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천으로 만든 쓰개로 유생, 미혼 남자들의 통상 예모
복건은 주자학(朱子學)의 전래와 함께 착용된 쓰개이다. 형태는 두정부, 끈, 선단, 드림으로 구성되며, 뒤로 드림을 하고 양쪽 끈을 돌려 묶는다. 색은 흑색이고 소재는 증(繒)이나 사(紗)로 전폭(全幅) 천으로 만든다. 복건은 예를 숭상하는 관모로 관례(冠禮), 상례(喪禮) 등 의례와 일상에서 착용되었다. 관례 중 초가(初加) 복식으로 심의(深衣)를 입을 때 썼고, 상례에서는 남자수의로 사용되었다. 복건은 유학자의 복식으로 예론(禮論)의 대상이 되었다. 당파에 따라 홑복건, 겹복건으로 구별하였고, 남인(南人)은 복건을 쓰지 않았다. 복건은 모습이 괴이하다고 여겨 이를 배척한 유학자들로 인해 보편화되지 않았다. 이후 미혼 남자가 두루마기, 전복(戰服)과 함께 예모로 착용하였다. 돌복, 명절복으로 경사스러운 날에 복건을 착용하면서 복건에는 부귀다남(富貴多男) 등 다양한 길상어(吉相語)와 문양이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어린 남자아이에게 씌운 쓰개로 호랑이 문양을 수놓아 용맹함을 기원하는 호건(虎巾)이 있다.
복건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천자의 복색이던 것이 한(漢) 말기에 선비의 복색이 되었다고 하였듯 고대 중국에서 관을 대신해 착용되었다. 이후 송(宋)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 복건과 심의를 평상시 의관(衣冠)으로 착용하였고, 주희(朱熹, 1130~1200)가 『가례(家禮)』에 추천한 뒤 유학자의 법복(法服)이 되었다. 주자학의 전래로 조선시대에 본격적으로 착용하게 되었다.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수발하기 위해 착용하기 시작한 복건은 한 폭(幅)의 천으로 만든다는 의미에서 복건이라고 하였다. 조선에서는 심의와 함께 예론의 대상이 되었고 복건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불교의 승건(僧巾)과 유사하다 하여 배척함에 따라 복건 착용을 기피하는 현상이 일었다. 남자 편복(便服) 예모로 보편화되지 않았지만 미혼 남자, 남아의 예복으로 착용되었다.
복건은 관례, 상례 등 의례와 성균관 유생, 유학자, 관직이 없는 선비가 예모로 착용하였다. 형태는 두정부, 선단, 드림, 끈으로 구성되며, 윗부분에 주름을 잡아 선단에 두정부를 세운다. 드림을 뒤로 하여 머리에 쓰고 양쪽 끈을 뒤로 돌려 맨다. 색상은 검은색이고 소재는 증이나 사로 만든다. 겨울에는 단(緞)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복건은 고대 중국에서 관 대신 착용하였는데 후한(後漢) 이후 성행하였다. 주자학의 전래로 조선의 유학자들이 심의를 입을 때 함께 썼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는 관례 중 초가 복식으로 심의와 함께 복건을 쓴다고 하였다. 『사례편람(四禮便覽)』의 관례에서 보면 복건은 치관(緇冠) 위에 쓰고 심의를 입을 때에는 반드시 복건을 함께 쓴다고 하였다. 그리고 상례의 수의에 사용하는 복건은 관례 때와 같은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이재(李縡, 1680~1746) 초상에는 복건에 심의를 입은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었다.
복건은 심의와 함께 착용된 유학자의 복식으로 예론의 대상이 되었다. 『제일집시문집(第一集詩文集)』에 의하면 당파에 따라 노론(老論)은 홑복건을 쓰고, 소론(小論)은 겹복건을 썼으며, 남인은 복건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예론이 정점을 이루었던 정조(正祖, 1752~1800)대 남인에게 복건을 쓰고 입궐하라는 명이 내려졌고 남인들 사이에 복건의 제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의견이 분분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복건 착용에 대한 논란이 일었고 퇴계 이황이 복건의 모습을 괴이하다고 여겨 배척함으로서 조선시대 남자의 관모로 보편화되지 않았다. 이후 복건은 미혼 남자가 두루마기, 전복과 함께 예모로 착용하였다. 돌복, 명절복 등 경사스러운 날에 복건이 착용되면서 각종 길상어를 부금(付金)하거나 문양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조선후기 왕자가 돌복으로 착용한 복건을 살펴보면, 정면 중앙 상부에는 검은색 용문단(龍紋緞) 위에 불로초(不老草)와 수복강녕(壽福康寧)을 부금하였고, 희(囍)자를 조각한 비취를 부착하였다. 양쪽에는 두 개씩 주름을 잡아 끈을 달았고 봉황문을 장식하였다.
어린 남아에게 씌운 복건으로 호건(虎巾)이 있다. 호건은 호랑이상의 건이라는 뜻으로 호랑이 눈썹, 눈, 수염, 이빨, 귀를 두정부 위에 수놓아 표현하였다. 호건은 남자아이의 용맹을 기원하는 뜻에서 제작되었고 용맹장수(勇猛長壽)를 기원하는 글귀를 장식하였다. 호건은 5, 6세까지 착용하였다.
복건은 유학자, 성균관 유생 등이 착용하였고 관례와 상례에 통용되는 예모로서 의미가 있다. 공자(孔子, 기원전 551~기원전 479)는 예로서 사회의 질서가 유지된다고 하였고, 성리학을 근간으로 하였던 조선에서 예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여겼기에 예복에 대한 제도가 엄격하였다. 조선에서는 예복으로 의관을 함께 중요시하였고 쓰개는 포제(袍制)와 일습(一襲)을 갖추는 것이기에 복건은 심의와 함께 착용되었다. 그러나 심의가 당파와 예론에 따라 논란이 야기되었던 만큼 복건도 형식과 착용에 있어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예모가 구성과 제도적으로 쟁점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복건처럼 당파에 따라 홑복건, 겹복건 등 형식을 달리하는 예는 드물었던 만큼 복건은 예제와 관련성이 깊다고 할 수 있다. 예론의 중심에서 복건은 조선시대 남자 쓰개로 보편화되지 못했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복건은 예를 상징하는 관모로 깊이 인식되었고 관직이 없는 사인, 미혼 남자, 남자아이의 예모로 착용되었다. 특히 남아의 관모로 착용되면서 다양한 문양을 장식하는 등 고유한 양식으로 변모하며 화려해진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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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린(任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