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투
조선시대 성인 남자들이 상투를 틀고 썼으며 다른 관모의 받침용 쓰개
탕건은 말총으로 엮어서 만들며,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아 중간은 턱이 진 모양이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상투를 틀고 망건으로 머리를 정리한 후 착용하거나 정자관, 갓의 받침용 관모로 사용하였다. 중인들은 탕건을 망건 위에 단독 관모로 쓰기도 하였다.
탕건은 중국의 건, 복두(幞頭)), 당건(唐巾)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조선후기에 복두나 감투에 형식적인 기교를 더하고 재료를 국산 말총으로 바꾸어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관모로 개화기 이후에도 사용하였다.
탕건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옛날의 건 또는 두건(頭巾)이 중국의 복두ㆍ사모(紗帽) 등의 영향을 받아 지금의 형태로 완성되었다는 추측과 중국의 ‘당건(唐巾)’이 우리나라로 옮겨지면서 탕건이 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중국의 건은 마포나 사로 만들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말총으로 만들었다. 다만 탕건이라는 용어에 대한 용례는 1614년에 편찬된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정주의 탕건과 안주의 총감투, 통영의 총갓양태, 석성의 망건 등 여러 말총 공예품을 팔도의 특산품으로 열거한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아언각비(雅言覺非)』에는 당건이 탕건으로 잘못 번역된 것이라고 하였으며,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도 당건은 시속에서 말하는 탕건으로 보고 있다. 탕(宕)자의 의미가 넓어서 편안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ㆍ조선상식』에 “탕건은 감투에 형식적인 기교를 더하고 재료를 국산 말총으로 바꾸어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관모”라고 하였다. 조선말기 어휘사전인『국한회어(國漢會語)』에 감투에 대한 설명으로 탕건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감투로도 불렸음을 알 수 있다.
탕건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상투를 튼 머리에 쓰던 실내용 관모이다. 망건과 함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감싸고 상투를 가리기 위한 용도로 썼으며, 외출할 때에는 탕건 위에 갓을 쓰기도 하였다. 탕건은 엮어가는 방식에 따라 홑탕건ㆍ겹탕건ㆍ바둑탕건 등으로 구분하고, 말총을 엮은 줄수와 도리수의 촘촘한 정도에 따라 막줄탕건ㆍ촘촘하게 짠 상탕건ㆍ보통의 중탕건 및 성글게 짠 하탕건 4종류로 구분된다. 안동시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된 말총으로 만든 탕건은 지름이 16cm이고 높이가 16.5cm이다. 탕건의 형태는 앞쪽은 낮고 뒤쪽이 높으며, 중간은 턱이 져있다.
탕건틀은 탕건골이라고도 하며 알통과 웃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알통과 웃통이 분리되는 이중구조는 탕건의 높낮이를 조절하면서 형태를 잡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된 나무로 만든 탕건틀은 높이가 15㎝이고 너비가 16㎝이다. 알통은 원통형으로 상부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이며, 알통 상부는 반원형의 단을 이루고 윗면에 웃통받이턱이 있다.
제주에서 삼대에 걸쳐 탕건을 만드는 탕건장 김공춘을 통해 탕건제작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탕건 제작은 소규모 그룹으로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사대부의 전유물이었던 탕건은 조선후기 봉건적인 신분제도가 해이해짐에 따라 양반을 비롯하여 부유한 양인 및 상인 등 서민층에게까지 널리 착용되어 그 수요가 늘게 되었고 1895년 단발령(斷髮令) 이후에도 짧은 머리에 망건 없이 간편하게 착용할 수 있어서 다른 관모에 비해 꽤 오랫동안 착용되었지만 1920년대 이후 보편화 된 서양식 모자에 밀려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단발령 실시 이후에 망건은 상투를 틀어 올린 머리를 고정하는 원래의 기능을 상실해 그 사용이 줄어든 반면 탕건은 그 형태가 단순하고 착용방법이 쉬웠기 때문에 망건 없이 맨 머리에 착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탕건은 목침에 서랍을 만들어 보관할 정도로 늘 몸 가까이에 두고 사용하였다. 탕건은 속칭 ‘감투’라고도 하여 벼슬에 오르는 것을 ‘감투 쓴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감투는 턱이 없어서 탕건과는 그 형태가 다르다.
주로 사대부들이 평상시 집안에서 망건 위에 탕건만 착용하고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조선 후기 회화나 근대의 사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된 석남 송석하(宋錫夏, 1904~1948)가 수집한 흑백 사진에 일제강점기 성인 남자가 포를 입고 탕건만 쓰고 있다.
조선시대에 탕건을 머리카락만큼 가느다란 말총으로 만들게 되면서 탕건은 주로 말목장의 분포지인 평안도와 제주도에서 생산되었는데 단발령 이후부터는 제주도에서만 생산되었다. 1910년의 『조선산업지(朝鮮産業誌)』의 기록에 따르면 탕건의 경우 재료에 따라 가격 차이가 매우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말총으로 만든 탕건은 70전에서 10원, 인모(人毛)로 만든 탕건은 10원에서 20원으로 이는 당시 영국에서 수입한 최고급 파나마모자의 가격을 웃도는 것으로 굉장히 비싼 가격이었음을 말해준다.
탕건은 검정색의 말총으로 엮어서 만들며,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아 중간은 턱이 진 모양으로 조선시대 성인남자들의 일상적인 쓰개이다. 남자들이 상투를 틀고 망건 위에 간편한 형태의 탕건을 써서 예의를 갖추었으며, 사대부들은 탕건 위에 정자관이나 갓을 썼다. 탕건의 착용모습 및 제작과정은 조선시대 풍속화에서 확인되며, 탕건장에 의해 제작기술이 전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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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문(金容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