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한삼(闊汗衫), 광한삼(廣汗衫), 장한삼(長汗衫), 소한삼(小汗衫), 적삼(的衫/赤衫). 삼아(衫兒)
무용을 할 때 손목에 끼워 착용하는 긴 소매, 또는 예복 소매 끝에 덧대는 흰색 옷감
한삼의 명칭을 뜻풀이하면 땀을 뜻하는 汗과 저고리를 뜻하는 衫으로 이루어져 의복 가장 안쪽에 착용하는 저고리 형태의 땀받이 속옷을 의미한다. 그러나 점차 용도와 형태가 변하여 예의를 갖추고자 손을 가리기 위해 예복 소매 끝에 덧대는 흰색 옷감을 지칭하거나 무용복에서 분리되어 손목에 따로 착용하는 원통형의 긴 소매로 정착하였다.
한삼의 명칭에 대한 유래는 『사물기원(事物紀原)』에 이르길 한고조 유방(漢高祖 劉邦, 기원전 247~기원전 195)이 항우(項羽, 기원전 232~기원전 202)와 전쟁을 할 때 중단(中單)이 땀에 흠뻑 젖게 되었고, 마침내 한삼이란 이름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즉 한삼이란 겉옷 아래 착용하던 땀받이용 속옷을 이르는 말이었다. 한삼의 착용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복식을 통해 살필 수 있다. 〈안악 3호분〉은 묘주부인과 시녀들이 착용한 겉옷 안쪽으로 흰색의 겹쳐진 소매 끝이 보이며, 〈수산리 고분〉은 묘주부부 행렬의 마지막 두 시녀가 착용한 저고리 소매에서 가선 바깥으로 흰색 소매 끝이 드러난다.
이러한 형태는 일본 다카마쓰(たかまつ) 고분벽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 동아시아에서 공통으로 착용하던 복식임을 알 수 있다. 이후 1078년(문종 32) 송(宋)으로부터 공복(公服)과 함께 한삼을 사여 받은 기록이 있으며, 이보다 늦은 1326년 해인사 금동비로자나불에 안치된 복장물 장수의(長袖衣)는 길이가 일반적인 포의 길이 보다 짧으나 화장은 함께 발견된 다른 두 점의 적삼보다 약 팔촌 정도 더 길어 손을 가리는 형태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여러 문헌과 회화, 유물을 통해 한삼의 착용을 살필 수 있다. 『역어유해(譯語類解)』에 한삼과 삼아(衫兒)를 ‘ꥢᆞᆷ밧기젹삼’이라 언해하였는데 이는 땀받이 저고리를 말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1405년(태종 5)부터 1593년(선조 26)까지 한삼이 하사품, 사신 선물, 예단, 염습 등에 사용되었으며, 1600년(선조 33)부터 1907년(광무 11)까지 궁중행사의 의대 목록으로 궁중연향에서 공령(工伶)의 무용복으로 사용된 기록이 있다.
○ 용도 및 형태
『석명(釋名)』에 이르길 한의(汗衣)는 몸에 가까우며 땀과 때를 흡수하는 옷이라 하였다. 이처럼 초기의 한삼은 땀받이용 속옷으로 착용하기 시작하여 조선 후기까지 사용되었다. 『사례편람(四禮便覽)』에 한삼은 속옷의 의미인 소삼(小衫)이며, 속칭 적삼(的衫)이라고 하였고 주(紬)나 면포로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후기 『고종명성후가례도감의궤(高宗明成后嘉禮都監儀軌)』에도 백초(白綃)로 만들어진 한삼은 깃이나 동정이 없는 것으로 보아 속적삼으로 착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삼이 예복으로 착용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유물을 통해 조선 전기에는 시작되었을 것으로 본다. 〈송효상(宋效商, 1430~1490 추정) 묘〉 출토된 적삼 두 점은 팔꿈치부터 소매 끝까지가 전체와 다른 옷감으로 이어져 있으며, 화장도 각각 약 삼척 칠분(144cm), 약 이척 구촌 삼분(137cm)으로 약 일척 팔촌 육분(87cm)인 다른 한 점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길다. 이는 한삼이 저고리의 형제에서 벗어나 소매 부분만 분리되어 점차 팔꿈치 아래로 이동하다 소매 끝에 덧대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후 소매 바깥으로 나온 자락이 분리되어 원삼이나 활옷과 같은 여성의 예복 소매 끝에 덧대는 방식으로 변하여 손을 감추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는 윗사람에게 예를 갖추기 위함으로 『임하필기(林下筆記)』에 기록된 한삼의 제도에 의하면 존경하는 사람 앞에서 비천한 사람이 감히 손을 내놓을 수 없어 옷소매로 손을 가리기 위해 한삼이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파평윤씨(坡平尹氏, ?~1566) 묘〉에서 출토된 단삼(團衫) 유물을 보면 소매 끝에 한삼이 부착되었는데 이것으로 보아 16세기 전후로 소매 바깥으로 드러난 부분만 분리되어 수구에 부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용복으로써 한삼의 착용 역시 문헌과 회화 자료를 통해 15세기에 시작되었을 것으로 본다. 1493년 『악학궤범(樂學軌範)』 처용무 복식 도설에서 겉옷인 의(衣)의 한쪽 소매 길이는 이척 칠촌 오분(약 128.7cm)인 반면 속옷인 한삼의 한쪽 소매 길이는 사척 오촌(약 210.6cm)이다. 이는 겉옷 바깥으로 한삼 소매가 일척 칠촌 오분(약 82cm) 가량 드러나는 장수의 형태임을 말해준다.
이와 비슷한 시기의 《의령남씨가경완도(宜寧南氏傳家敬翫圖)》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에 마주보고 춤을 추는 여기(女妓) 두 명의 복식을 보면 손을 덮는 긴 소매가 달린 한삼 형태의 상의와 치마 위에 황색 무수의(無袖衣)를 착용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후 한삼은 소매 바깥으로 드러나는 부분만 분리되어 무용복 소매 끝에 연결되거나 손목에 따로 착용하는 방식으로 변하였다. 1744년 『갑자진연의궤(甲子進宴儀軌)』의 처용무 복식에 사용된 직물 소요량을 보면 한삼 다섯 건(件)에 백숙초(白熟綃) 이십이척이 소요된 것으로 보아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한삼이 저고리의 소매 끝에서 분리되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후 궁중연향 의궤의 복식도와 도병(圖屛)을 살펴보면 『원행을묘정리의궤(遠行乙卯整理儀軌)』부터 손목에 착용하는 형태의 오채한삼(五彩汗衫)이 나타나며, 『기축진찬의궤(己丑進饌儀軌)』에는 손목에 착용하는 형태와 무용복 소매 끝에 덧대는 형식이 동시에 나타난다.
○ 재질 및 재료
궁중연향에서 착용된 한삼의 대표적 직물은 화주(禾紬)와 초(梢)가 사용되었으며, 1892년 『임진진찬의궤(壬辰進饌儀軌)』 부터는 전반적으로 갑사(甲紗)가 사용되었다. 한삼의 색은 정재의 종류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었는데 처용무는 백숙초, 백화주(白禾紬), 백경광주(白輕光紬), 백면주(白綿紬) 등 백색 한삼이 사용되었으며, 가인전목단은 옥색화주, 옥색면주, 옥색린문갑사(玉色鱗紋甲紗), 옥색화문갑사(玉色花紋甲紗)로 옥색 한삼이 사용되었다. 항령무는 홍화주, 홍린문갑사, 홍화문갑사로 홍색 한삼이 사용되었으며, 춘앵전, 여령, 무동은 오색초, 오색갑사, 드물게는 칠색갑사로 색동 한삼이 사용되었다.
현행 한삼은 속옷으로 착용은 사라지고 예복과 무용복으로 착용된다. 이중 무용복 한삼은 연희의 종류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전승되고 있다. 가면극에서는 대부분 백색 한삼이 착용되며, 이전 자료는 확인할 수 없으나 1930년대부터 현재까지 무용복의 소매 끝에 덧대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특이점은 일부 가면극에서 소매와 한삼의 경계에 지퍼를 달거나 트임을 내어 손을 꺼낼 수 있도록 현대적 변형을 가미하였다는 것이다. 정재에서는 대부분 《임인진연도병(壬寅進宴圖屛)》에서 보이는 자적ㆍ백ㆍ적ㆍ황ㆍ청색 순서의 오색 한삼이 착용되며, 정재의 종류에 따라 일부 백색, 녹색, 홍색 한삼 등이 착용된다. 착용방식은 의궤 속 동기(童妓)와 무동의 복식에서 수구 끝에 한삼을 덧대는 방식은 전승되지 않고 손목에 따로 착용하는 방식만이 이어지고 있다.
송효상 묘 출토 저고리는 센티미터(cm) 기록을 척(尺)으로 환산하였으며, 악학궤범은 척으로 기록되어 이를 센티미터로 환산하였다. 또한, 여기에 사용된 척 단위는 일반적인 30.303cm가 아닌 조선시대 직물의 단위에 쓰이던 포백척(布帛尺)으로 한 척이 약 46.8cm로 계산되었다.
『사물기원』 『고려사』 『역어유해』 『조선왕조실록』 『석명』 『사례편람』 『고종명성후가례도감의궤』 『임하필기』 『악학궤범』 『갑자진연의궤』 『원행을묘정리의궤』 『기축진찬의궤』 『임진진찬의궤』 성보문화재연구원, 『해인사 금동비로자나불 복장유물의 연구』, 성보문화재연구원, 1997. 강순제, 『한국 복식 사전』, 민속원, 2015. 박가영, 「궁중정재복식에 사용된 한삼의 변천」, 『국악원논문집』 34, 2016. 김지영, 「조선시대 진연의궤류 정재복식에 나타난 직물 연구」, 단국대학교 일반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권준희ㆍ권영숙, 「조선시대 남성 분묘 출토 적삼 고찰」, 『복식』 59/3, 2009.
김초영(金草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