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두(蔟兜), 족관(蔟冠), 족두이
조선시대 예복에 착용한 여성의 관모(冠帽)
부녀자들이 예복을 입을 때에 머리에 얹던 관의 하나로 위는 대개 여섯 모가 지고 아래는 둥글며, 보통 검은 비단으로 만들고 구슬로 꾸민다. 여인의 관모로는 유일하게 관혼상제에 두루 착용되었고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는 족두리는 남자의 갓에 버금가는 대표적인 여자의 예모이다. 조선시대 일반 부녀자의 일상적인 머리 형태로 반가에서는 쪽머리를 크게 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장식으로 호사를 하였다. 조선왕조 후기 영조의 발제개혁 이후에도 머리에 많이 장식하는 사치는 여전하였다. 화관, 족두리는 부녀자들이 예복에 갖추어 쓰는 관모로써 미적 장식품 가치를 지니고 있었으며 서민도 혼례 때 착용할 수 있었다.
족두리(簇頭里)라는 말은 고려 때 원나라에서 왕비에게 준 고고리(古古里)가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족두리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원나라와의 혼인이 많았던 고려시대 후기로 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족두리는 조선시대의 것보다 모양이 크고 높이도 높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 양식이 점점 작아지고 위와 아래가 거의 밋밋하게 비슷해졌다. 광해군 때에는 현금(玄錦)으로 거죽을 하고 자주색으로 안을 하였다. 그 이후로 국내의 부녀들이 즐겨 써서 거의 국속(國俗)이 되었으며, 특히 영·정조시대에는 가체(加髢)를 금하면서 족두리의 사용을 장려하였다. 1756년(영조 32)에 명문가 부녀의 다리(月子)를 금하고 족두리로 대체하라는 명이 있었고, 1757년(영조 33)에 젊은 사람은 족두리를 쓰고 늙은 사람은 다리를 썼다는 기록이 있으며, 1758년(영조 34)에는 부녀의 머리장식은 족두리만 허가하고 다른 것은 일체 엄금한다고 하였다. 1788년(정조 12)에는 머리를 틀어 쪽찌고 머리 위에 족두리를 쓰게 하였는데, 그 족두리를 만드는 데에는 면서(綿絮)나 양죽(凉竹)을 검은색으로 하고 칠보 등을 지나치게 쓰지 못하도록 금제령을 내렸다. 아울러 일반의 혼례 때에도 칠보족두리를 빌려 쓰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족두리는 영·정조 시대에 사치를 조장하는 가체를 대신하여 정착한 여성의 예관(禮冠)으로, 족두(蔟兜) 또는 족관(蔟冠)이라고도 한다.
족두리의 유형은 용도에 따라서 혼례용, 상·제례용, 기타로 분류된다. 혼례용으로는 옥판, 밀화, 비취, 산호, 진주, 석웅황 등 각종 폐물을 얹어 화려하게 장식한 칠보족두리, 꾸민족두리가 있다. 상례용으로는 장식을 하지 않고 납작하고 모가 난 흰족두리가 있으며 제례용으로는 검은 비단으로 싸주기만 하였다. 기타의 경우는 계례를 치를 때, 그리고 예식을 치르는 당사자는 아니지만 가족이나 주변 친지인 경우, 또는 굳이 큰 예식이 아니더라도 간단하게 예를 갖추는 경우에 당의나 치마 저고리와 더불어 족두리를 쓰는 경우가 있었다. 족두리 형태에 따라서는 솜족두리, 홑족두리, 어염족두리로 분류하였다.
겉을 검은 비단으로 싼 여섯 모가 난 모자로 위가 넓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다. 속에는 솜이 들어 있고 그 가운데를 비게 하여 머리 위에 올려 놓는다. 내부에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솜족두리와 각족두리, 그리고 장식 여하에 따라 꾸민족두리와 민족두리로 나뉘는데, 솜족두리는 안에 솜을 둔 것이고, 각족두리는 솜 대신 대나무[涼竹] 틀 또는 풀 먹인 종이[糊紙]로 배접한 각진 틀을 넣은 것이다. 둘의 차이는 안감의 유무에서도 나타난다. 솜족두리는 20세기 초까지 안감 없이 솜으로만 채워져 있었으며, 각족두리의 경우 안을 홍색 종이로 배접하였다. 단, 현대의 솜족두리는 솜과 틀을 함께 넣어 모양을 잡고 붉은 색 천으로 안을 대어 제작해 지금은 그 차이를 찾을 수 없다. 또, 꾸민족두리는 흑색 비단 족두리에 옥·진주·산호·밀화·석웅황 등 화려한 보석을 달아 예복에 사용되었고, 장식이 없는 민족두리는 주로 제례 때 사용되었다. 상례에는 하얀 무명으로 감싼 백색 각족두리를 사용하였다. 1756년(영조 32), 영조는 가체로 인한 사치가 날로 심해지자 그 폐단을 막고자 가체를 금지하고 족두리로 대체할 것을 명하였다. 이후 가체 금지가 여러 차례 언급되면서 족두리는 여성의 예관으로 정착하였다. 그러나 이때 처음 족두리를 착용한 것은 아니다. 그 이전인 16세기 말~17세기 초에도 큰 족두리를 머리에 썼음이 출토유물 10여 점으로 확인된다. 처음에는 수의용 모자로 판단하였으나, 한 무덤에서 여러 개의 족두리가 함께 출토된 점, 대렴 과정에서 발견된 점 등으로 보아 수의 전용은 아니며, 특히나 조반(趙伴, 1341~1401)의 부인인 〈계림 이씨 초상〉에서의 족두리 착용 모습을 통하여 18세기 이전에 머리에 쓰던 큰 족두리가 여성의 관식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족두리는 머리에 쓰지 않고 얹는 방식으로 착용법이 변화하였는데, 〈안동 권씨 묘〉에서 출토된 한 건의 족두리를 통해 17세기 전반에 비해 규모가 크게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족두리의 형태는 황윤석의 『이재난고(頤齋亂藁)』에 “사대엽(四大葉), 삼소엽(三小葉), 일정심(一頂心)”이라는 기록을 통하여 옆면을 잇는 일곱 조각과 정수리에 한 개의 정심원을 부착한 형태였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지금까지도 전면 가운데에 오는 조각에 연달아 세 쌍을 좌우로 연결하여 총 일곱 조각으로 둘레를 만들고, 연결된 상부에 둥근 원을 부착하여 겉면을 완성한다. 족두리 감은 상례 때에 사용된 백족두리를 제외하면 모두 흑색 비단을 사용하였으나, 근대 유물 중에는 붉은 비단이 사용된 족두리가 종종 확인된다. 족두리에 사용된 재료는 현금(玄錦), 흑주(黑紬), 흑모단(黑毛緞) 등 모두 흑색에 무늬 없는 명주와 비단이 사용되었다. 부녀의 족두리 위에는 남편의 관직에 따라 금권자(金圈子)나 옥권자(玉圈子)를 붙여서 등위를 표시하였다. 족두리에는 장식이 없는 민족두리와 족두리 위에 옥판(玉板)을 받치고 산호주(珊瑚珠)·밀화주(蜜花珠)·진주 등을 꿰어 만든 꾸민족두리가 있다. 또, 솜족두리라 하여 어여머리를 꾸밀 때 쓰는 것도 있는데, 이것은 어염족두리라고도 한다. 이 밖에 상제(喪制)가 쓰는 흰색의 족두리가 있는데, 이는 장식을 하지 않고 납작한 모가 난 모자와 같은 양상이다. 족두를 만들자면 모단 다섯 치와 솜 한 냥 반이 든다. 족두리는 현재까지도 신부가 신식 혼례를 마친 뒤 폐백을 드릴 때 원삼과 같이 쓰고 있다.
가체는 이미 오래된 풍습이었으나 사치와 폐단이 심해 1756년(영조 32) 1월 "사족(士族)의 부녀자들의 가체(加髢)를 금하고 속칭 족두리로 대신하게 하라"는 영조의 어명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체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풍습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정의 논의에서도 가체의 대안으로 족두리를 사용하더라도 족두리를 화려하게 꾸민다면 가체보다 폐단이 더 클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족두리와 화관은 모양이 조금 다르다. 족두리가 일곱 쪽의 검정색 옷감을 이어 붙이고 속은 솜을 넣거나 비워 둔 모양이라고 하면, 화관은 딱딱한 종이 위에 자주색이나 검정색 종이를 바르고, 금색 종이나 금칠 혹은 금실로 가장자리를 장식한 것이다. 족두리가 원나라의 고고관(古古冠)에서 유래한 것으로 연구된 사례가 있으나 그것은 어원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족두리의 명칭은 17세기 이후 족두리, 족도리, 족두이, 족두, 족관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었다. 영·정조 이전부터 여성의 예관으로 사용하던 것이지만, 사치를 금지하고자 내린 가체금지령에 따라 조선의 독특한 여성 관모로 정착하였고, 오늘날까지도 전통 혼례에서 중요한 여성 관모로 그 맥을 잇고 있다.
『이재난고』 『임하필기』 김지연·홍나영, 「족두리에 관한 연구」, 『복식』 43호, 1999.
안명숙(安明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