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송파구 일원에서 전승된 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는 서울지역 애오개, 구파발, 사직골 등에 있었던 ‘본산대놀이’를 이어받아 송파구 송파동ㆍ가락동ㆍ석촌동 등지에서 전승된 탈춤이다. 모두 열두 마당으로 구성되며, 서른두 개 바가지가면으로 비교적 고형을 보존하고 있다. 다른 탈춤과 마찬가지로 벽사의 의식무, 파계승에 대한 묘사, 양반의 풍자, 처첩 간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산대놀이는 조선시대 궁중 나례와 중국 사신 환영행사에 동원됐던 성균관 노비 반인들에 의해 성립된 연희였다. 1634년에 산대도감이 폐지되자 한양 도성 근처의 민간에서 공연하면서 구파발ㆍ사직골ㆍ애오개 등지에서 산대놀이를 연희하였으며, 점차 노들ㆍ양주ㆍ송파ㆍ퇴계원 등지로 분파되었다. 송파산대놀이가 정착하게 된 송파진(松坡津)의 지명은 문종 즉위년인 1450년, 경기관찰사가 “삼전도(三田渡)보다 연파곤(淵波昆)이 물살이 빠르지 않으니 나루터로 하겠다”는 데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이후 소파곤(疎波昆), 소파리(疎波里)를 거쳐 송파(松坡)로 정착됐다. 19세기 초 송파장이 가장 번성하던 시기에 상인들의 지원으로 경제적 여건이 갖춰져 성행하였다. 연중행사로 명절에 이루어졌으며, 특히 5월 단오와 7월 백중에는 7일씩 탈춤판을 벌였다.
○ 역사적 변천 과정 송파산대놀이의 연희자 허호영(許浩永, 1914-1990)에 따르면, 본산대놀이에 의해 성립된 송파산대놀이가 중도에 쇠퇴하면서 1900년대 초 그의 부친 허윤(許鈗, 1867-1935)이 《구파발본산대놀이》의 연희자 윤희중(尹熙重, 1840~1923)을 초빙해 재건했다고 한다. 1900년대 초 재건된 송파산대놀이는 ‘을축년(1925년) 대홍수’로 인해 쇠퇴한 상황에서 전승을 이어간 곳은 그 옆에 위치한 돌마리(석촌동(石村洞))였다. 돌마리의 사람들은 1930년대 초부터 송파산대놀이의 연희자들을 초청하여 송파산대놀이를 전승했다. 봄에서 가을까지는 돌마리의 마당에서, 겨울에는 백사장에 움막(공청, 깊은사랑)을 만들어 산대놀이를 놀았다. 송파산대놀이의 전승은 1960년대 허호영을 중심으로 복원하여 1973년 국가무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받았으며, 허호영(탈제작ㆍ옴중ㆍ노장), 이충선(李忠善, 1910-1989, 장고ㆍ대금ㆍ피리), 김윤택(金澗澤, 1904-1979, 상좌ㆍ취발이ㆍ초라니ㆍ신주부), 이범만(李範萬, 1907-1984, 옴중ㆍ샌님ㆍ신할아비), 한유성(韓有星, 1908-1994, 포도부장ㆍ샌님), 문육지(文陸地, 1913-1992, 상좌ㆍ먹중ㆍ무당) 이상 여섯 명이 예능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1984년에는 석촌호수에 서울놀이마당과 송파산대놀이 전수관이 건립되어 보다 안정적인 전승 공간이 마련되었다. 이후 김학석(金學錫, 1940-2014, 무당)이 보유자로 인정됐으나, 2014년 작고했다. 2022년 현재 명예보유자 이병옥(李炳玉, 1947~ , 상좌ㆍ취발이)과 보유자 함완식(咸完植, 1956~ , 옴중ㆍ먹중)을 중심으로 송파산대놀이가 전승되고 있다. ○ 연행 시기 및 장소 송파산대놀이는 정월 대보름, 4월 초파일, 5월 단오, 7월 백중, 8월 한가위 등 주로 명절에 연행되었다. 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상인들은 비용을 추렴하여 〈줄타기〉, 씨름, 산대놀이 등 다양한 놀이를 벌였는데, 백중 때에는 각지에서 유명한 산대놀이 연희자들을 초청하여 1주일씩 산대놀이를 놀았다. 송파산대놀이를 연행할 때는 시장의 공터에 둥글게 말뚝을 박고 새끼줄을 쳐 연행 공간을 만든다. 마당 한편에는 삼현육각을 연주하는 악사청과 맞은편에는 연희자들이 가면과 의상을 갈이 입고 등퇴장을 하는 개복청(改服廳)을 마련한다. ○ 주요 춤사위 송파산대놀이 춤사위는 해서탈춤과 달리 도약과 한삼사위보다는 손놀림 중심의 깨끼리 같은 손춤사위가 발달했다. 염불장단의 거드름춤, 타령장단의 깨끼춤, 굿거리장단의 건드렁춤으로 나눌 수 있다. 또한 두 배역이 서로 마주 보고 같은 동작의 깨끼춤들을 엮어서 추는 맞춤이 있는데, 대무(對舞)와 원무(圓舞)의 춤사위로 나뉜다. ○ 무구 송파산대놀이에서 현재 사용하는 탈은 서른두 개로 《양주별산대놀이》의 탈과 유사하나 얼굴의 형태나 색채, 색감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다. 이목구비는 둥글고 큰 코, 불거져 나온 볼, 길게 벌어진 입술, 주름진 이마 등 다소 과장된 형태를 띠고 있다. 색채는 오방색을 기본색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전반적으로 어둡고 짙은 느낌을 준다. 송파산대놀이의 탈은 1973년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당시의 허호영 제작 탈과 1978년 이후 한유성을 중심으로 제작된 탈의 두 유형으로 나뉜다. 현재는 한유성 제작 탈을 사용하고 있다.
송파산대놀이를 시작하기 전 연희자들이 풍물을 치면서 시장을 중심으로 마을을 한 바퀴 도는 길놀이를 한다. 개복청(改服廳)에 당도하면 마당 가운데 멍석을 깔고 고사상을 차린 후 가면을 올려놓고 고사를 지낸다. 고사상 앞에 승려와 양반탈들을 맨 위에 놓고 그 외의 가면을 늘어놓으며, 여성 배역의 가면은 맨 밑에 놓는다. 축문을 읽은 후에는 소지(燒紙)를 하고 선대 연희자들의 명복을 빌고 나서 음복한 떡을 구경꾼에게 나누어준다.
송파산대놀이는 모두 열두 과장으로 구성된다. 제1과장 〈상좌춤놀이〉, 제2과장 〈옴중ㆍ먹중놀이〉, 제3과장 〈연잎ㆍ눈끔적이놀이〉, 제4과장 〈애사당의 북놀이〉, 제5과장 〈팔먹중의 곤장놀이〉, 제6과장 〈신주부의 침놀이〉, 제7과장 〈노장놀이〉, 제8과장 〈신장수놀이〉, 제9과장 〈취발이놀이〉, 제10과장 〈샌님ㆍ말뚝이놀이〉, 제11과장 〈샌님ㆍ미얄ㆍ포도부장놀이〉, 제12과장 〈신할아비ㆍ신할미놀이〉이다. 다른 탈춤과 마찬가지로 벽사의 의식무, 파계승에 대한 묘사, 양반의 풍자, 처첩 간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송파산대놀이 연희대본에는 구파발 산대놀이와 관련한 지명들이 나타난다. 제6마당에서 먹중 한 명이 맥이 막혀 쓰러지자, 다른 먹중들은 쓰러진 먹중이 ‘고택골’로 갔다고 말하고, 제9마당에 등장하는 취발이는 친구와 술을 마신 뒤 고개를 넘어가던 중 솔개가 날아들자 놀라며 쫓아낸다. 이때 취발이는 솔개와 마주치는 곳을 ‘무악재’라고 소개한다. 제12 마당에서 등장하는 신할아비ㆍ신할미의 아들 도끼도 매형이 죽은 것을 고택골로 간다고 표현한다. 고택골은 과거 은평구에서 유명했던 공동묘지였다. 이처럼 대사에 나오는 ‘무악재’, ‘고택골’은 구파발ㆍ녹번 등 인근의 거주자들에게 친숙한 지명이며, 송파산대놀이가 전승됐던 송파장과는 거리가 있다. 이는 《구파발본산대놀이》 재담에 나오는 지명이 송파산대놀이에 전해지면서 취발이ㆍ먹중ㆍ도끼 등 배역들의 대사에 남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송파산대놀이에 쓰이는 음악은 길놀이에서 연주하는 행진음악과 놀이마당에서 연주하는 반주음악을 나눌 수 있다. 길놀이 악기는 호적 한 쌍ㆍ북ㆍ장고ㆍ바라로 편성된다. 길놀이 행진에는 〈능게〉를 연주하고, 길놀이가 끝날 무렵에는 〈타령〉을 연주한다. 춤을 반주할 때는 피리 한 쌍ㆍ대금ㆍ해금ㆍ장구ㆍ북으로 구성된 삼현육각(三絃六角) 편성으로 《대풍류》의 〈염불〉ㆍ〈허튼타령〉·〈굿거리〉 등을 연주한다.
송파산대놀이는 구파발ㆍ애오개ㆍ사직골 등지의 본산대놀이가 소멸된 후 현재까지 서울에서 전승되는 유일한 산대놀이이다. 특히 송파산대놀이는 《구파발본산대놀이》의 영향을 받은 산대놀이로 양주, 퇴계원의 산대놀이와 함께 얼마 남지 않은 본산대놀이의 명맥을 잇고 있다. 송파산대놀이 탈은 과거 애오개ㆍ녹번ㆍ구파발ㆍ사직골ㆍ노량진 등 다양했던 산대놀이가 현재 3종(송파, 양주, 퇴계원)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산대놀이 탈 32종을 갖추고 있어 다양성을 더 해줄 뿐만 아니라, 전통 탈의 상징성과 조형미를 한 차원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국가무형문화재(1973)
이두현, 『한국의 탈놀음』, 일지사, 1996. 이두현, 「송파산대놀이」,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90, 1971. 이병옥, 『송파산대놀이 연구』, 집문당, 1982. 이병옥, 『송파산대놀이』, 피아, 2006. 이효녕, 『송파산대놀이의 전승과 변모』,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1. 전경욱, 『한국의 탈놀음』, 열화당, 2007. 전경욱, 『한국전통연희사』, 학고재, 2020.
이병옥(李炳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