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기고토(しらぎごと)
신라에서 일본 황실로 전해진 신라의 금(琴).
일본 나라시(奈良市) 동대사(東大寺) 정창원(正倉院)에 823년경 신라에서 건너간 신라금 세 점이 있다. 신라금 세 점은 악기 특징을 고려하여 ‘금니(金泥)신라금’ ‘금박(金箔)신라금’ ‘동대사명(東大寺銘) 신라금’이라 이름한다. 신라금에 딸린 안족(雁足)이 4개와 6개가 별도로 있고, 신라금을 넣어서 보관하는 상자인 신라금갑(新羅琴匣 혹은 신라금궤)도 두 점이나 있다. 신라금, 안족, 신라금갑 등은 국내에는 현전하지 않는 신라 시대 악기 실물인 점에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유물이다.
신라의 현악기 금(琴)은 삼한 시대 진한(辰韓) 때 비롯되었다. 중국 사서 『삼국지』의 저자 진수(陳壽, 233~297)는 진한의 현악기를 “슬(瑟)이 있는데, 그 모양은 축(筑)과 같다”고 표현하였다. 이 시대 현악기 구조는 경산시 임당동에서 출토된 1세기경의 ‘현악기 칠기 흔’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후 3세기 신라인 물계자(勿稽子)가 금(琴)을 연주한 내용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한다. 또 5세기 신라인 백결선생(百結先生)은 신라의 금으로 방아소리를 내어 아내를 위로하였는데, 백결선생의 음악은 ‘대악(碓樂)’이란 이름으로 후대에 전승되었고, 807년에는 신라 궁중음악으로 채택되어 금 연주에 춤을 추가하여 ‘대금무(碓琴舞)’란 곡명으로 연행되었다. 백결선생이 연주한 신라금의 구조는 4~5세기 신라 토우(新羅土偶)에 나타나는데, 현악기에 양이두(羊耳頭)가 부착된 점이 특징이다.
그후 551년에 우륵이 가야금을 들고 신라로 왔으며, 신라 진흥왕은 신라인 계고‧법지‧만덕으로 하여금 우륵의 12곡을 배우게 하였다. 이때 신라 3인은 12곡 중 5곡을 수용하였고, 가야금의 12줄을 수용하여 기존 신라금에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일본에 현존하는 신라금의 구조는 신라 토우와 같고, 현 수가 12현이다. 한편, 신라금을 가야금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가야금의 경우 6세기 초기 가야금의 구조를 입증하는 유물이 없기 때문에 신라금을 가야금이라 주장하기 어렵다.
○ 체재 및 규격 신라금의 구조는 오늘날 가야금의 생김새와 거의 같고 일부분만 다르다. 긴 사각형의 울림통에 양이두(羊耳頭)가 부착되어 있고, 현은 12개로 구성되었으며, 현침(絃枕)을 지나 안족 위에 놓여진 점은 현재 가야금과 같다. 다른 부분은 첫째 현침의 형태가 사다리꼴인 점이며, 둘째 안족의 높이가 각기 다른 점이다. 셋째 12현의 여유분이 타래로 이루어지지 않은 점이며, 넷째 악기 울림통 측면에 긴 끈이 부착된 점이다. 신라금의 각부 명칭을 현재 가야금의 각부 명칭을 빌려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일본 정창원 소장의 신라금은 3종으로 ① 금니신라금(金泥新羅琴) ② 금박신라금(金薄新羅琴) ③ 동대사명 신라금(東大寺名新羅琴)이다. 현전하는 신라금 세 점의 규격은 악기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다. ① 금니신라금 울림통의 총 길이는 153.3cm이다. 울림통의 폭은 좌단이 있는 머리 부분과 반대편의 꼬리 부분이 약간씩 다른데, 머리 부분의 폭은 30.0cm, 꼬리 부분의 폭은 30.5cm이다. 양이두의 길이는 37.3cm이다. ② 금박신라금 울림통의 총 길이는 158.1cm로서 신라금 세 점 중 가장 크다. 울림통 폭의 규격은 머리 부분이 30.2cm이고, 꼬리 부분은 30.9cm이다. 양이두의 길이는 37.7cm이다. ③ 동대사명 신라금의 울림통 전체 길이는 145.3cm로 금니신라금과 금박신라금보다 약 8~13cm 정도 짧다. 머리 부분의 폭은 26.75cm이고, 꼬리 부분의 폭은 25.9cm이다. 양이두의 길이는 34.5cm이다.
(단위:㎝) | ||||
전체 길이 | 머리 부분 | 꼬리부분 | 양이두 길이 | |
금니신라금 | 153.3 | 30 | 30.5 | 37.3 |
금박신라금 | 158.1 | 30.2 | 30.9 | 37.7 |
동대사명 신라금 | 145.3 | 26.75 | 25.9 | 34.5 |
○ 소장처 일본 나라시 동대사 정창원
○ 편찬 연대 및 편저자 사항 일본 정창원 소장 문헌 가운데 『잡물출입장(雜物出入帳)』의 홍인(弘仁) 14년(823) 2월 19일 기록에 ‘금으로 새긴 신라금(金鏤新羅琴)’ 두 점을 다른 악기나 물건과 함께 2월 17일에 밖으로 내보냈으며, 같은 해(823년) 4월 14일에 여러 가지 물건이 반납되었는데, 그중에 ‘신라금’ 2점이 있다. 4월에 반납된 신라금 두 점은 2월에 출고될 때 악기가 아니라 다른 악기로 대체되어 들어왔다. 그래서 현재 정창원에 신라금 세 점이 있는데, 이 가운데 두 점은 823년 4월 14일에 들여온 것으로 본다. 나머지 한 점에 관한 것은 기록의 부재로 언제 들여온 것인지 알 수 없다. 따라서 현존하는 신라금 두 점은 8~9세기 신라에서 제작되어 일본 황실로 전해진 악기로서 823년 이전 시기의 유물이다. 신라금의 제작자는 미상이다.
○ 구성 및 내용 ① 금니신라금 ‘금니(金泥)’ 곧 아교에 금박가루를 넣어서 개어 만든 금물로 장식한 신라금이다. 일본에서는 이것을 ‘금니회신라금(金泥繪新羅琴)’ 또는 ‘금니화신라금(金泥畵新羅琴)’이라 칭한다. 이 악기는 823년 4월에 정창원으로 납입된 두 점의 신라금 중 하나로 여긴다.
악기 울림통은 전반적으로 예전의 모습을 지녔고, 양이두와 현침도 예전 그대로다. 안족의 경우 네 개는 예전 것이고 나머지 여덟 개는 후대에 보수한 것이다. 네 개의 안족은 금니신라금에 딸린 부속품으로 간주한다. 신라금 울림통에 양이두와 현침이 부착되었고, 울림통 위에 안족이 놓여 있다. 그 외 12현과 부들 그리고 목에 거는 끈으로 구성되었다. 안족(雁足)은 기러기 발처럼 생긴 것으로 현을 받쳐 주는 역할을 하며, 안족의 위치에 따라 현의 음정이 달라진다. 일본에서는 이를 ‘고토지(ことじ, 琴柱)’라고 부르며, 안족의 재료는 먹감나무로 밝혀졌다. 울림통 측면에 구멍이 2개 있고 거기에 끈이 달려 있는데, 이 끈을 일본에서는 ‘카케오(かけお, 懸緖)’라 하며, 이 끈은 후대에 보수된 것이다. 이 끈의 용도에 관해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연주할 때 목에 걸어서 악기의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악기 몸통은 오동나무로 제작되었는데, 몸통을 도려내서 울림통을 만들었다. 양이두는 느티나무로 제작되었으며,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양이두 뒷면에 금물로 문양을 그린 것이 지금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다. 현침은 뽕나무로 제작되었고, 1현에서 12현으로 갈수록 폭이 좁아지고 낮아진다. 몸통 옆쪽에 끈을 묶을 수 있는 두 개의 구멍이 있다. 안족(雁足)은 네 개가 남아 있는데, 먹감나무로 제작되었다. 안족의 높이가 각기 다른데, 높이 3.6~3.8cm, 다리 폭 4.8~5.1cm, 꼭지부분 두께 0.9~1.0cm이다. 이 신라금은 명치시대(明治時代, 1868~1912)에 몸통 일부분을 수리한 적이 있는데, 뒷면의 흰색 부분이 바로 보수한 흔적이다. 악기 무게는 3,075g이다. 이 금니신라금은 현존하는 신라금 세 점 중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 악기다.
② 금박신라금 금박(金薄 또는 金箔) 곧 금(金)이나 금빛 나는 물건을 두드리거나 눌러서 종이처럼 아주 얇게 문양을 붙여 만든 신라금이다. 일본에서는 이것을 금박압신라금(金薄押新羅琴)이라 부르고 있다. 823년 4월에 정창원으로 들여온 두 점의 신라금 중 하나로 간주한다. 악기 앞면에 금박으로 풀 넝쿨과 봉황새가 그려져 있다.
이 악기는 현전하는 신라금 세 점 중 문양이 가장 화려하고 문양의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한 유물이다. 다만, 울림통 앞면 상단과 하단 그리고 뒷면 좌우에 흰색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모두 명치시대 보수한 것이다. 금박신라금에 부속으로 딸린 안족 여섯 개가 있다. 안족 표면에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안족 아랫면에 검은 색으로 각각 일(一), 이(二), 사(四), 오(五), 칠(七), 팔(八)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악기 울림통 위에 안족을 놓는 위치를 표시한 것으로 해석된다. 악기 몸통은 오동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양이두의 재료는 느티나무로 밝혀졌다. 몸통 옆쪽에 끈을 묶을 수 있는 두 개의 구멍이 있다. 현침은 손실되었는데, 앞의 ‘금니신라금’을 참고하여 후대에 보수한 것이다. 안족은 회양목으로 제작되었으며, 여섯 개의 규격이 각기 다르다. 안족의 높이 2.8~3.0cm, 다리 폭 4.8~5.1cm, 꼭지 부분 폭 0.8~0.9cm이다. 이 금박신라금에 딸린 끈과 학슬 그리고 부들(염미)은 모두 후대에 보수한 것이다.
③ 동대사명 신라금 이 악기는 울림통 뒷면에 ‘동대사(東大寺)’란 명문이 있어서 ‘동대사명 신라금’이라 한다. 일본에서는 ‘신라금잔궐(新羅琴殘闕)’ 혹은 신라금잔흠(新羅琴殘欠)이라 부른다.
이 악기는 정창원 남창(南倉)에 보관되어 있었으며, 원형의 신라금에서 현침과 안족‧현‧부들 등이 유실되고 울림통과 양이두만 남은 상태이다. 이 악기에는 금니나 금박 등의 문양이 없는 상태이다. 현침은 유실되었고, 그 자리에 현공만 열두 개 남아 있다. 양이두에 부들 끈의 잔편이 남아 있어서 부들의 옛 제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악기 뒷면의 울림통 일부가 부식되었으며, 현전하는 신라금 3종 중에 악기 보존 상태가 가장 부실하다. 악기 몸통은 오동나무로 제작되었고, 양이두의 재료는 느티나무로 밝혀졌다. 1908년부터 최근까지 약 110년 동안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악기를 가야금으로 인식하였다. 그 이유는 악기 형태가 『악학궤범』 가야금과 닮았으며, 현재 정악 가야금과 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6세기 초기 가야금의 구조를 나타내는 관련 유물이 없는 상태이고, 『악학궤범』이나 현재 정악 가야금은 모두 정창원 신라금보다 후대의 문헌이므로 이를 소급하여 적용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한편 정창원 신라금은 4~5세기 신라 토우 현악기 금의 구조와 닮았으며, 백결선생이 금을 연주한 문헌 기록이 있고, 같은 시기에 ‘금갑’에 대한 기록도 있으므로 정창원 신라금을 신라의 금으로 보고, 정창원의 신라 금궤를 신라의 금갑으로 보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
신라 때 신라에서 제작되어 일본으로 전해진 신라금은 국내에는 한 점도 없기 때문에 비록 일본에 있지만 9세기 신라의 현악기 실물이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금니신라금은 악기 울림통과 양이두, 현침, 안족 네 개, 부들 등 예전의 재질과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유물의 가치가 크다. 보존 상태 역시 가장 양호한 점이 특징이다. 그래서 이 악기는 손상된 다른 신라금을 복원할 때 길잡이가 되는 데 의미가 있다. 금박신라금은 양이두의 상당 부분과 현침이 보수된 것이나 울림통과 안족 여섯 개가 예전의 재질과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 악기의 울림통 앞면과 뒷면 안쪽에 금박으로 장식된 화려하고 우아한 문양은 다른 신라금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장점이다. 금박신라금에 장식된 문양은 고대 신라금 복원 제작 및 8~9세기 신라 문양사 연구에 가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동대사명 신라금은 악기 울림통 뒷면에 당시 소장처를 나타내기 위해 ‘동대사’라는 명문이 새겨진 점이 특징이다. 현전하는 신라금 실물은 8~9세기 신라와 일본의 국제 교류에 악기를 비롯한 음악 교류도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신라 악기가 일본 황실로 유입됨으로써 신라의 음악과 음악 이론 등 신라의 음악문화 역시 일본 황실 및 관료들에게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신라금 3종 중에서 2종은 9세기 유물이므로 당시 신라인들의 신라금 제작 방법과 기술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하는 데 그 의미와 가치가 있다. 즉 고대 신라인들의 악기 제작 기술법이 조명될 수 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또한 이 악기는 일본 고대 현악기 화금(和琴)의 생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현악기인 점에도 의미가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후기』 『일본문덕천황실록』 「헌물장」 「잡물출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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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혜(金聖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