 삼기곡(三機曲)이라고 한다.
삼기형식은 고려시대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형식은 고려 향악곡 중 신라로부터 유래된 〈처용가(處容歌)〉에도 보이나, 〈처용가〉는 원래 신라 49대 헌강왕(875∼886) 때 처용이 지었다고 하는 8구체의 단가(短歌)이다. 그런데, 삼기형식으로 된 〈처용가〉는 8구체를 훨씬 넘는 장가(長歌)로서 신라의 단가 〈처용가〉와는 차이가 있다. 삼기형식의 다른 악곡들이 대부분 고려 향악곡인 것으로 보아, 삼기형식이 적어도 고려시대에는 존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고려 때 송나라로부터 수용한 사악(詞樂)의 ‘만(慢)ㆍ근(近)ㆍ령(令)’과 유관하다.
삼기로 구성된 세틀형식은 음악의 템포를 세 단계로 변화를 주어 만든 형식이다. 삼기는 악보와 문헌에 ‘만기ㆍ중기ㆍ급기’ 외에 ‘만(慢)ㆍ중(中)ㆍ삭(數)’ 또는 ‘일(一)ㆍ이(二)ㆍ삼(三)’ 등으로도 나타난다. 고악보의 삼기곡에는 〈처용가〉ㆍ〈진작(眞勺)〉ㆍ〈자하동(紫霞洞)〉ㆍ〈치화평(致和平)〉ㆍ〈봉황음(鳳凰吟)〉ㆍ〈정읍(井邑)〉ㆍ〈동동(動動)〉과 오늘날 가곡의 조종(祖宗)인 『양금신보(洋琴新譜)』의 〈만대엽(慢大葉)〉ㆍ〈중대엽(中大葉)〉ㆍ〈삭대엽(數大葉)〉이 있다. 삼기는 악곡에 따라 아래와 같이 세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 삼기 각각의 악보 없이 한 선율을 템포만 달리하여 삼기로 연주되는 것이다. 이러한 음악에는 〈정읍〉과 〈동동〉이 있다. 〈정읍〉과 〈동동〉은 1,2,3과 같은 숫자 없이 하나의 악보로 되어 있으나, 『악학궤범(樂學軌範)』〈무고(舞鼓)〉 항에는 〈정읍〉 만기ㆍ중기ㆍ급기를 연주한다고 되어 있고, 〈아박무(牙拍舞)〉 항에는 〈동동〉 만기ㆍ중기ㆍ급기를 연주한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정읍〉과 〈동동〉의 만기ㆍ중기ㆍ급기는 한 선율을 템포를 달리하여 연주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악학궤범』〈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 항의 〈영산회상(靈山會上)〉 또한 ‘만기(慢機)’와 ‘영(令)’으로 연주한다고 되어 있고, 〈북전(北殿)〉은 ‘급기’로 연주한다고 되어 있다. ‘만’과 ‘영’은 당악에 나오는 형식으로서, 만은 느리고 영은 빠른 것을 의미한다. 〈영산회상〉은 후대 17세기의 『증보고금보(增補古琴譜)』와 『금보신증가령(琴譜新證假令)』에 한 곡씩만 수록되어 있고, 〈북전〉 악보 또한 『대악후보(大樂後譜)』에 한 곡만 수록되어 있다. 이렇게 〈영산회상〉과 〈북전〉 악보도 하나씩만 있는 것으로 보아, 『악학궤범』 시기(時期)에는 한 선율로써 만기와 급기를 연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선율으로만 되어 있던 〈영산회상〉은 후대에 서로 다른 선율의 〈상령산(上靈山)〉ㆍ〈중령산(中靈山)〉ㆍ〈세령산(細靈山)〉의 삼기로 확대되었다.
둘째는 삼기 각각에 1ㆍ2ㆍ3으로 이름 붙여진 악보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악보에는 〈진작〉1ㆍ2ㆍ3과 〈치화평〉1ㆍ2ㆍ3 그리고 〈처용가〉의 선율로 만든 〈봉황음〉1ㆍ2ㆍ3이 있다. 고려가요 〈자하동〉도 있으나 〈자하동〉에는 1ㆍ2악보만 있고, 3악보는 전해지지 않는다. 1ㆍ2ㆍ3의 세 악보는 선율의 골격은 같지만 시김새와 가사 붙임 등에 차이가 있다. 『대악후보』〈진작〉1ㆍ2ㆍ3악보는 아래와 같다.
『대악후보』에 수록된 위의 〈진작〉1ㆍ2ㆍ3 악보를 오선보로 역보하여 비교한 최근 연구가 있는데, 그것은 아래의 〈보례〉와 같다. 〈보례〉에서 ‘◝’와 ‘a’는 시김새로서 ‘◝’는 퇴성이고, ‘a’는 선율을 길게 끌 때 나오는 요성이다. ‘고요편쌍(鼓搖鞭雙)’은 장구장단을 표시한 것이고 ‘拍’은 악기 박을 표시한 것이다.
〈보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퇴성과 요성 같은 시김새는 〈진작〉1에만 보이고 〈진작〉2와 〈진작3〉에는 보이지 않는다. 가사 두 글자를 한 박에 붙여 부른 뒤 길게 끄는 어단성장(語短聲長)은 〈진작〉1과 〈진작〉2에는 보이나 〈진작〉3에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진작〉1이 가장 느리고, 그 다음이 〈진작〉2ㆍ〈진작〉3으로 빨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는 이름은 만ㆍ중ㆍ삭으로 되어 있으나, 선율은 완전히 다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음악에는 가곡의 전신(前身)인 〈만대엽〉ㆍ〈중대엽〉ㆍ〈삭대엽〉이 있다. 이 〈만대엽〉ㆍ〈중대엽〉ㆍ〈삭대엽〉은 음악형식과 가사형식에 있어서는 같으나, 선율과 리듬에 있어서는 다르다. 〈만대엽〉은 1572년에 편찬된 『금합자보(琴合字譜)』에 가장 먼저 등장하였는데, 이는 〈진작〉의 한 부분인 ‘대엽(大葉)’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진작〉 ‘대엽(大葉)’에 대한 ‘만대엽(慢大葉)’을 의미한다. 장가(長歌) 〈진작〉에서 대엽 부분을 발췌하여 단가(短歌)의 가사를 붙이고 리듬을 느리게 하여 〈만대엽〉을 만들었다. 〈만대엽〉ㆍ〈중대엽〉ㆍ〈삭대엽〉이 처음으로 함께 등장한 것은 1610년에 편찬된 『양금신보』이다. 이 악보에서는 『금합자보』의 최초 〈만대엽〉을 〈중대엽〉이라 하였고, 그보다 느린 자유리듬을 만들어 〈만대엽〉이라고 하였으며, 〈중대엽〉보다 빠른 다른 리듬을 만들어 〈삭대엽〉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삼기형식의 〈만대엽〉ㆍ〈중대엽〉ㆍ〈삭대엽〉은 『양금신보』 시절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세 곡의 선율은 서로 다르다. 이후 자유리듬의 〈만대엽〉은 더 느려져 영조 대에 사라지고, 〈중대엽〉 또한 음이 많이 첨가되며 느려지다가 조선 후기에 사라졌다. 지금은 〈삭대엽〉만 남아 또다시 느리고 빠른 리듬으로 확대되며 삼기형식을 이루고 있다. 오늘날 산조의 진양-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 장단 틀도 이와 같이 점차적으로 빨라지는 템포로 짜여져 있다.
삼기형식은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음악미의 한 표현방식이다. 템포를 활용하여 음악에 변화를 주는 이 방식이 고려시대 이래 오늘날의 전통음악까지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 있어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금보신증가령』 『금합자보』 『대악후보』 『양금신보』 『증보고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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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숙희(文淑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