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가, 사뇌가, 유리왕의 노래, 월명사의 향가, 산화공덕가, 향풍범패
불교의 이상향인 도솔천을 향한 노래.
유리왕의 치세염원을 담은 노래와 월명사의 4구체 향가.
고구려 유리왕과 통일신라 월명사에 의해 발현하였다.
고구려 유리왕과 통일신라 월명사가 도솔가를 불렀는데, 그 시기와 내용은 다르다. 유리왕의 도솔가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에 차이가 있고, 연구 분야와 학자에 따라서도 해석이 다르다. 반면 월명사의 도솔가는 4구체 향가 가사가 있어 그 내용과 용처가 구체적이다. ① ‘도솔’의 어원과 용례 도솔가는 범어 뚜스(√ tuṣ)를 어근으로 하는 형용사 뚜스따(tuṣṭa)로, ‘행복한, 만족한, 천상의 지복(至福)’으로 번역된다. 중국의 어원사전에서는 이를 ‘도솔(兜率)’로 음사하여 하늘 ‘천(天)’자를 붙여 ‘도솔천’이라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은 수미산이며, 그 꼭대기의 12만 유순 위에 외원과 내원으로 된 도솔천이 있다. 외원에는 수많은 천인들이 즐거움을 누리고, 내원은 석가모니가 마야부인의 태중에서 머물던 곳이자 미륵보살이 지상으로 내려갈 때를 기다리는 곳이다. 미륵보살이 머무는 이곳은 불교적 이상세계인 정토이자 지족천(知足天)이다. ② 문헌에 나타나는 도솔가 유리왕의 도솔가 : 『삼국사기』 “유리이사금 5년 11월 겨울, 왕이 국내를 순행하다가 어떤 늙은 할미가 주리고 얼어 죽어 가는 것을 보고 왕이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 주고 음식을 주었다. 그리고 사관을 시켜 병자, 고아, 늙은이, 홀어미 등을 부양케 하니 이웃나라에서도 그 소문을 듣고 오는 자가 많아 왕이 ‘도솔가’를 지어 부르니 이것이 가악의 시초였다.” 필자 역,원문1
원문1) 『三國史記』 第二卷 「新羅本紀」 儒理尼師今 五年條:冬十一月 王巡行國內 見一老嫗飢凍將死 曰予以眇身居上 不能養民 使老幼至於此極 是予之罪也 解衣以覆之 推食以食之 仍命有司 在處存問 鰥寡孤獨老病不能自活者 給養之 於是 鄰國百姓聞而來者 衆矣 是年 民俗歡康 始製兜率歌 此歌樂之始也.
『삼국유사』 “유리왕이 해탈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해탈이 ‘덕이 있는 자는 이(齒)가 많으니 떡을 물어 시험해 보자’ 하여 잇금이 많은 이질금(尼叱今)이 되었고, 왕은 유성공(劉聖公) 갱시(更始) 원년에 6부의 이름을 고쳐 정하고, 여섯 성(姓)을 하사하며 사뇌의 격식을 빌어 도솔가를 지어 불렀다.” 필자 역,원문2
원문2) 『三國遺事』 第一卷, 紀異: 儒禮王 初王與妹夫脫解讓位, 脫解云: “凡有德者多齒, 宜以齒理試之.” 乃咬餠驗之, 王齒多, 故先立, 因名尼叱今, 尼叱今之稱, 自此王始. 劉聖公更始元年癸未卽位[年表云, 甲申卽位.], 改定六部號, 仍賜六姓. 始作兜率.
월명사의 도솔가 : 『삼국유사』 “경덕왕 9년 4월 초하루에 해가 둘이 나타나서 열흘 동안 사라지지 않자 한 신하가 “인연 있는 스님을 청하여 산화공덕을 행하면 사라질 것이다”고 하였다. 왕이 월명사에게 이를 부탁하하자 “나는 성범(聲梵)은 잘 못하고 향가만 할 줄 안다”고 하였다. 왕이 “인연으로 모셨으니 향가라도 좋다”고 하자, “오늘 여기에 산화가를 부르며(今日此矣散花唱良), 그윽히 꽃을 뿌려 드리니(巴寶白乎隱花良汝隱), 나쁜 마음일일랑 버리시고 바른 마음을 내어(直等隱心音矣命叱使以惡只), 미륵이 계시는 도솔천에서 태어나시라(彌勒座主陪立羅良)”는 4구체 향가를 불러 재앙이 사라졌다.” 필자 역,원문3
원문3) 『三國遺事』 第五卷, 「兜率歌」 景德王十九年庚子四月朔, 二日竝現, 挾旬不滅. 日官奏: “請緣僧, 作散花功德則家禳” 於是潔壇於朝元殿, 駕幸靑陽樓, 望緣僧. 時有月明師, 行于阡陌時之南路, 王使召之, 命開壇作啓. 明奏云 “臣僧但屬於國仙之徒, 只解鄕歌, 不閑聲梵,” 王曰 “旣卜緣僧, 雖用鄕歌可也” 明乃作兜率歌賦之, 其詞曰...후략.
월명사의 도솔가는 재앙을 물리쳤으므로 제의적 성격이 있는 주술적 노래이며, 문학적으로는 4구체 향가이다. 그러나 유리왕의 도솔가는 두 문헌의 내용에 차이가 있는데다 도솔가의 가사나 음악적 성격을 가늠할 수 없다. 관련하여 학계에서는 『삼국사기』에서 “사뇌의 격식을 빌어 가사를 지은 노래”라는 점과 ‘도솔’의 발음에 기인하여 돌아악(突阿樂)이 후렴으로 돌아가는 ‘ᄃᆞᆯ이노래’, 한 구가 여섯 단어로 이루어진 3구절(三句六名體)에 여음을 가진 형식, ‘두레노래에서 기인한 노래’로서 가악의 시작이라 하였고, 국악학계의 이혜구는 고구려 유리왕 때는 불교가 들어오기 전이므로 “도솔가와 불교가 관련이 없다”며 국문학자 양주동의 우리말 어원에 대한 견해를 빌어 ‘도솔푸리ㆍ도살푸리ㆍ살푸리’로 추정하여 무가(巫歌)와 신악(新樂)으로 추정하였다.
③ 도솔가의 문헌적 맥락과 배경
『삼국사기』 1145년에 완성된 문헌으로 고려시대의 불교적 인식 체계와 중국에 대한 사대적인 관점이 농후하다. 승려 일연(1206~1289)에 의해 쓰여진 『삼국유사』는 오래 전부터 연대표 등을 준비해 오다 1277년(충렬왕 3)에 집필하기 시작하여 1283년 무렵 완성된 것으로, 이 역시 고려시대의 문화적 환경과 불교적 인식 체계 위에 쓰였다. 예를 들어 『삼국유사』에서 신라의 ‘인호지정(人虎之情)’을 고려시대에 들어온 대성 아악기를 빌어 금슬지정(琴瑟之情)을 빌어 서술하고 있다. 즉 신라의 이야기지만 고려시대 음악사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제반의 사안을 감안해 보면, 『삼국사기』 유리왕의 도솔가는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들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치세 염원이 도솔가로 반영되고 있고, 『삼국유사』 유리왕의 도솔가는 왕위를 물려주면서 덕이 있는 자를 가리고, 6부의 이름을 바르게 하고 성씨를 내리며 나라의 기반이 잡힌 후에 그 기쁨을 도솔가로 노래하였다. 따라서 유리왕의 도솔가는 치세의 목적을 불교적 이상 세계를 지향하는 도솔가였고, 월명사의 도솔가는 재앙을 물리침으로써 나라를 평안하게 하는 제의적 도솔가라고 할 수 있다.
문학적 유형으로 볼 때, 유리왕의 도솔가는 사뇌의 격식을 빌려 쓴 문형이었고, 월명사는 4구체 향가이다. 고전 시대에는 문과 율이 동일어였고, 왕조가 바뀌어도 문학적 사조는 맥을 이으며 변화해 왔다. 따라서 고구려의 사뇌가 조의 도솔가와 신라의 향가 조 도솔가에도 불교적 이상세계를 향한 맥락이 연결되고 있다. 향가의 대부분이 불교를 내용으로 하고 있고, 월명사가 승려였던 점과 제의적 배경을 감안해 보면 향풍 범패의 한 맥으로도 볼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윤소희, 「『삼국유사』의 음악과 악기」, 『한국불교사연구』 24, 2023. 윤소희, 「이혜구의 불교음악 연구 재고찰 -도솔ㆍ사뇌ㆍ산대극과 기악 연구를 중심으로-」, 『한국음악연구』 70, 2021. 이혜구, 「도솔가고」, 『(보정) 한국음악연구』, 민속원, 1996.
윤소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