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첨지 인형극 놀이, 홍동지놀이
남사당패 〈꼭두각시놀음〉의 영향으로 서산 음암면 탑곡4리 고양마을 사람들에 의해 1920년대부터 연행되었던 인형극
남사당패 〈꼭두각시놀음〉은 〈박첨지놀이〉, 〈홍동지놀이〉라고도 불린다. 1920년대에 남사당패의 출신으로 추정되는 유영춘이라는 인물로부터 고양마을 출신 주연산이 이를 배우게 된다. 그리고 이를 고향으로 돌아와 마을사람들과 함께 추석 즈음에 놀았던 것이 서산 박첨지놀이의 유래이다. 그러므로 〈박첨지놀이〉의 내용은 남사당패 〈꼭두각시놀음〉과 유사하다. 하지만 연행주체가 일반 주민이기에 인형의 제작과 조종, 연희의 전문성은 남사당의 꼭두각시놀음과 비교할 수는 없다. 다만 부분적으로 내용의 독자성, 주머니 인형 형태의 특이함, 서산 지역어의 활용 등에서 차별성을 갖는다. 문화의 전파와 그리고 토착화라는 관점에서 흥미로운 대상이다.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탑곡4리 고양마을에서 〈박첨지놀이〉가 시작된 시기는 1920-30년대로 알려졌다. 이것이 기록된 문서는 없으며 전승자 김동익(1929~2018)의 증언에 의한 것이다. 그는 1950년대 중반부터 이 놀이를 전수하였다고 한다. 그에게 이 놀이를 알려준 이가 주연산(1903~1993)이다. 주연산은 고양마을 출신으로 한때 서산 운산면 신창리에 거주하며 3년 정도 강원도 출신의 유영춘에게서 이 놀이를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 유영춘이라는 인물은 강원도 출신이라는 것 외에는 정보가 없다. 다만 서산박첨지놀이의 내용이 남사당패 〈꼭두각시놀음〉과 유사하므로 그 방면에서 활동하던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1920~30년대 고양마을 출신의 주연산이 남사당패 출신으로 추측되는 유영춘에게서 놀이를 배워와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 것이 서산박첨지놀이라고 하겠다. 이후 김동익(1929~2018) 등에게 전승되었고, 현재는 주연산의 외손자인 이태수(1966~)가 전승교육사를 맡아 이어오고 있다. 〈박첨지놀이〉는 1년에 한차례 추석 즈음에 고양마을 사람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이 외부로 알려지게 된 것은 1989년의 일이었다. KBS의 ‘사랑방중계’에 방영이 되고 이어서, 서울 안델센인형극회 초청공연, 서산문화원 초청공연 등을 하게 되었다. 바로 이 시기 연구자 서연호에 의해서 학계에도 소개되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 역사적 변천 과정
서산박첨지놀이의 연헹주체는 서산 음암면 탑곡4리 고양마을 사람들이다. 1920-30년대부터 주연산의 주도로 연행된 것과 1950년대 이후 김동익의 주도로 연행된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주연산이 어떻게 연행하였는지 그 기록들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김동익 또한 주연산에게서 배운 대로 행하고 있어 딱히 달라진 것을 인지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다만 김동익 스스로가 바꾼 부분이 있다고 증언하는데, 다소 쌍스럽거나 야한 부분의 대사를 순화시킨 것이 그러한 부분이다. 또한, 주연산이 주도했을 때는 막(幕) 구분이 없었던 것을 김동익 대에서는 1) 〈박첨지마당〉, 2) 〈평안감사마당〉, 3) 〈절 짓는 마당〉이라는 3막 구성으로 체계화하였다.
○ 연행 시기 및 장소
서산박첨지놀이는 보통 추석 즈음인 음력 8월 16일 또는 17일 저녁에 탑곡리 고양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행되었다. 물론 인근의 마을들에서도 구경을 오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온전히 고양마을이 중심이 되었다. 이 놀이를 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고양마을 사람들이며, 이전 동네어른들이 하는 것을 보며 자연스럽게 놀이를 익혔다. 그중 주요 인물은 마을에서도 신명 좋은 인물들이 맡고 있다. 과거에 이 놀이는 동네 부잣집 사랑방 마루에 포장을 치고, 구경꾼들은 마당에 앉아 보았다. 이 놀이 전후로 부잣집에서는 술과 먹을 것을 제공하여 곧 마을잔치가 되었다.
○ 연행 도구
서산박첨지놀이는 인형극인데 등장하는 인형의 종류는 18종이다. 박첨지, 박동생(박첨지동생), 박첨지의 큰마누라, 박첨지의 작은마누라, 명노(박첨지 처남), 스님, 소경, 홍동지, 목수(4인), 상제(2인) 등이 있다. 인형의 주재료는 (박)바가지와 나무를 이용한다. 과거 주연산이 중심이 되었던 시절에는 지금보다 작은 크기로 만들어졌고, 공연 이후 소각했다. 그러나 2000년 문화재 지정 이전부터 공연의 수요도 많고, 관객의 규모도 커짐에 따라 크기가 커졌다. 현재 얼굴의 크기는 상하 25cm, 좌우 22cm 내외이며 파손되지 않는 한 계속적으로 탈을 사용하고 있다.
〈박첨지놀이〉의 인형들은 남사당패 꼭두각시놀음에 비해 소박하다. 남사당패 꼭두각시놀음의 인형들은 크기가 작지만 세밀한 조각과 입 등이 움직이는 조절 등이 가능하며, 옷 또한 각각의 옷을 만들었고, 장단에 춤을 추는 등 그 인형이 움직인다. 그러나 서산박첨지놀이의 경우를 보면, 1989년 조사시에는 바가지에 자루포대를 연결해서 팔을 넣어 조종했던 주머니인형의 형태였던 것이 1990년대 초반에는 지금과 같이 각목을 연결하여 그것을 잡고서 움직이는 형태로 바뀌었다. 그러나 세밀한 움직임을 표현하지는 못하고 좌우, 상하로 움직이는 정도로 단순하다.
○ 음악적 특징
서산박첨지놀이에서는 농악 악기 중 사물(꽹과리, 장구, 북, 징) 정도만 활용된다. 실제 극에서 이 악기의 연주가 활발히 활용되지는 않는다. 처음에 막을 열 때와 마지막 극이 끝나고 모든 인형이 인사를 할 때 정도만 자진모리장단과 휘모리장단을 연주한다. 《남사당패놀이》처럼 춤을 추는 인형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놀이 중에 장단연주는 거의 없다. 다만 장면 장면을 넘길 때는 북의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떼~루 떼~루아 떼~루야"를 두 번 부른다.
북 | ○ | ○ | ○ | ○ | ○ | ○ | ○ | ○ | ||||
가사 | 떼 | - | 루 | 떼 |
- 루 |
가 | 떼 | - | 루 | 야 | - | - |
서산 박첨지에서 노래가 나오는 장면이 세 장면이 있다. 첫 번째는 평안감사가 매사냥을 할 때이다. 북으로 장단을 짚는데 장단은 굿거리장단이며, 제창으로 “평안감사가 매사냥”을 반복해서 부른다.
북 | ○ | ○ | ○ | ○ | ○ | ○ | ○ | ○ | ||||
가사 | 평양 | - | - | 감 | - 사 |
가 | 매 | - | 사 | 냥 | - | - |
평안감사가 사냥을 통해 잡은 매를 먹고 탈이 나 이윽고 죽게 된다. 그래서 평안감사의 상여행렬이 나오는데 이 때 상여소리를 선후창으로 부른다. 선소리꾼이 요령을 흔들며 소리를 메기면, 악사들이 뒷소리를 ‘어화~ 어화~’로 받는다. 이때 불리는 상여소리 가사는 일반적인 상여소리 가사이다. “불쌍하고 가련허다 / 어린상제 불쌍하다 / 명사십리 해당화야 / 꽃진다고 설워마라……”의 노랫말이 나타난다.
마지막 소리는 절 짓는 대목에서 나온다. 인형들이 절을 짓고 있으면, 악사 1인이 목탁을 두드리며 굿거리장단에 “공중사 절을 지어”라고 메기고, 받는 사람도 똑같이 “공중사 절을 지어”로 받는다. 가사는 변하지 않고 절을 다 지을 때까지 이 메기고받는 형식의 노래를 반복한다.
목탁 | ○ | ○ | ○ | ○ | ○ | ○ | ○ | ○ | ||||
가사 | 공 | - | - | 중 - |
- | 사 | 절 | 을 | 지 | 어 | - | - |
현재 연행되는 서산 박첨지놀이의 막은 가로 5m, 세로 1m 80cm가량으로 나무 사각 프레임에 흑색 천을 둘러친다. 따라서 조종하는 이들이 그 막 뒤에 서서 인형을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악사는 4인으로 꽹과리ㆍ장구ㆍ북ㆍ징을 연주하며 관객들의 앞에서 무대를 바라보고 앉는다. 인형은 기본적으로 1인 1인형을 조종하지만, 상황에 따라 1인이 여러 인형을 조종할 수도 있다. 다만 대사 연기는 기본적으로 1인 1연기를 하게 된다. 인형을 조종하는 이들이 대사를 하면, ‘산받이’라는 사람이 그 대사를 맞장구쳐준다. 이 산받이는 악사 중 1인으로 주로 장구를 연주하는 사람이 맡는다. 앞서 말했듯 서산 박첨지놀이는 김동익에 의해서 세 개의 막으로 전형화되는데, 1) 〈박첨지마당〉, 2) 〈평안감사마당〉, 3) 〈절짓는마당〉이 그것이다. 그리고 처음과 끝에 악사들이 자진모리와 휘모리를 잠시 연주하여 판을 여닫는 역할을 한다. 마당과 마당 사이에서는 무대 전환 효과는 없이 연속된다. 세 개의 마당 안에서도 작게는 각기 두 부분씩으로 나뉜다. 1) 〈박첨지마당〉에서는 ① 박첨지의 유람과 그를 찾는 가족, ② 큰마누라와 작은마누라에게 재산분배로 구분된다. 2) 〈평안감사마당〉에서는 ① 평안감사의 매사냥, ② 평안감사의 죽음과 출상, 3) 〈절짓는마당〉에서는 ① 절짓기, ② 소경 눈뜨기로 구성된다. 이보다 더 미분된 장면구성은 약 21개의 장면인데, 이 장면들 사이에는 "떼~루 떼~루아 떼~루야"를 북장단에 맞추어 2번 정도 부른다. 현재 전체 연행시간은 약 40분 내외이다.
마당 | 거리 | 장면 | |
여는마당 | 0. 사물악기 악사들의 앉은반 연주 | ||
박첨지 마당 | 박첨지유람 | 1. 박첨지의 팔도 유람기 | |
2. 박첨지가 작은마누라를 인사시킴 | |||
3. 박첨지를 찾아나선 동생 | |||
4. 박첨지를 찾아나선 큰마누라 | |||
살림나눔 | 5. 처남 명노가 마침내 박첨지를 만나 싸움 | ||
6. 박첨지가 두 마누라에게 살림을 나눠주겠다 함 | |||
7. 박첨지가 두 마누라에게 살림을 나눠줌 | |||
평안감사 마당 | 매사냥 | 8. 박첨지가 홍동지에게 평안감사 매사냥을 위해 길닦으라 함 | |
9. 박첨지 평안감사에게 사냥올 것을 일러주러 감 | |||
10. 평안감사 매사냥 | 제창 “평안감사가 매사냥” | ||
평안감사의 죽음과 출상 | 11. 평안감사가 꿩고기를 먹고 체하여 홍새를 먹어야 낳는다 함 | ||
12. 박첨지가 홍새를 잡으려하나 구렁이가 다 잡아먹음 | |||
13. 평안감사가 죽음 | |||
14. 평안감사의 상여행렬 | 선후창 “어허 어화” | ||
15. 출상에 늦은 상제 등장 | |||
절 짓는 마당 | 절짓기 | 16. 박첨지가 불사 걸립 시주 | |
17. 스님의 시주 걸립 | |||
18. 절짓기 | 선후창 “공중사 절을 지어” | ||
소경 눈뜨기 | 19. 소경이 눈 뜰 것 같다는 소식 | ||
20. 소경 눈뜨기 | |||
닫는마당 | 21. 전체 등장 인형 등장과 무대인사 |
서산박첨지놀이의 가장 큰 특징은 비전문자가 연행하는 놀이라는 점이다. ‘놀이패’라고 부르기에는 이것에만 전념하는 이들은 아니다. 현재는 충남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회 활동을 하기는 하나, 평상시에는 다른 활동을 하는 일반인들이다. 이 놀이를 전해준 주연산, 그리고 그것을 이은 김동익, 현재의 이태수 등 그 놀이 중심에는 소위 예술적 ‘끼’를 가진 이들이 있다. 그러나 주변 배역에서는 여러 동네사람들이 어울려 조종과 연기에 참여한다. 그래서 이제는 1인형 1배역일 정도로 참여 인원이 늘었고, 여성 연희자 또한 늘었다. 공연예술이기에 앞서 함께 놀이를 연행하며 즐기는 놀이인 것이다. 서산박첨지놀이는 문화전파와 지역 토착화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외부의 문화가 전파되어 그것을 원래 모습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모습으로 전환하고, 지속시켜왔다는 것은 이 놀이를 연행하는 서산 음암면 탑곡4리 고양마을 사람들의 문화적 생성력에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전문가인 남사당패의 〈꼭두각시놀이〉처럼 인형 제작의 정교함, 조종과 연행 내용의 다양함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자신의 언어를 기반으로 차별화를 이루었다. 이를테면 남사당에서는 인형의 조종과 연기에 있어 1인 다역을 맡지만, 서산 박첨지놀이는 1인 1역을 맡는다. 따라서 목소리를 변조하는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또한 누군가의 기예를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닌, 같이 어울리는 놀이라는 점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도 있다.
충청남도 무형문화재(2000)
서연호, 『꼭두각시놀이』, 열화당, 1990. 주강현, 『서산 박첨지놀이』, 민속원, 2011. 서연호, 「신명나는 서산 박첨지 놀이」, 『문화예술』 11ㆍ12월, 1989. 임재해, 「꼭두각시놀음의 역사적 전개와 발전 양상」, 『구비문학연구』5, 1998. 허용호, 「서산박첨지놀이의 전승 양상」, 『민속학연구』 13, 2003. 허용호, 「토박이 광대패 인형극의 전승 양상-서산시 음암면 탑곡 마을의 서산박첨지놀이를 중심으로」, 『민속학연구』 13, 2003.
김형근(金亨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