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袴)
두 다리를 감싸는 가랑이가 있는 하의
바지는 동북아시아 유목민이 말을 타고 이동하기에 편리하도록 구성된 아래옷이다. 삼국시대에는 남녀가 모두 겉옷으로 착용하였고 바지통이 좁은 세고(細袴)와 넓은 관고(寬袴)로 나뉜다. 세고는 바지통이 좁아 활동이 불편하지 않도록 두 바짓가랑이 사이에 당(襠)을 달아 여유를 만들었고 이를 궁고(窮袴)라고 하였다. 세고는 신분이 낮은 사람, 관고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 입었다. 고려시대 이후 바지의 형태는 큰 변화가 없었으나 신분에 따라 바지의 재료, 문양, 바지통의 너비가 달랐다. 여자의 바지는 속옷화 되었다. 다만 말군(襪裙)은 상류층 여성이 말을 탈 때 입었던 앞뒤가 트인 바지로 겉옷 바지로 착용되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에는 남자 바지가 사폭바지로 정착되었다. 큰사폭, 작은사폭, 마루폭, 허리로 구성된 바지는 천을 합리적으로 활용하여 좌식생활에 편리하게 구성되었다. 여자 속옷 바지는 구성이 더욱 복잡해졌다. 속속곳, 바지, 단속곳을 기본으로 입었고 예장을 할 때는 너른바지를 더했다.
한민족의 바지는 동북아시아 유목민이 공통적으로 입었던 북방 알타이(Altay) 계통의 홀태바지이다. 양다리를 감싸는 수준의 바지는 엉덩이를 완전히 가리지 못하고 상의로 덮어 입었다. 바지 형태는 바지통과 가랑이가 좁아 활동적이며 허리와 바짓부리를 끈으로 묶었다. 바지의 연원은 문헌에서 단편적으로 살필 수 있다. 『주서(周書)』, 『수서(隋書)』, 『북사(北史)』에는 통이 넓은 바지인 대구고(大口袴)라는 명칭이 나타나고, 『양서(梁書)』, 『남사(南事)』에는 바지 고(袴)를 백제에서 곤(褌), 신라에서 가반(柯半)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바지의 색상, 재료에 따라 청금고(靑錦袴), 적고(赤袴), 고(袴) 등으로 적혀 있다. 한민족의 바지 유래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유물은 몽골의 〈노인 울라(Noin Ula) 고분〉에서 발굴된 기원전 1세기의 바지이다. 노인 울라 바지 형태는 동북아시아 알타이 민족이 입던 전형이며 바지통이 좁고 당이 달린 형태이다.
삼국시대 바지는 활동성과 보온성이 뛰어나 남녀가 모두 착용하였다. 바지는 품이 좁은 세고와 통이 넓은 관고로 나눌 수 있다. 세고는 북방 유목민이 추위를 이기고 말타기에 적합한 형태이다. 바지통이 좁아 활동이 불편하지 않도록 바짓가랑이에 당을 달아 여유를 주면서 밑이 막혀 있는 바지를 궁고라고 한다. 〈노인 울라〉에서 출토된 바지도 당이 달린 궁고이다.
밑이 터진 바지는 개당고(開襠袴)라고 한다. 관고는 통이 넓은 바지로 신분이 높은 사람이 입었다. 곡예사와 같이 신분이 낮은 사람이 입은 무릎길이의 짧은 바지도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확인된다. 삼국시대에는 여자 바지 착용도 많았는데 겉옷으로 입거나 치마 밑에 받쳐 입었다. 바짓부리에는 다른 색상의 천을 덧대어 장식효과를 주면서 바짓부리가 쉽게 헤지지 않게 하였다.
고려시대 바지는 벽화, 불화, 초상화에서 당시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왕 이하 신분이 높은 계층은 관고를 입었고 일반백성은 세고를 착용했다. 신분에 따라 재질과 문양도 달랐다. 고려시대 이후 여자 바지는 속옷으로만 착용되었다. 여자 바지는 문릉(文綾)처럼 고급 소재로 겉감을 만들고 안감은 생초(生綃)로 덧댄 관고를 입었다. 주로 흰색 바지를 치마 아래 입는 구성이다. 겉옷 바지는 선군(旋裙)이 있었는데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의하면, 선군은 부녀자가 말을 탈 때 입었던 앞뒤가 트인 바지이다.
조선시대 남자 바지는 임진왜란이 있었던 1600년대를 전후하여 사폭바지 형태로 확연하게 달라졌다. 남자 바지가 사폭으로 구성되면서 엉덩이 부위는 넉넉하고 바짓부리는 줄어들었다. 사폭바지는 조선후기에 큰사폭과 작은사폭이 분리되었다. 따라서 바지는 큰사폭, 작은사폭, 마루폭, 허리로 구성된다. 사폭은 바지 재단에 있어 천을 합리적으로 활용하여 활동하기 편리하게 하였다. 바짓부리에는 대님 외에도 행전을 둘렀다.
조선시대 여자 바지는 속옷으로 착용되었다. 예외적으로 겉옷 바지는 말을 탈 때 덧입어서 옷을 보호해 주고 치맛자락이나 겉옷을 정리해 주는 말군(襪裙)이 있었다. 고려시대 선군과 연관이 있다. 말군에 대한 기록은 『태종실록(太宗實錄)』에 하인들은 말군 착용을 금한다는 내용과 양반집 부인은 말을 탈 때 반드시 말군을 착용해야 한다고 하여 상류층에서 착용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풍속화를 보면 말을 탄 여성이 말군을 저고리 위까지 올려 입은 모습이 보인다.
내의류로 착용된 바지는 가장 안에 입는 순서로 속속곳, 바지, 단속곳이 있고 예장용으로 너른바지가 있다. 속속곳은 직접 살에 닿는 부분이 많아 옥양목, 무명, 광목 등 세탁에 용이한 소재를 사용하였고 부드러운 촉감의 명주로도 만들었다. 바지는 바짓부리가 좁아지고 밑이 트여 있다. 무더운 여름 모시나 삼베로 홑바지를 만들어 고쟁이, 살창고쟁이라고도 한다.
단속곳은 치마 바로 아래 입는 속옷으로 치마 밖으로 드러날 수 있어 비교적 좋은 소재를 사용하였다. 바지통이 넓고 아래가 막혀 있다. 너른바지는 예복을 입을 때 치마가 풍성하게 퍼지도록 받쳐 입는 속옷이다. 바짓부리에 빳빳한 종이심이나 천을 덧대거나 솜누비를 하여 형태를 유지하고 보온의 역할도 하였다.
바지는 한반도의 추운 기후를 극복하고 활동성을 겸비한 아래옷으로 남녀 모두가 착용한 전통복식이다. 형태상 상하귀천의 차이가 없었고 바지의 재질, 바지통의 너비에 따라 신분을 구별하였다. 초기 바지는 바지통이 좁은 세고였으나 점차 활동성을 고려해 당을 부착한 궁고, 바지통이 넓은 관고로 발전하였다. 바짓부리에는 선단을 달아 장식효과를 주었고 천이 헤지지 않도록 구성상 보완을 한 특징이 있다. 한민족의 생활양식을 담아 내며 발전한 바지는 임진왜란 이후 복식제도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사폭바지로 전환기적 변화를 하였다. 좌식생활에 적합하게 통이 넓은 바지를 입으면서도 활동에 불편함이 없도록 바짓부리가 좁아지는 사폭바지 구조를 완성한 것이다. 사폭바지는 큰사폭과 작은사폭의 비대칭 구조로, 바짓가랑이 사이의 옷감 방향을 신축성이 높은 바이어스(Bias) 방향으로 배치하여 평면구성의 한계를 극복한 창의적 구성이 특징이다. 남자 사폭바지는 생활양식에 적합한 고유의 바지 구성을 고안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여자 바지는 말을 탈 때 입는 말군을 제외하고 속옷으로 착용되었다. 말군은 왕실 여성, 여관, 사대부가 부인이 착용한 마상의(馬上衣)이다. 전통사회 복식제도는 여성의 활동에 배타적이었지만 여자 바지를 제한된 외부활동에 실용적으로 활용했다. 여자 속옷인 속속곳, 바지, 단속곳, 너른바지 등은 여성의 하체를 보호하면서도 치마를 풍성하게 하는 속옷으로 발전하였다. 치마를 겉옷으로 착용하면서 주는 활동의 불편함은 바지 착용으로 보완하였고, 하의를 풍성하게 하는 것을 아름답게 여겼던 상박하후(上薄下厚)의 시대적 미감은 다양한 속옷 바지를 발달시켰다. 한국복식 바지는 좌식생활을 고려한 남자 바지의 효율적인 옷감 배치, 여성의 풍만한 하체에 대한 당시대의 미감, 활동성을 높이고 추위에 견딜 수 있도록 한 구조 등 한민족의 생활양식이 반영된 복식문화로서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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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린(任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