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진주지방에서 전승되어 온 탈놀이
진주오광대는 영남지역 오광대의 전통을 갖춘 탈놀이로, 일제강점기인 1928년에 정인섭이 조사를 시작하였다. 이후 1930년대에 송석하, 해방 이후 최상수ㆍ이명길 등이 정리한 대본이 현재까지 전하며, 송석하와 최상수가 수집한 탈도 현재까지 남아있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전승 자료가 수집ㆍ정리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연행되지 못하였다. 숱한 노력 끝에 1998년에 본격적인 복원에 성공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놀이의 구성은 총 다섯 마당으로 제1과장은 〈신장놀음〉, 제2과장은 〈오탈놀음〉, 제3과장은 〈말뚝이놀음〉, 제4과장은 〈중놀음〉, 제5과장은 〈할미놀음〉이다.
진주지역에서는 두 종류의 오광대가 있었다고 전한다. 그 하나는 진주에 본거지를 둔 유랑예인집단 솟대쟁이패들의 탈놀이이며, 다른 하나는 진주 도동면 소재 하대리(현 진주시 하대동)에서 전승되던 《도동오광대(道洞五廣大)》이다. 1930년대에 진행된 송석하의 현지조사에 의하면, 진주오광대는 1880년 무렵 의령군(宜寧郡) 부림면(富林面) 신반리(新反里) 대광대패의 영향으로 형성되었으며, 이후 가산오광대에 영향을 미쳤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구전에서는 합천 초계 밤마리 대광대패가 진주에 와서 공연한 것을 보고 진주오광대가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이 두 가지 설은 모두 진주오광대의 생성 시기를 조선 후기인 19세기로 추측하고 있으며, 외부의 놀이를 보고 만들어졌다고 진술하고 있다는 것에서 공통점이 있다. 진주오광대는 1920년대까지 연행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이 당시에는 이미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934년에 진주의 부인위친계(婦人爲親契), 제3야학회(第三夜學會), 각 신문지국 등이 주동해서 놀이를 지원하기도 하는 등 부흥을 위한 노력이 있었으나, 1937년 이후로 그 명맥이 끊어졌다. 숱한 노력 끝에 1998년에 본격적인 복원에 성공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 역사적 변천 과정 1934년 진주의 부인위친계(婦人爲親契), 제3야학회(第三夜學會), 각 신문지국 등의 주관으로 놀이를 부흥시키고자 했으나, 1937년 이후로 그 명맥이 끊어졌다. 광복 이후에 진주오광대의 복원을 위해 학자들을 비롯한 관계자들의 노력이 있었다. 그 사례로 광복 이듬해에 개최된 '개천예술제'에서 공연하였다. 당시 참가한 김치권(金致權), 최선준(崔善俊) 등은 1930년대에 오광대를 재연해서 1958년까지 진주오광대를 연행했다. 또한, 1961년에도 이명길(李命吉)이 새로 연희본을 정리하여 전승을 이어가고자 했으나 그 명맥은 이어지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진주오광대는 우리나라 가면극 중에서 최초로 그 대본이 채록되었던 가면극으로 4종의 채록본이 전한다. 이는 1928년 『강석진 구술 정인섭 채록본』, 1934년 『박용근 구술 송석하 채록본』, 1957년 『최선준 구술 최상수 채록본』, 『이명길 채록본』이다. 또한, 과거 사용되었던 탈도 전해지며, 생존 연희자의 증언도 남아 있었기 때문에 복원을 위하여 지속적인 노력이 펼쳐졌다. 이 과정에서 1996년 《진주탈춤한마당》을 계기로 진주오광대를 복원 문화운동이 다시 시작되었다. 1997년 5월에는 '진주탈춤 한마당 학술심포지움'에서 진주오광대 복원의 가능성과 필연성이 제기되었다. 당시 복원은 1970-80년대 대학 탈패 출신의 정병훈, 강동옥이 주축이 되며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전해지는 4개의 대본을 토대로 김수업이 복원용 대본을 작성하였고, 유일한 생존 연희자인 배또문준(裵又文俊)이 춤을 복원하였다. 탈은 1934년 당시 송석하가 수집한 탈을 근간으로 재연하였다. 이외에 의상과 음악, 연희동작 등은 부문별 전문가가 맡아 진행하였다. 1998년 5월 23일 《제3회 진주탈춤한마당》에서 60년 만에 공연되었으며, 지금까지 이어오게 되었다. ○ 연행 시기와 장소 진주오광대는 진주지역에서 정월달 세시풍속의 일환으로 연행되었다. 정월대보름에 수정산(水晶山) 마루에 보름달이 뜨는 시각에 맞추어 달집을 태우면, 매구잽이들이 악기를 치는 소리에 따라 연행이 시작되었다. 1920년대에는 진주공설운동장(계동), 30년대에는 삼포극장(三浦劇場)이 놀이판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연행을 위한 경비로는 정초부터 지신밟기를 하면서 모은 돈과 특별기부금 등이 사용되었다.
○ 음악적 특징 진주오광대는 꽹과리, 징, 북, 장구 등의 농악기만으로 연행되기도 하고, 피리, 젓대, 해금 등의 선율악기를 함께 사용하는 삼현육각 혼합 편성을 하기도 한다. 이때 악기 연주자들은 공연장소의 뒤편에 앉아서 연주한다. 대개 굿거리장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덧배기춤〉이 주요한 춤으로 사용된다. 등장인물에 따라 오방신장의 〈진춤〉, 〈문둥춤〉, 〈중춤〉, 〈말뚝이춤〉, 〈양반춤〉, 〈팔선녀춤〉, 〈할미춤〉 등으로 불리는 춤을 춘다. 주요하게 사용되는 장단으로는 굿거리, 덧배기, 염불, 도드리, 세마치, 타령 등이 있다. 염불, 반염불, 도드리 등의 장단은 오방신장무에서 주요하게 사용되며, 양반ㆍ말뚝이와 할미ㆍ영감의 등장에는 삼현타령이 중요한 장단으로 사용된다. 진주오광대에는 많은 수의 노래가 불리지 않는다. 다만 〈문둥놀음〉에서 문둥이들의 〈품바타령〉, 〈중놀음〉에서 중이 양반에게 곤욕을 치르는 중에 불리는 〈신세타령〉이 있다. 〈품바타령〉은 전형적인 〈장타령〉의 음악적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중의 〈신세타령〉은 세마치장단으로 노래한다.
○ 절차 및 주요 내용 놀이의 구성은 다섯과장으로 짜여져 있다. 첫 번째 〈오방신장(五方神將舞)놀음〉은 정화의 마당이다. 동방 청제장군(東方 靑帝將軍), 서방 백제장군(西方 白帝將軍), 남방 적제장군(南方 赤帝將軍), 북방 흑제장군(北方 黑帝將軍), 중앙 황제장군(中央 黃帝將軍)의 오방신장이 등장한다. 이처럼 각 방위를 지키는 존재들이 오수갓을 쓰고 오방색의 옷을 입고 나타나 춤을 추면서 잡귀와 잡신들을 누르고 몰아내며 정화한다. 두 번째 〈문둥놀음〉은 오방색 탈을 쓴 다섯 문둥광대가 등장해서 질병을 몰아내고 안녕을 준다는 내용이다. 동방 청탈, 서방 백탈, 남방 적탈, 북방 흑탈, 중앙 황탈 등의 오방지신(五方地神)이 갖가지 병신춤을 추어서 질병을 부르는 역신(疫神)을 몰아내고 안녕과 평화를 지킨다. 춤판과 함께 투전놀음이 일어나며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세 번째 〈말뚝이놀음〉은 〈양반마당〉이라고도 불린다. 말뚝이가 문둥광대들을 쫓아내고 하인인 말뚝이가 주인 생원과 주인의 친구인 옹생원ㆍ차생원의 무식을 비꼬며 조롱하며 부패상을 폭로한다. 양반이 진주에서 팔선녀를 모아놓고 술판과 춤판을 벌이는 내용을 통해서 풍자를 보여준다.
네 번째 〈중놀음〉은 파계승을 풍자하는 내용이다. 소무(小巫)가 춤을 추고 있는 곳에 상좌를 앞세운 중이 나와 춤을 추면서 소무를 유혹한다. 중은 두 미인과 춤을 추며 놀다가 파계를 하고, 양반들의 심부름을 수행하는 말뚝이에게 끌려가 곤욕을 치룬다. 다섯 번째 〈할미놀음〉은 처ㆍ첩간의 갈등으로 벌어지는 집안의 풍파를 다룬다. 집안을 버리고 떠돌던 생원(영감)과 생과부로 늙어버린 할미가 다시 만나는 내용으로, 기생첩을 두 명이나 데리고 온 영감과 할미 사이에 풍파가 일어나게 된다. 영감과 할미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고 할미는 영감의 발에 차여 죽는다. 영감이 할미를 살리려는 갖은 노력을 하는데, 무당의 굿으로 할미가 살아나게 된다. 이후 한바탕 춤판이 벌어지면서 놀이를 마무리한다. ○ 등장인물과 탈 진주오광대에서 사용하는 탈은 송석하와 최상수가 수집한 것을 통해 원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934년에 송석하가 수집한 탈은 오방신장 6점, 문둥이 5점, 어딩이 1점, 무시르미 1점, 노장 1점, 할미 1점, 순사 겸 소무 2점 등이다. 문둥이탈을 제외하면 모두 종이로 만들어졌다. 최상수가 1960년대에 수집한 탈은 오방신장 5점, 문둥이 5점, 옹생원 1점, 차생원 1점, 노장 1점이며, 나무로 만들어졌다. 현재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진주오광대에서 사용하는 탈은 오방신장ㆍ문둥이ㆍ무시르미ㆍ어딩이ㆍ옹생원ㆍ차생원ㆍ할미ㆍ중ㆍ상좌ㆍ소무 등으로 총 20개 내외이다. 탈을 쓰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로는 의원ㆍ무당 등이 있고, 생원ㆍ작은마누라 등은 다른 마당에 사용한 탈을 빌려와서 사용한다. 현재 복원된 탈은 대부분 바가지가 만들어졌는데, 그 위에 종이를 여러 겹 붙여 요철이 드러나게 하여 입체감을 살리고 색을 칠한다. 오방신장탈과 포졸탈은 종이로 만든다.
진주오광대는 1920년대 말부터 조사된 대본 4종과 이 과정에서 수집된 탈 수십 점이 남아있는 탈놀이로, 단절의 시간이 있었으나 여러 자료를 통해 복원된 사례에 속한다. 〈오방신장무〉와 〈오문둥이〉 등이 포함되어 있어 영남지역 오광대의 특징인 잘 드러나며, 벽산진경과 정화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다른 영남지역 오광대인 《가산오광대》와의 유사성이 확인된다. 한편 양반과 말뚝이는 〈말뚝이놀음〉과 〈중놀음〉에 연속해서 등장하면서 과장이 연속성을 갖는다는 점에 주목된다. 이외에도 〈할미ㆍ영감마당〉에서 영감과 싸우다 쓰러진 할미를 무당의 굿으로 살려내는 것은 다른 오광대의 내용과 다른 매우 특이한 전개라고 할 수 있다. 〈말뚝이놀음〉에서 보이는 팔선녀의 춤은 진주의 교방춤과 유사한데, 이를 통해 진주지역 문화를 배경으로 진주오광대가 형성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중놀음〉에서 중이 부르는 〈신세타령〉에 세마치장단을 사용하는 점은 진주지역이 남해안 문화권에 속한다는 지리적 특색이 반영된 것이라고 하겠다.
경상남도 무형문화재(2003) 한국의 탈춤: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2022)
진주오광대에 잘 알려진 놀이꾼으로는 옹생원ㆍ어딩이 역에 최선준(崔善俊), 소무ㆍ중 역에 정종근(鄭鍾根), 말뚝이 역에 강석진(姜碩珍), 할미 역에 양덕현(梁德現)과 신길룡, 악사로 문장현(文章現) 등이 있었다. 이를 잇는 후배로 말뚝이 역의 김치권과 이재영(李在榮) 등을 꼽는다.
『무형문화재 이야기 여행』, 문화재청, 2016. 『한국전통연희사전』, 국립민속박물관, 2014. 『한국민속예술사전: 민속극』, 국립민속박물관, 2016. 강용권, 『야류ㆍ오광대』, 형설출판사, 1977. 정상박, 『오광대와 들놀음 연구』, 집문당, 1986. 송석하, 「오광대소고」, 『조선민속』 1, 1933. 정인섭, 「진주오광대탈놀음」, 『조선민속』 1, 1933. 최상수, 「야유ㆍ오광대가면극」, 『경상남도지』, 경상남도, 1963. 기사 김소현, 사진 유근종, 「예술인의 공간을 방문하다-진주오광대보존회의 공간을 방문하다」, 《진주문화관광재단 네이버 블로그》 2022.10.31.(https://blog.naver.com/jjctf) 정원경, 「진주탈춤한마당 한번 즐겨보자」, 『경남일보』, 2014.09.05. 』(http://www.g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0749) 문화재청(www.cha.go.kr) 문화재청국가문화유산포털(www.heritage.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http://encykorea.aks.ac.kr/) 한국전통연희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326308&cid=56785&categoryId=56785) 진주오광대보존회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jinjuogwangdae)
김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