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네
조선시대 서민층 부녀자가 외출할 때 쓰던 내외용과 방한용을 겸한 머리쓰개, 간편한 이불 또는 포대기
천의는 한자로 薦衣, 衣, 한글로 쳔의라 하며, 근대 이후에는 처네라 통용되었다. 형태는 대체로 위쪽은 좁고 아래쪽은 넓은 사다리꼴형이며 위쪽에 주름을 잡고 그 위에 깃이 달려있다. 머리쓰개로 착용하거나 포대기 사용하는 천의는 깃 양쪽에 끈을 달아 여밈으로 역할을 한다. 용도는 간편한 이불 또는 어깨에 두르는 방한용품에서 시작되어 여성의 머리쓰개와 포대기로 발전하였다.
천의가 언제부터 착용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를 통해 서장(西藏)의 승복이 원(元)을 거쳐 고려의 풍속으로 이어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천의가 기록에 나타난 시기는 18세기부터이다. 대부분 문헌에서 한자로 薦衣라 표기하거나 한글로 쳔의라 표기하였으나 한문본 궁중발기에서는 옷을 뜻하는 부수를 더 하여 衣라 표기하였다. 이것이 근대 이후에는 발음의 편의상 처네라는 속음으로 통용되고 있다. 천의와 처네 명칭의 상관성은 1938년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에 천의를 설명할 때 처네를 보라고 설명되어 있어 천의와 처네가 동의어임을 짐작할 수 있다.
○ 쓰임 및 용도
18세기 천의는 간편한 이불 또는 겉옷과 같이 어깨에 두르는 용도로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1733년(영조 9)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영조의 병을 치료하는 과정에 대해 약방(藥房) 도제조(都提調)와 제조(提調)의 대화를 보면 용변을 볼 때 천의로 몸을 두르고 모자를 쓸 것을 건의한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의하면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의 「난양록(灤陽錄)」에 이르길 서장의 승복은 깃만 있고 소매가 없어 어깨에 걸쳐 등을 가리는데 우리나라 천의와 흡사하다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천의는 어깨에 두를 수 있는 간편한 형태의 방한용품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이후 궁중 기록인 발기(發記)에서도 베개, 이불, 요와 함께 천의를 기록하고 있어 이불의 한 종류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머리쓰개로써 용도를 나타내는 머리천의란 용어는 19세기 중반에 등장한다. 1847년(헌종13) 후궁 경빈김씨(慶嬪金氏, 1831~1907)의 가례 시 대비가 내린 의대, 의복, 이불 목록에 마리쳔의가 기록되어 있다.
홍순학(洪淳學, 1842~1892)이 청나라를 다녀와 기록한 1866년 『연행록(燕行錄)』에는 여자 선교사가 머리천의와 같은 것을 뒤로 길게 늘여 쓴다고 표현하였다. 이는 수녀의 베일을 머리천의에 비유한 것이라 여겨지는데 신윤복의 《풍속도첩(風俗圖帖)》 〈문종심사(聞鍾尋寺)〉에 말을 타고 가는 여인의 천의를 보면 머리 뒤로 넘겨진 형태를 살필 수 있다.
포대기로써 천의의 용도는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 1897~1970)의 탄생 후 삼칠일과 백일, 돌을 기념하여 마련된 세 번의 의복발기에서 누비천의의 기록을 살필 수 있다. 궁중에서 사용된 아기용 누비천의는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왕자용 처네의 형태를 통해 포대기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 구조 및 형태
천의의 형태는 용도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불의 용도로 사용된 천의는 〈신광헌(申光憲, 1731~1784) 묘〉에서 출토된 천의 유물과 류정(柳綎, 1684~1753)의 부인〈경주이씨(慶州李氏, ?~1700년대 중반 추정) 묘〉에서 출토된 천의 유물이 있다. 두 유물의 공통된 형태는 직사각형 몸판 좌우에 사다리꼴형 무를 달고 위쪽은 주름을 잡아 둥글게 하고 아래는 반듯하며, 주름 위로 목판당코깃 또는 목판깃을 달았다.
이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서 이불보다 작으며 위는 둥글고 아래는 직선으로 되어있다 설명한 형태와 대응한다. 머리쓰개용 천의는 이보다 길이와 폭이 짧고 좁으며 위쪽에 맞주름을 깊게 잡아 쓰개치마를 축소한 형태와 같다. 깃 위에는 동정처럼 흰색의 천을 두르고 이 부분이 이마에 닿도록 머리에 두른 후 깃 양 끝에 달린 끈을 머리 뒤로 돌려 묶어 복건과 같은 방법으로 착용한다. 포대기용 천의는 근세유물로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의 왕자 천의가 대표적이다. 직사각형 몸판 좌우에 사다리꼴형 무를 다는 것은 이불용 천의와 같으나 대부분 위쪽에 주름을 잡지 않는다. 길이에 비해 너비가 넓고 끈이 긴 것이 특징인데 이는 천의로 아기를 업은 사람까지 감싼 후 끈을 한 바퀴 더 둘러 아기의 엉덩이를 받쳐줌으로써 아기에게 안정감을 주기 위함이다.
○ 재질 및 재료
천의의 재료는 안팎을 구성하는 직물과 솜으로 구성되어 있다. 직물의 종류는 천의의 용도와 사용자의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궁중 발기에 기록된 천의 직물은 대부분 초록색과 남색, 분홍색의 왜주(倭紬)와 삼팔주(三八紬)로 제작하였다. 왜주와 삼팔주는 이불과 더불어 침구에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었던 직물이다. 그 외에 수화주(水禾紬), 장원주(壯元紬), 은조사(銀條紗), 저우사(苧藕紗), 생항라(生亢羅) 등 이불임에도 각종 고급 견직물이 사용되었으며, 신광헌 묘와 경주이씨 묘 출토 천의 역시 명주(明紬)로 안팎을 제작하였다. 쓰개용 천의는 대부분 겉감으로 자주색과 같은 붉은색 계통의 명주나 세주(細紬)를 사용하고, 안감은 청색이나 녹색을 사용한다. 이외에 겉감과 안감이 소색 모시와 갑사로 제작된 유물은 여름용 쓰개로 추정된다. 포대용 천의 유물은 무명부터 견직물로 다양하게 만들어졌으며, 이불용 천의보다 후대의 것으로 대부분 기계누비가 사용되었다.
○ 제작방법: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천의 제작법은 포대기용 천의가 있다. 『조선재봉전서(朝鮮裁縫全書)』에 도식과 함께 제시된 제작법은 다음과 같다.
아이 업을 때 쓰는 천의는 넓이 이척 삼촌, 길이 십일척의 옷감으로 안팎을 마름질하되 몸판 옷감에서 깃을 만들고, 무 옷감에서 끈을 만든다. 무를 붙인 후 안팎을 맞춰 뒤집고 주름을 가운데 크게 접어서 깃을 달아 안으로 감쳐둔다. 동정을 안팎으로 같이 달고 끈은 양옆에 단다. 이것은 겹천의 제법이며 여기에 솜을 두고 누비기도 하는데 겹이나 솜천의는 시침을 하지 않는다.
천의는 18세기 문헌에 등장하여 조선 후기 궁중과 양반들에게 간편한 이불 또는 어깨에 두르는 방한용품으로 사용되었으나 점차 원래의 쓰임이 사라지고, 서민 여성을 중심으로 머리쓰개와 포대기로 용도가 변한 대표적 복식 중 하나이다. 현재는 가면극에 등장하는 인물 중 수영야류와 동래야류의 할미 복식에서 착용을 볼 수 있다. 수영야류의 할미는 백색 천의를 착용하며, 동래야류의 할미는 겉감은 자색, 안감은 청색 천의를 착용한다. 이는 1935년 「수영 야류 가면극 극본」에 할미가 처니를 쓰고 등장한다고 기록하고 있어 최소 1930년대로 소급해 볼 수 있다. 또한, 사진 자료를 통해 1960~70년대 수영야류 할미가 붉은색 계통의 천의를 착용한 것으로 보아 현재 백색 천의의 착용은 그 이후에 변화된 것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 『조선어사전』 『승정원일기』 『뎡미가례시일긔』 『연행록』 『임원경제지』 『조선재봉전서』 《풍속도첩(風俗圖帖)》 〈문종심사(聞鍾尋寺)〉 예술원, 『한국예술총람: 자료편』, 예술원, 1965. 이명은, 「천의 용도의 다양성에 관한 연구」, 『한국 복식』 36, 2016. 박지연, 「조선시대 침구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5.
김초영(金草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