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파답교(踏橋)놀이
서울특별시 송파구 일원에서 전승된 세시풍속으로 액운을 방지하고 다리의 병을 예방하기 위한 민속놀이
송파다리밟기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일대에서 전승된 세시풍속으로 한 해의 액운을 막고 다리의 병을 예방하기 위한 민속놀이이다. 〈다리밟기〉는 전국 각지에서 정월 대보름 전후로 행해졌는데, 밤새 〈다리밟기〉를 할 수 있도록 야간 통행 금지를 완화하는 등 관에서도 중요시했던 행사였다. 송파다리밟기는 다리를 밟는 행위와 함께 노래와 춤, 악기 연주가 가미된 놀이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 특징이다. 1989년에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3호 송파다리밟기로 지정되어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1614년 이수광(李睟光)이 지은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다리밟기〉를 ‘답교지희(踏橋之戱)’라 하여 고려시대부터 이어온 민속놀이라 소개하였다. 〈다리밟기〉가 행해질 때면 밤늦도록 사대부의 여인들이 나란히 늘어섰으며, 매우 풍성하게 모여 법관(法官)도 이를 금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경도잡지(京都雜志)』,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다리밟기〉는 서울 중앙의 종로를 중심으로 대소광통교(大小廣通橋)와 수표교(水標橋) 위에서 벌어졌고, 상하 계급의 구별 없이 모두 나와 그 행렬이 인해인성(人海人城)을 이루었다고 한다. 여기에 생황과 소를 불고 북을 울리는 장관이 펼쳐졌는데, 이를 통해 당시의 〈다리밟기〉가 요란스럽고 호화스러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송파다리밟기의 문헌기록은 1941년 무라야마 지준[村山 智順, 1891~1968]이 쓴 『조선의 향토오락[朝鮮の鄕土娛樂]』에서 확인된다. 송파다리밟기는 1900년대 초까지 활발히 행해졌는데, 『조선의 향토오락』에서는 당시 송파다리밟기의 시기, 놀이방법과 형태 등이 개략적으로 다뤄졌다. 1925년 서울에 대홍수가 나면서 송파 지역도 막대한 수해를 입게 됐는데, 이로 인해 송파다리밟기도 전승에 큰 타격을 입는다. 송파다리밟기는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전승되지 못하다가, 1950년대 후반부터 다시 연행하고자 하는 노력이 나타났으며, 1970년 문화유산지정을 위한 조사가 이뤄지며 전승 기반을 다시 찾게 됐다. 송파다리밟기는 1989년 8월 16일 서울특별시 시도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송파다리밟기 보존회를 중심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리밟기〉는 인간의 다리로 강과 강 사이의 다리를 건넘으로써 하체의 건강을 도모한다는 일종의 유감주술(類感呪術)라 할 수 있다. 다른 지역의 〈다리밟기〉와 비교하여 보면, 송파다리밟기는 다리를 밟는 행위와 함께 노래와 춤, 악기 연주가 가미된 민속놀이의 성격이 짙게 드러난다. 〈다리밟기〉는 전국 각지에서 정월 대보름 전후로 행해졌는데, 송파다리밟기 역시 정월 대보름 저녁에 진행한다. 세시풍속에서 비롯된 송파다리밟기는 이후 놀이화ㆍ공연화를 거치면서 다리라는 장소적 제약에서 벗어나게 됐으며, 마을사람들과 연희자들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적절한 공간에서 행해졌다. 현행 송파다리밟기는 송파산대놀이가 전승되는 서울놀이마당에서 진행되는데, 마당 안에 가교(假橋)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다양한 형태의 놀이를 벌인다. 세시풍속인 송파다리밟기가 언제부터 놀이화, 공연화의 양상을 갖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일제강점기 무라야마 지준의 『조선의 향토오락』에는 당시 경기도 광주였던 송파지역의 〈다리밟기〉를 소개하고 있는데, 무동 태운 농악대가 행진하고 다리 위와 그 부근에서 〈다리밟기〉가 진행되자 마을 사람들이 함께 춤을 추며 놀았다고 한다. 따라서 송파다리밟기의 놀이화는 1900년대 초 이전에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1970년 무렵에는 송파다리밟기의 문화유산지정을 위한 조사가 진행됐는데, 이때 생존한 전승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삼정승 육판서가 다리만 밟고 끝낼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여흥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가무별감(歌舞別監)을 시키어 답교를 한 뒤에 놀기 시작하게” 됐다고 한다. 또한 당시 조사보고서에는 1882년 성동구에 있는 살곶이다리에서 열린 답교놀이 경연대회에 송파다리밟기의 전승자들이 참여하여 상을 받았다는 증언도 함께 실려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송파다리밟기는 이미 1800년대 후반에 세시풍속을 넘어선 민속예술 및 공연화의 양상을 보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송파다리밟기가 공연화의 양상을 지닐 수 있었던 배경에는 ‘송파장’이라는 경제적 배경과 송파산대놀이라는 문화예술적 배경이 큰 역할을 했다. 송파장은 1925년 대홍수가 일어나기 전 270여 호의 객주집이 성행했던 시장이었으며, 송파의 상인들은 시장 활성화를 위해 산대놀이, 씨름, 그네뛰기, 소리판, 땅재주, 줄타기 등 다양한 민속놀이를 벌였다. 1900년대 초 《송파산대놀이》의 연희자로 활동했던 정한규, 조영완, 허윤은 송파다리밟기도 함께 연행했는데, 기예를 가진 연희자들 참여로 인해 연희성이 강화될 수 있었다. 송파다리밟기는 《송파산대놀이》뿐만 아니라 〈선소리산타령〉과도 관련이 깊다. 송파다리밟기가 전승됐던 송파ㆍ몽촌ㆍ바람드리(풍납)ㆍ돌마리(석촌)에는 열두 곳의 움이 있었는데, 송파다리밟기에 참여했던 연희자들은 겨울철 이곳에서 엽초 담배를 썰었다. 움에 담배를 써는 칼이 있어서 이 열두 곳의 움을 ‘열두칼판’이라고 불렀다. 연희자들은 겨울철 석 달 동안 움속에서 담배를 썰며 잡담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작업을 했는데, 이때 부른 노래가 바로 〈선소리산타령〉이었으며, 이를 통해 송파다리밟기의 연희자 대부분이 선소리산타령을 부를 수 있었다. 그중에는 전문적인 잡가 소리꾼도 있었다고 한다. 《송파산대놀이》와 〈선소리산타령〉의 영향 관계는 1970년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에도 나타나며, 현재 송파다리밟기를 전승하는 송파다리밟기 보존회의 구성도 《송파산대놀이》와 〈선소리산타령〉의 예능을 모두 보유한 연희자가 다수 참여하고 있다.
송파다리밟기의 절차는 〈길놀이〉-〈마당춤놀이〉-〈선소리〉-〈다리밟기〉-〈고사 및 비나리〉-〈달집태우기〉 순으로 진행된다. 1970년 작성된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에는 길놀이 후 이어지는 〈마당춤놀이〉와 〈선소리〉의 진행도표를 26개로 정리하고 있는데, 세부적인 형태는 해마다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길놀이〉의 행렬순서는 송파다리밟기의 기(旗)와 영기(令旗)를 앞세우고, 곤나쟁이ㆍ등롱ㆍ악사ㆍ집사ㆍ별감ㆍ상좌무동ㆍ소무무동ㆍ상좌ㆍ소무ㆍ선소리ㆍ양반ㆍ노장ㆍ왜장녀의 등장인물 순으로 풍물 장단에 맞춰 행진한다. 〈길놀이〉를 한 후, 다리가 있는 곳에 도착하면 기수(旗手)와 악사, 선소리꾼이 가장자리로 물러난다. 나머지 연희자들은 굿거리장단ㆍ타령장단ㆍ자진모리장단 등 다양한 장단에 맞춰 여러 형태의 〈마당춤놀이〉를 춘다.
〈마당춤놀이〉의 흥취가 절정에 이를 때 굿거리장단이 연주되면 노장ㆍ왜장녀ㆍ양반 등은 원 바깥으로 나가고, 선소리패는 중앙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선소리산타령〉을 부른다. 선소리패가 가로 일렬로 서서 〈앞산타령〉을 부르면, 상좌무동과 소무무동이 그 앞으로 나와 원무를 추고 다시 물러간다. 이어 상좌와 소무가 나와 원무를 추고 물러간다. 선소리패가 〈뒷산타령〉을 부르면 집사와 별감이 나와 맞춤을 추고 물러가고, 이어 등롱과 곤나쟁이가 나와 춤을 추고 들어간다. 〈자진산타령〉이 나오면 양반ㆍ노장ㆍ왜장녀 등이 나와 자유롭게 춤을 춘다. 〈선소리산타령〉이 끝나면 다시 행렬 대형을 갖추고 다리를 밟을 준비를 한다. 이때부터는 〈다리밟기〉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행렬을 뒤따르며, 한 해 동안의 다리 건강과 무병을 기원하며 다리를 밟는다. 각자 자신의 연령대로 왕복하며 다리를 밟는데, 다리 가운데 멈춰서서 절이나 기도를 하고 무병을 기원하며 다리 밑에서 ‘고시레’를 하기도 한다. 또한 정월 대보름인 만큼 달을 향해 양손을 모아 절을 하며 각자의 소원을 빈다.
송파다리밟기의 배역은 송파다리밟기 기수 1명, 영기 2명, 상좌무동 1명과 무동 4명, 무동을 태우는 어른 5명, 소무 4명, 상좌 1명, 왜장녀 1명, 양반 1명, 나쟁이 2명, 집사 2명, 별감 2명, 선소리 4명, 제금 1명, 장구 1명, 호적 1명 등 대략 30여 명이 참여한다. 인원은 고정적이지 않으며, 상황에 따라 조금씩 변동되기도 한다. 배역의 이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송파다리밟기에는 《송파산대놀이》의 연희자가 다수 참여하고 있으며, 〈마당춤놀이〉에서는 타령장단에 맞춰 산대놀이의 춤사위를 그대로 추기도 한다. 선소리패의 경우 문화재지정 조사보고서에는 4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열두칼판’에 대한 유래담을 고려할 때 그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참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연행되는 송파다리밟기에는 10여 명의 소리꾼이 참여하고 있으며, 풍성한 구성으로 〈선소리산타령〉을 부른다.
송파다리밟기는 〈다리밟기〉라는 세시풍속에 바탕을 두면서 점차 놀이화ㆍ공연화하며 지역의 민속예술로 발달했다. 정월 대보름에 한 해 동안의 신체 건강을 기원하는 풍습과 놀이와 춤, 민요 등이 포함되는 종합예술적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또한 송파다리밟기의 참여자들을 보면 집사ㆍ별감ㆍ양반 등 상류층과 무동ㆍ상좌ㆍ소무ㆍ왜장녀ㆍ악사ㆍ소리꾼 등 예인집단, 그리고 마을의 양민들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진 축제였다는 점에서 상당한 문화적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송파다리밟기: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1989)
김천흥ㆍ최현, 「답교놀이」,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84, 문화재관리국, 1971. 무라야마 지쥰 지음, 박전열 역, 『조선의 향토오락』, 집문당, 1992. 이병옥, 『송파산대놀이 연구』, 집문당, 1982. 이효녕, 「송파산대놀이의 전승과 변모」,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1. 정명섭 외, 「송파다리밟기소리」, 『한국민속문학사전 : 민요』, 국립민속박물관, 2013.
이효녕(李皢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