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의(內衣), 내복(內服), 친의(襯衣), 츤의[襯衣], 단의(單衣), 설복(褻服)
땀받이용, 방한용, 내외용, 맵시용으로 겉옷 안에 입는 옷
속옷은 실용적 목적에서 착용되기 시작하여 점차 사회적 목적을 가지고 발전하였다. 이에 조선시대에 들어 여성의 속옷 종류가 매우 다양해졌으며, 특히 하의 속옷의 중첩 착용은 상박하후(上薄下厚)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개화기에 양복의 도입과 한복의 간소화로 인해 전통 속옷도 형태적 변화가 있었으나 1930년대부터 서양식 속옷으로 대체되었다.
속옷이 언제부터 착용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사계절이 뚜렷한 한반도의 특성상 땀 흡수나 체온 유지를 위해 안쪽에 겹쳐 입은 옷이 속옷으로 발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의하면 기원전 6세기 하희(夏姬)와 사통하던 진(陳)의 영공(靈公, ?~기원전 599), 공녕(孔寧), 의행부(儀行父)가 하희의 속옷[衵服]을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당시 남녀 모두 속옷을 착용하는 문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속옷 착용도 시기적으로 이와 크기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 여겨진다. 속옷에 관한 우리나라 문헌 기록은 통일신라시대 흥덕왕(興德王, ?~836)의 복식금제 목록을 통해 살필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색복조(色服條)」에 기록된 복식 명칭 중에는 ‘표의(表衣)’, ‘단의(短衣)’, ‘내의’와 ‘표상(表裳)’, ‘내상(內裳)’이 있다. 표의는 가장 바깥에 입는 두루마기이며, 단의를 저고리라 하였을 때, 내의는 속저고리라 할 수 있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표상은 겉치마이고 내상은 속치마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는 『고려도경(高麗圖經)』을 통해 속옷에 관한 다양한 기록을 살필 수 있다.
저의(紵衣)는 중단으로 왕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남녀 모두 입었으며, 저상(紵裳)은 저의와 함께 목욕할 때 사용한다고 하였다. 이는 기본 속옷으로 속저고리와 속치마가 존재하였음을 시사한다. 문릉관고(文綾寬袴)는 무늬가 있는 비단으로 만든 넓은 바지로 안을 생명주로 받쳐 옷이 몸에 붙지 않게 만든 것이며, 선군(旋裙)은 여덟 폭으로 된 치마로 겹침이 많을수록 좋은 것으로 여겨 일곱, 여덟 필(疋)의 옷감을 소모하기도 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대슘치마와 무지기치마 같이 겉치마를 부풀리기 위한 맵시용 속옷으로 볼 수 있다. 이 외 유물로는 보광사, 1302년 아미타불, 1326년 해인사의 복장물로 발견된 적삼이 있다. 적삼은 모시 또는 견으로 제작되었으며 홑겹에 길이가 짧아 속옷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는 남자보다 여자의 속옷이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이는 성리학적 이념에 따라 남녀가 내외(內外)할 것을 강조하였는데 여자에서 더 폐쇄적인 생활이 강요된 사회적 현상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여자의 정숙을 강조하는 윤리관은 속옷 중 하의의 발달에 영향을 주었으며, 하의의 중첩 착용은 상박하후로 표현되었다. 1882년(고종 19) 동궁 가례에 사용된 의대발기(衣襨發記)를 살펴보면 특이하게도 별도의 속옷발기가 마련되어 있는데 재간택부터 가례까지 제작된 세자빈의 속옷으로 약 오천여 개에 달한다. 이 중 팔 할 이상이 하의로 구성되어있으며, 특히 속바지와 단속곳은 소재나 누비 종류에 따라 다양하게 제작되어 하의의 착용 비중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상의가 극도로 작아지는데 『성호사설(星湖僿說)』 「부인복(婦人服)」에 의하면 부인의 의복 소매가 좁고 옷자락이 짧아지는 것은 요사한 모습으로 남에게 가는 허리를 자랑해 보이려고 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사회적 통념상 여성의 노출이 쉽게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슴을 노출하고자 하는 여성의 미적 욕구는 성리학적 윤리관에 부딪혀 가리개용 허리띠라는 새로운 속옷의 착용으로 표출되었다.
개화기는 양복의 도입과 한복의 간소화로 인해 겉옷이 변하자 속옷에도 차츰 변화가 발생하였다. 1910년대는 이화학당의 교사 알테아 재닛 월터(Althea Jeanette Walter, 1885~1977)와 올리브 포셋 파이(Olive Fawcett Pye, 1888~1960)에 의해 등장한 어깨허리가 속속곳, 속바지, 단속곳에도 활용되었다. 1920년대는 셔츠와 팬티가 들어오며 팬티 위에 속바지와 단속곳을 입거나, 속바지와 단속곳 대신 일본식 속옷인 사루마다(さるまた)라고 하는 무명으로 만든 짧은 사각형 반바지를 착용하였다. 남자 속옷 역시 셔츠와 팬티의 도입 이후 상의는 러닝셔츠나 반소매 셔츠로 대체되었으며, 하의는 팬티나 사루마다로 일원화되었다. 이후 1930년대부터는 전통 속옷이 자취를 감췄고 서양식 속옷으로 대체되었다. 현재 전통 속옷은 한복에도 갖춰 입지 않는 옷이 되었으며, 여성이 한복을 착용할 때는 일부 변형된 속저고리, 속바지, 속치마 등을 착용한다. 특히 속바지는 일본식 일바지인 몸뻬(もんぺ)와 혼용되어 통이 넓은 바짓가랑이 두 개를 붙인 후 허리와 발목에 고무줄을 넣은 형태로 변형되었다.
○ 종류 및 형태
조선시대 남자 속옷은 상의인 속적삼(-赤衫)과 하의인 속고의(-袴衣)가 있다. 그 형태는 겉옷으로 착용하는 저고리, 바지와 크게 차이가 없으나 안에 입는 옷이므로 홑겹으로 제작하며, 치수가 약간 작고 여밈이 단추나 짧은 고름으로 간단하다.
여자 속옷은 매우 다양하여 상의와 하의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상의는 가리개용 허리띠, 속적삼, 속저고리가 있다. 가리개용 허리띠는 치마를 입기 전 맨살에 착용하는데 겨드랑이 밑으로 바짝 치켜 올려 가슴을 납작하게 졸라매어 살이 보이지 않도록 한다. 저고리 길이는 중기부터 짧아지기 시작하여 19세기에는 소매와 도련이 일직선을 이루게 되었고, 이에 저고리나 치마말기가 가슴을 가려주지 못하게 되자 저고리와 치마 사이에 폭이 일 척(尺) 정도 되는 가리개용 허리띠나 졸잇말(가슴을 졸라매는 베로 만든 끈)을 매어 주는 새로운 풍속이 생겨났다. 속적삼과 속저고리의 형태는 저고리와 같으나 치수가 저고리보다 작고 동정이 없다. 속적삼은 홑으로 제작하며 단추를 달고, 속저고리는 겹으로 제작하며 짧은 고름을 단다는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사대부가나 궁중에서는 속적삼, 속저고리, 저고리를 착용하는데 이를 삼작 저고리 또는 저고리 삼작이라 한다.
여자 속옷으로 하의는 다리속곳, 속속곳, 속바지, 단속곳, 너른바지, 무지기치마, 대슘치마 등이 있다. 다리속곳은 내곤(內褌)이라고도 하며, 하의 속옷 중 가장 안쪽에 착용하기 때문에 자주 빨아 입을 수 있게 작게 만들었다. 다리속곳이라는 용어는 조선 후기에 생겨났으나 이러한 형태의 기원은 〈안악 3호분〉과 〈무용총의 수박희(手搏戲)〉 속 인물이 착용한 의복에서 찾을 수 있다.
속속곳과 단속곳은 거의 같은 형태이나 속속곳의 크기가 단속곳보다 약간 작다. 앞뒤와 밑이 막혀 있으며, 바짓부리는 넓고 옆으로 끈을 내어 여밈을 만든다. 속속곳은 전후에 삼각형 밑[襠]이 있으며, 단속곳은 삼각형 또는 사각형 밑이 있다. 서민 부녀자들은 단속곳 위에 치마를 착용하였기 때문에 겉에 착용하는 속곳이라는 의미로 겉속곳이라고도 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에는 속옷 자락이 보이도록 치마를 착용하였기 때문에 속바지와 단속곳을 만들 때 겉옷만큼 고급옷감으로 만들거나 치마 밖으로 보이는 바짓부리만 고급옷감을 덧대기도 하였다. 1882년(고종 19) 동궁 가례에 마련된 세자빈의 속옷을 살펴보면 다른 속옷에 비해 속바지와 단속곳이 소재나 누비 종류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속바지는 속속곳과 단속곳 사이에 착용하는 속옷으로 속속곳이나 단속곳과는 달리 바지통이 곡선을 이루며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이다. 홑 또는 겹으로 만드는데 홑으로 만든 것은 고쟁이라고 하며, 겹을 만든 것은 봄, 가을용으로 착용하거나 겨울에는 솜을 두어 누벼 입기도 하였다. 여밈은 속속곳과 반대 방향이나 뒤쪽으로 내어 만드는데 이는 한쪽으로 여밈이 겹쳐 불편함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살창고쟁이는 경상북도 안동지방에서 착용하는 속바지로 말기 아래 타원형의 구멍을 내어 허리 주변으로 통풍이 잘되도록 만든다. 친정에서는 시집가는 딸의 혼수품으로 살창고쟁이를 챙겨 보내는데 이는 신부의 허물이 고쟁이 구멍으로 새어나가 시집살이가 수월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시댁에서 예의를 차리기 위해 여러 벌의 속옷을 입어야 하는 딸의 부담감을 줄여주기 위한 부모의 마음을 담은 것이다.
너른바지는 단속곳의 일종으로 조선 후기에 주로 궁중과 사대부가에서 성장(盛裝)할 때 하체를 풍성하게 보이도록 단속곳 위에 착용하였다. 바지폭은 단속곳보다 넓게 하여 겹으로 만들며 앞은 막히고 뒤는 트여있다. 무지기치마는 열두 폭으로 만들며 하나의 허리 말기에 길이가 다른 여러 겹의 치마를 달아 엉덩이를 부풀리고 외형에 부피감을 더하는데 이러한 구성방법은 많은 직물이 필요하므로 상류계층에서 주로 착용되었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의하면 부인들이 짧은 흰 치마를 입고 겉치마를 입는데 무족오합, 칠합 등으로 불린다고 하였다. 무족(無足)이란 무지기를 음차(音借)로 표현한 것으로 무족상, 무죽상(無竹裳) 등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무지기란 명칭은 색과 길이가 다른 여러 겹이 치마를 짧은 것부터 5~10cm 간격으로 층을 이루며 달아내기 때문에 완성된 전체 모양이 무지개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시대 선군에서 비롯된 것으로 달아내는 층의 갯수에 따라 삼합ㆍ오합ㆍ칠합무지기로 구분하여 부른다. 대슘치마 역시 상류계층에서 착용한 맵시용 속옷으로 열두 폭으로 만든다. 밑단에는 너비 4cm 정도의 창호지를 모시에 싸서 만든 백비를 붙여 치맛단이 자연스럽게 퍼지도록 한다.
○재질 및 재료
속옷의 소재는 종류와 신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나 대부분은 계절에 따라 다르게 사용된다. 여름용 속옷은 통풍과 흡수성을 고려하여 모시나 무명을 홑으로 제작하며, 겨울용 속옷은 보온을 위해 명주 사이에 솜을 두어 누비거나 흡수성을 높이기 위해 솜 대신 무명을 넣고 누비기도 한다. 용도에 따라 소재나 색이 정해지는 속옷도 있는데 다리속곳은 세탁의 용이성과 쾌적성을 위해 무명을 홑으로 제작하며, 무지기치마와 대슘치마는 맵시를 살리기 위해 형태 고정력이 좋은 모시로 제작한다. 또한, 속저고리는 대부분 분홍색 명주를 사용하였다.
○제작방법
『조선재봉전서(朝鮮裁縫全書)』에서 마름질법과 함께 제시하고 있는 옥양목으로 단속곳 제작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옥양목 단속곳은 두 가지 방법으로 마르지만 이 그림과 같은 방법(폭이 넓은 직물에 마르는 법)은 사폭에다가 밑을 달지만 가래바대를 덧댄 후 밑을 단다. (솔기는) 누그러뜨려서 밑쪽으로 꺾고 안쪽에 안감으로 된 밑을 덧대어 한쪽은 시침질하고 한쪽은 풀로 붙인다. 솔기는 누그러뜨려 마루폭 쪽으로 꺾은 다음 인두로 다리고 아귀를 만든 후 주름을 네 개를 만들어 밑주름을 잡아서 허리에 단다. 이 제작방법은 세부적인 설명이 생략되어 있으나 단속곳을 홑으로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밑을 이중으로 만드는 설명과 마름질법, 치수 등을 제시하고 있다.
전통 속옷은 오랫동안 전통 복식의 한 부분으로 전승ㆍ발전되었으나 개화기 이후 서양 속옷이 도입되며 오늘날에는 착용은 단절되었고, 현재는 가면극에서 일부 속옷의 착용을 살필 수 있다. 봉산ㆍ은율ㆍ강령탈춤, 가산ㆍ통영ㆍ고성오광대, 수영ㆍ동래야류의 할미는 백색 또는 소색의 속바지를 치마 아래 착용하며, 양주별산대놀이 왜장녀는 하의로 분홍색 계열의 속바지와 단속곳을 착용한다. 이 중 통영오광대 할미의 속바지 형태를 보면 마루폭과 사폭이 나뉘어 있으며, 가랑이에 삼각형의 당 네 개가 앞뒤 좌우로 붙어있고 허리에는 고무줄이 달려있다. 이러한 형태의 속바지는 광복 이후 변형된 것으로 오늘날 착용하고 있는 일바지 형태로 변형된 것과는 다르다. 다른 가면극의 속바지 형태는 위에 착용한 치마나 단속곳 때문에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으나 바짓부리에 고무줄을 넣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일바지 형태로 변형된 속바지와는 다른 것으로 파악된다. 양주별산대놀이 왜장녀의 단속곳은 바지통이 넓고 허리에 굵은 주름이 있으며, 가랑이에 붙은 사각형 밑이 트여있어 조선 전기 개당고(開襠袴) 또는 속바지의 형태적 특징을 보인다.
이같이 속바지와 단속곳을 포함한 가면극 복식의 착용은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이 성립ㆍ전파된 조선 후기와 시대적 배경에서 많은 오류가 있으므로 수정 및 보완이 필요하다.
『고려도경』 『삼국사기』 『성호사설』 『임오쳔만셰 가례시 빈궁마마 의ᄃᆡᄇᆞᆯ긔 침방』 『임오쳔만셰 동궁마마 가례시 빈궁마누라 의긔』 『임오쳔만셰 동궁마마 가례시 빈궁마누라 의긔 삼간시』 『임오쳔만셰 동궁마마 가례시 빈궁마누라의ᄃᆡ 침방의 몬져ᄒᆞ라주오신 ᄇᆞᆯ긔』 『임오천만세 동궁마마 가례시 빈궁마마 의대건기 단리의 봉지 요대(壬午千萬世 東宮媽媽 嘉禮時 嬪宮媽媽 衣襨件記 單裏衣 奉只 腰帶)』 『임오쳔만셰 동궁마마 가례시 간후보오실 빈궁마누라 의긔』 『조선재봉전서』 『청장관전서』 『춘추좌씨전』 김초영, 「통영오광대 복식에 관한 연구」, 전남대학교 일반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 염순정, 「조선후기 여성 속옷을 응용한 전통 의상디자인」, 전남대학교 일반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9. 유수경, 「한국 여성양장의 변천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89. 윤현진ㆍ조우현, 「조선후기 여자속옷에 관한 연구」, 『한국의상디자인학회지』 6/3, 2004.
김초영(金草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