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통음악의 빠르고 느린 정도를 나타내는 음악 용어
한배는 음악의 빠르기를 나타내는 용어이다. 전통음악에서 음악의 빠르기는 만(慢)ㆍ중(中)ㆍ삭(數)의 세틀형식(三機曲)으로 나타내며 고려시대부터 쓰던 형식이다. 세틀형식은 『양금신보』 「현금향부」에 “지금 쓰고 있는 만(慢)ㆍ중(中)ㆍ삭(數)은 모두 과정(瓜亭) 삼기곡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한데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만ㆍ중ㆍ삭과 같이 빠르기를 나타내는 용어로는 만(慢)ㆍ평(平)ㆍ삭(數), 一ㆍ二ㆍ三, 일기(一機)ㆍ이기(二機)ㆍ삼기(三機), 만기(慢機)ㆍ중기(中畿)ㆍ급기(急機) 등과 관련된 용어가 다수 나타난다.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악부(樂府)의 〈진작〉(眞勺)에는 一ㆍ二ㆍ三ㆍ四가 있는데, 그 소리의 느리고 빠른 장단을 말한다. 一의 〈진작〉은 가장 느리고, 二ㆍ三ㆍ四로 내려가면서 여기에 버금간다”라고 하였다. 『세종실록』ㆍ『대악후보』ㆍ『양금신보』 등 고악보에 전하는 삼기곡의 특징은 처음이 느리고 가락이 복잡하다면, 갈수록 빨라지면서 가락이 덜리고 단순해진다. 만(慢)은 가장 느리고 가락이 복잡하고, 중(中)은 조금 빨라지면서 가락이 조금 덜리고, 삭(數)은 더 빨라지며 가락이 많이 덜린다. 〈진작〉의 一ㆍ二ㆍ三ㆍ四 중 四에 이르면 一ㆍ二ㆍ三의 한 장단이 절반으로 축소되고, 가사도 부르지 않는다. 이러한 세틀형식은 당악에는 없고, 오직 향악에만 있다.
세틀형식의 용례는 조선시대 문헌에서 다수 확인된다. 『경국대전』 「악공 향악 취재조」에 의하면 〈삼진작보〉(三眞勺譜)ㆍ〈진작사기〉(眞勺四機)ㆍ〈봉황음사기〉(鳳凰吟四機)ㆍ〈치화평삼기〉(致和平三機)ㆍ〈정과정삼기〉(鄭瓜亭三機)ㆍ〈정읍이기〉(井邑二機)의 이름이 보이고, 『악학궤범』 「시용향악정재도의」 중 아박 춤에서는 〈동동〉慢機ㆍ〈동동〉中機ㆍ무고 춤에는 〈정읍만기〉(井邑慢機)ㆍ 〈정읍중기〉(井邑中機)ㆍ〈정읍급기〉(井邑急機), 〈처용무〉에서는 〈처용만기〉(處容慢機)ㆍ 〈봉황음만기〉(鳳凰吟慢機)ㆍ 〈봉황음급기〉(鳳凰吟急機)의 이름이 보인다.
〈진작〉 전강(前腔) 부분의 ‘내 님을 그리ᄋᆞ와’가사 부분 一ㆍ二ㆍ三ㆍ四에서 음의 출현을 비교해 보면 음악의 한배를 짐작할 수 있다. 〈진작一은 음의 출현이 많고 멜리스마가 있다면, 〈진작三〉으로 갈수록 음의 출현이 덜어지고, 〈진작四〉에서는 가사가 없고 선율만 남아 있다. 이것은 〈진작四〉로 갈수록 장단의 한배가 빨라지면서 선율음이 골격음만 남고 나머지 음은 탈락하는 현상이다.
앞서 살펴본 만(慢)ㆍ중(中)ㆍ삭(數)과 一ㆍ二ㆍ三ㆍ四 등이 정악의 빠르기인 한배를 나타낸다면, 민속음악에서는 장단의 이름이 곧 한배를 포함한다. 만중삭과 마찬가지로 산조의 악곡(장단명)을 보면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 차례로 음악이 점점 빨라지고 선율이 단순해지며 가락이 덜어진다. 이와같이 한국의 전통음악에서 한배가 점점 빨라지는 것은 가곡, 산조, 풍물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한국음악의 특징이다.
정노식의 『조선창극사』(1940년)를 살펴보면 ‘진양조 늦인중모리, 중중모리, 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중략- 낮고 높은 장단을 분류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장단의 고저 장단을 대체로 구별하기 위하여 분류함이요 장단이 꼭 틀림없이 4박자이니 3박자이니 2박자이니 단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소리하는 사람을 따라서 그 장단의 한배(지속의 정도)를 좀 느리게 하고 좀 빠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한배는 지속의 정도라고 표현하였고, 그 내용은 같은 곡이라도 4박자, 3박자, 2박자로 박자를 달리하며 빠르기를 조절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때 한배에서 지속의 정도의 의미는 박자의 빠르기를 의미한다. 장단에서 비슷한 유형의 장단이 빠르기에 따라서 장단명이 달라진다. 예를 들면 3소박4박자 유형의 음악인데 굿거리보다 조금 빨리 연주하면 자진모리장단이 되고, 자진모리 장단이 빠라지면 휘모리장단이 되는 경우가 한배가 빨라지는 경우로 들 수 있다.
한배에 대한 용례는 산조, 판소리, 기악곡, 민요 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 판소리의 경우, 첫 박(보통박)인 내드름에서 한배를 잘 잡아야 진양조의 느린 장단의 소리를 잘 표현할 수 있다. 진양조는 느린 6박 장단으로 매우 느린 음악에서 일정하게 6박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다.
산조에서는 장단 이름이 마치 악곡명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장단(악곡)은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 순서로 구성되는데, ‘중모리’, ‘자진모리’ 등 장단의 이름에서 한배를 짐작할 수 있다.
《영산회상》에서 〈상령산〉과 〈중령산〉은 한배가 길다고 표현한다. 〈상령산〉은 1분에 20정간을 연주하고, 〈중령산〉은 1분에 30정간을 연주하여 실제 음악의 빠르기에는 차이가 있지만, 〈상령산〉과 〈중령산〉 악곡을 각각 이야기할 때는 단지 ‘한배가 길다’고 표현한다. 즉 한배는 일정한 기준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대강의 빠르기를 지칭하는 것이며 곡에 따라 상대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성악곡 중 한배에 따라 구성되는 음악은 특히 민요에서 많이 나타나며, 긴 자진 형식 등이 이에 속한다. <긴아리〉와 〈자진아리〉, 〈농부가〉와 〈자진농부가〉, <육자배기>와 <자진육자배기>, <쾌지나칭칭나네>와 <자진쾌지나칭칭나네>, <뱃노래>와 <자진뱃노래>, <방아타령>과 <자진방아타령> 등을 들 수 있다.
[그림 2]와 [그림 3]에서 민요 <농부가>는 처음에는 중모리 장단의 <농부가>를 부른 후 자진모리 장단의 <자진농부가>를 이어서 부르며 한배의 변화를 주는 것을 알 수 있다.
○ 특징 및 의의
한배는 음악의 빠르기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한국전통음악 용어이다. 조선시대 문헌을 통해 알 수 있는 한배를 나타내는 용어로는 만중삭(慢中數), 일이삼(一二三) 등의 악곡명이 있으며, 민속악에서는 장단명인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 등이 한배를 포함한다. 민요에서 한배에 따라 구성되는 경우가 많으며, 긴 자진 형식 등이 이에 속한다. 〈긴아리〉와 〈자진아리〉, 〈농부가〉와 〈자진농부가〉 등을 들 수 있다. 장단명은 같더라도 소리하는 사람에 따라서 그 장단의 한배(지속의 정도)를 좀 느리게 하고 좀 빠르게 부를 수 있다.
국립국악원, 『교과서표준악보집』, 국립국악원, 2022. 이혜구, 『정간보의 정간 대강 및 장단』, 세광음악출판사, 1987. 장사훈, 『최신음악총론』, 세광음악출판사, 1985. 김인숙, 「三機曲의 선율구조 연구」, 부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9.
김인숙(金仁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