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기(簇只), 족긔, 죡기, 좃기
저고리 위에 덧입는 소매 없는 상의
조끼는 개화기 이후 마고자ㆍ두루마기와 함께 남자 한복의 일습을 이루는 상의로 장식적ㆍ실용적 목적으로 착용하였다. 조끼의 형태는 서양식 조끼와 같지만 전통적 봉제방법과 한복 옷감을 사용하여 한복화된 대표적인 복식 중의 하나이다.
조끼는 양복이 들어오면서 새로 등장한 옷이다. 한복에는 사용하지 않던 서구식 단추와 큰 주머니, 작은 주머니 등이 달려있다. 개항 이후 서양복의 유입과 함께 입게 된 조끼는 옷 자체에 주머니가 부착되어 있다는 편리함으로 인해 착용이 급속도로 증가했다. 중간 겉옷이어서 두루마기 대신 외출복으로도 입은 조끼는 남자복식의 경우 거의 필수복으로 자리 잡았다. 개화기에 남자 상의(上衣) 착장의 형태를 보면 저고리 위에 조끼를 입게 되기 전까지는 배자를 입었다. 배자는 소매가 없고 뒷길과 양 앞길로 되어있고 앞은 여미지 않고 마주 닿은 형태이다. 우리옷의 무수대금의(無袖對襟衣) 중의 하나인 배자는 조끼와 형태 및 용도에서 유사한 점이 있다. 영친왕(英親王, 1897~1970) 화문주 배자는 맞깃에 주머니와 단추가 달려있어 왕실에서의 배자가 조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한복에 조끼를 착장한 모습은 1883년 미국에 보빙사(報聘使)로 간 일행의 모습을 담은 엽서사진 중 갓에 전복과 두루마기를 입은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의 모습에서 처음 확인된다. 조끼의 어원에 대한 몇 가지 이견 중 개항 이후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 불리게 되었다는 의견이 가장 유력하며, 우리나라에서만 현재까지 한복조끼와 양복조끼를 모두 조끼라고 부르면서 사용하고 있다. 『궁중발기』중에는 1909년 『긔유칠월의나은의』, 1921년 『임ᄌᆞ십월합동호인의ᄎᆞᄇᆞᆯ긔』에 한글식 표기로 ‘족기’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조끼를 한자에 빌려서 족기(簇只)로 쓴 것으로 보인다. 『궁중발기』보다 2년 앞선 1907년 소학교용 교과서에 조끼를 착장한 학생의 모습이 실린 것을 보면 이때는 조끼의 착용이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조끼 등장 전에는 물건을 담는 주머니를 저고리 안쪽에 달았는데, 개화기에는 양복 재킷 호주머니를 본떠서 양쪽에 주머니를 고정해 달고 왼쪽 상단에 작은 주머니를 단 ‘개화조끼’가 등장하였다. 우리 전통 한복은 주머니가 없어서 불편하였으나, 서양복의 조끼가 도입되면서 저고리 위에 덧입어 윗옷의 매무새를 정리할 뿐만 아니라 작은 소지품을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조끼의 형태는 서양복의 조끼와 거의 비슷한 형태로 앞길에 총 세 개의 주머니가 달렸고, 은이나 호박 같은 재료의 단추를 달았다. 여성은 남성과 다른 형태의 조끼를 착용하였는데, 겨울에는 토끼털이나 동물의 털을 댄 것을 입기도 하였다. 아동용 조끼는 주로 남아용이 많고 돌복으로도 착용되었으며, 길복을 기원하는 무늬나 문자로 금박을 하여 장식하기도 하였다.
봄ㆍ가을에는 면(綿), 사(紗) 등의 춘추옷감으로 된 겹조끼, 여름에는 모시 홑조끼, 겨울에는 단(緞)으로 만든 겹조끼를 입고, 보통 저고리나 바지보다 화려한 색상으로 장식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조선재봉전서(朝鮮裁縫全書)』에서 ‘죠선 옷에 입는 죡기’의 제작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마름질법 조끼의 제작방법은 겉감에 심지를 대고 안감과 연결하여 겹으로 만들고, 앞길에 세 개의 입술주머니를 단 다음 두 겹 박기 후, 어깨선과 옆선에 끼워 넣어 네 겹 박기로 연결하여 창구멍으로 뒤집어 완성한다. 도련과 앞여밈단, 앞목둘레는 두 줄 상침하고 그 외는 한 줄 상침을 하며, 왼쪽 앞길 겉에 다섯 개의 단추를 단다.
조끼는 우리나라 고유의 복식에는 없었지만 실용성에 의해 새로 등장한 옷으로, 양복이 들어오면서 양복 조끼의 형태를 본떠 만들어 입게 되었다. 따라서 조끼에는 전통복식에 없는 주머니가 달려 있고, 서양식 단추가 복식에 더해지게 되었다. 조끼는 권장하지 않았는데도 금방 보급되었으며, 우리옷과 양복을 잘 절충한 개량 상의로서 실용적인 개화복식이라 할 수 있다. 개화복식의 개량을 말할 때 활동상의 편리함을 추구하기 위한 개량도 있다고 볼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개화사상과 함께 조선에 들어온 양복은 어떤 면에서는 실용적인 면을 갖추고 있었지만,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조선 사람들은 양복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동경으로 양복을 받아들였고 그런 내용이 조선옷의 개량에도 반영되었다. 즉 근대의 서양복 조끼는 폐쇄되었던 조선의 강제적 개국과 더불어 서양문물과 함께 소개되었다가 단추와 주머니의 합리성과 편리성으로 우리옷에 수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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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유리(馬兪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