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극, 탈놀이, 탈놀음. 산대놀이, 야류(野遊), 오광대(五廣大)
연희자들이 각 등장인물이나 동물을 형상화한 가면을 쓰고 나와 대사, 노래, 춤, 연기를 통해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전통연극.
마을굿놀이 계통 가면극은 마을굿인 동제(洞祭)나 고을굿인 읍치제의(邑治祭儀)에서 유래해 발전해 온 토착적ㆍ자생적 탈춤들로서 그 지역의 주민들이 전승해 왔다.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은 〈벽사적 의식무과장〉, 〈파계승과장〉, 〈양반과장〉, 〈영감ㆍ할미과장〉 등 서로 다른 독립적 과장들로 짜여진, 소위 옴니버스 스타일의 구성 방식을 갖고 있다. 탈춤에는 주로 현실적인 인물 위주의 등장인물이 나온다. 백사자ㆍ비비ㆍ영노 등 일부 상상의 동물과 연잎ㆍ눈꿈쩍이 등 신적인 존재도 등장하지만, 중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매우 적은 편이다. 연희 내용 또한 주로 현실 문제를 풍자하고 비판한다.
탈춤은 크게 (1) 마을굿놀이 계통 가면극, (2)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으로 나눌 수 있다. 마을굿놀이 계통 가면극은 마을굿ㆍ고을굿을 거행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2권 「고성(固城) 성황사(城隍祠)」 조에서 조선 전기 마을굿ㆍ고을굿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은 〈산악(散樂)〉 또는 〈백희(百戱)〉라고 부르던 연희들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 역사 변천 과정
삼국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산악〉ㆍ〈백희〉 또는 〈산악잡희(散樂雜戱)〉라고 부르는 연희들이 유입됐는데, 이는 요즘의 서커스에 해당한다. 고구려의 고분벽화나 중국과 일본의 고구려 관련 기록은 고구려가 중국ㆍ서역과 매우 활발한 교류가 있었고, 고구려에 이미 산악ㆍ백희 같은 서역ㆍ중국 유래의 연희들과 탈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안악 제3호분》의 벽화 중 후실의 〈가면희도〉에는 악사 세 사람이 각각 긴 퉁소, 완함, 거문고를 연주하는 가운데 한 사람이 탈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나타난다.
일본의 우방악(右方樂)은 삼국 및 발해의 악무인데, 우방악을 일명 고려악이라 해, 고구려악이 삼국악일본의 우방악(右方樂)은 삼국 및 발해의 악무인데, 우방악을 일명 고려악이라 하여, 고구려악이 삼국악의 총칭으로 불렸다. 고구려악은 24곡(曲)이었는데, 이중 〈나소리(納曾利)〉, 〈곤론핫센(崑崙八仙)〉 등 12곡은 가면무악(假面舞樂)이다.
백제의 연희는 한국의 문헌에는 없으나, 13세기 일본 문헌 『교훈초(敎訓抄)』에 백제인 미마지가 중국 남조 오에서 배워 612년 일본에 전했다는 기악(伎樂)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한편 일본에 전하는 《신서고악도(信西古樂圖)》에 〈신라악 입호무(新羅樂 入壺舞)〉와 〈신라박(新羅狛)〉이 그려져 있다. 〈신라박〉은 사자탈춤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연희는 『삼국사기』 「잡지」 중 최치원(崔致遠, 857~?)의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에 묘사된 〈금환(金丸)〉, 〈월전(月顚)〉, 〈대면(大面)〉, 〈속독(束毒)〉, 〈산예(狻猊)〉의 다섯 가지 연희에서 찾아볼 수 있다.
1244년(고종 31년)에는 궁중연회에서 가면을 쓰고 공연하는 연희가 있었다. 한편 『고려사』 권 제124 전영보(全英甫)전에 “우리나라 말로 가면을 쓰고 놀이하는 자를 광대라고 한다(國語假面爲戱者 謂之廣大)”는 기록이 보인다.
고려 말 이색(李穡, 1328~1396)의 한시 〈구나행(驅儺行)〉의 후반부에서는 〈오방귀무(五方鬼舞)〉, 〈사자춤〉, 불토해내기인 〈토화(吐火)〉, 칼 삼키기인 〈탄도(呑刀)〉, 서역의 〈호인희(胡人戱)〉, 〈줄타기〉, 〈처용무〉, 각종 동물로 분장한 〈가면희〉 등 《나례》에서 연행된 연희들을 묘사했다.
최근에 중국 사신 영접행사의 연희 장면을 보여 주는 아극돈(阿克敦, 1685~1756)의 《봉사도(奉使圖)》(1725)가 소개됐다. 이 중 제7폭은 서울의 모화관(慕華館) 마당에서 사신을 위해 공연한 〈접시돌리기〉, 〈땅재주〉, 〈줄타기〉, 탈춤을 묘사하고 있다. 마당의 오른쪽에는 산거(山車)ㆍ산붕(山棚)ㆍ윤거(輪車)ㆍ예산대(曳山臺)ㆍ예산붕(曳山棚) 등으로 불렀던 소규모의 산대가 보인다. 바로 이런 산대 앞에서 공연하던 연희들을 ‘〈산대희〉’라고 불렀다(도판 3~4). 특히 땅재주꾼 세 명의 양옆에서 각각 두 명씩 모두 네 사람이 초록색과 남색의 가면을 쓰고 탈춤을 추고 있다. 이는 서울 근교의 탈춤을 《애오개산대놀이》, 《구파발산대놀이》 등 산대놀이라고 부른 이유를 알려주는 자료이다.
프랑스 프랑수아 미테랑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한글본 《정리의궤 삼십구 성역도(整理儀軌 三十九 城役圖)》에 채색화 〈낙성연도〉가 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채붕을 중심으로 연행되고 있는 공연 종목들은 유득공(柳得恭, 1749~1807) 『경도잡지(京都雜志)』 권1 「성기(聲伎)」 조의 “연극에는 산희(山戱)와 야희(野戱)의 두 부류가 있는데, 나례도감에 소속된다. 산희(山戱)는 다락을 매고 포장을 치고 하는데, 사자춤ㆍ호랑이춤ㆍ만석중춤을 춘다.”1에 나오는 〈산희〉와 그대로 일치한다.
1) 演劇有山戱野戱兩部 屬於儺禮都監 山戱結棚下帳 作獅虎曼碩僧舞.
강이천(姜彛天, 1769~1801)의 한시 〈남성관희자(南城觀戱子)〉(1789)는 당시 〈상좌춤과장〉, 〈노장과장〉, 〈샌님 포도부장과장〉, 〈거사 사당과장〉, 〈할미과장〉을 갖춘 본산대놀이 가면극을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는 현존하는 별산대놀이, 해서탈춤, 야류, 오광대와 거의 같은 내용이다.
송석하(宋錫夏)는 본산대놀이 가면극은 녹번리(구파발)에 거주하면서 나례도감에 예속되어 중국 사신 영접 행사에 동원되던 연희자들이 전승했는데, 그 행사가 폐지되자 아현리로 옮긴 사람들도 있어서 《아현 본산대놀이》를 성립시켰다고 했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을 제외한 전국 각지에서는 탈춤이 활발하게 전승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민족이 분단되는 혼란의 시대를 거치면서 탈춤은 점차 전승이 단절되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 초에 근대화 내지는 서양화의 추진과 함께 민족 주체성 확립이라는 과제를 추구하면서 문화재보호법(1962)이 제정되어 무형문화유산 지정 사업을 펼쳤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탈춤부흥운동이 크게 일어나, 전국의 대학생들이 탈춤을 배워 공연하는 일이 자주 있었으며 그 열의도 대단했다. 현재는 무형문화재의 보존과 전승의 차원에서 탈춤의 전수활동을 펼치고 있다.
일본학자 아키바 다카시(秋葉隆), 북한학자 김일출(金日出), 김동욱, 이두현, 전경욱은 《서울 본산대놀이》의 연희자를 반인으로 보았다. 특히 김동욱은 “보통 반인(泮人)은 편놈 또는 관(館)사람이라 하여 소위 재인백정(才人白丁)의 신분에 해당하며, 궁중의 잡희(雜戱)나 산대희(山臺戱) 때에는 우인(優人)으로 출연하곤 했다.”라고 밝혔다.
본산대놀이는 전문적 연희자인 반인들이 전승했지만, 각 지방의 탈춤 연희자는 농민, 관노, 상인, 무계(巫系) 출신 등 여러 부류로 나타난다.
〈남성관희자〉에 의하면, 본산대놀이는 18세기 중후반부터 이미 〈벽사적 의식무과장〉, 〈파계승과장〉, 〈양반과장〉, 〈영감ㆍ할미과장〉 등 서로 다른 독립적 과장들로 짜여진, 소위 옴니버스 스타일의 구성 방식을 갖고 있었다.
본산대놀이는 조선 후기의 시대상과 사회상을 반영한 사회 풍자의 희극이다. 그래서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은 제의적 성격에서 벗어났는가 하면, 이전에 존재하던 잡기 수준의 탈춤을 혁신적으로 개작해 연극적인 형식과 내용을 갖추고 있다.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들은 조선 후기 사회에서 문제가 되던 여러 부조리를 풍자한다. 이를 위해 문희연(聞喜宴) 등에서 연행되던 양반 풍자의 유희(儒戱), 산희(山戱)에서 연행하던 파계승 풍자의 〈만석중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 있었던 처첩의 삼각관계를 다룬 〈영감과 할미춤〉 등 기존에 따로 존재하던 내용을 결합해 하나의 탈춤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나례(儺禮)》에서 역귀(疫鬼, 질병 귀신)를 쫓아내던 방식을 활용한 내용들도 하나의 과장으로 삽입됨에 따라 더욱 다양한 과장들을 갖추게 되었다.
《봉산탈춤》 〈양반과장〉에서 말뚝이는 처음에 점잖게 양반을 소개하다가, 갑자기 개잘양(방석처럼 쓰려고 털이 붙은 채로 손질해 만든 개가죽)이라는 ‘양’자와 개다리 소반의 ‘반’자를 양반과 연결시켜 조롱한다. 더구나 양반들의 가면이 첫째 양반은 쌍언청이, 둘째 양반은 언청이, 종가집도령가면은 얼굴과 코가 비뚤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들에서는 《나례》의 영향도 많이 발견된다. 《나례》가 자연적 재앙인 질병 귀신을 쫓아버리는 굿이라면, 가면극은 사회적 재앙에 해당하는 파계승, 양반, 영감 등을 풍자하면서 민중 사회에서 쫓아내려는 연극예술이다. 이때 가면극에서는 《나례》의 귀신 쫓는 형식을 활용해 사회적 재앙에 해당하는 부정적 인물들을 물리치고 있다. 예를 들어 《봉산탈춤》의 팔먹중은 술 잘 먹고 여자를 좋아하는 마음 속이 검은 중으로서 민중으로서는 사회적 재앙에 해당한다. 그 가면도 귀면(鬼面)으로서 다른 가면들과 크게 차이를 보인다. 〈팔먹중과장〉에서는 둘째 먹중부터 여덟째 먹중까지 계속 놀이판에 등장해 자기보다 먼저 나왔던 먹중의 머리를 한삼으로 때려서 쫓는 동작을 한다. 첫째 먹중은 다리에 왕방울을 달고 나온다. 김일출의 조사에 의하면, 원래 복숭아나무 가지나 버드나무 가지로 다른 먹중을 때렸다고 한다.
○ 연행 시기와 장소
탈춤의 연행 시기는 지역별로 차이를 보인다. 《서울 본산대놀이》는 흥행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일정한 시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양주별산대놀이》는 음력 3월 3일, 4월 8일(석가탄신일), 5월 5일(단오), 8월 15일(추석), 9월 9일(중양절)과 기우제 때 놀았다. 《송파산대놀이》는 정월대보름, 사월초파일, 단오, 백중, 추석에 놀았다. 《해서탈춤》은 주로 사월초파일과 단오, 경남의 야류와 오광대는 주로 정월 보름, 《강릉관노가면극》은 단오에 놀았다. 그 밖에 중국 사신 영접, 감사의 부임 등 국가 행사에 동원되기도 했다.
탈춤은 〈벽사적 의식무과장〉, 〈파계승과장〉, 〈양반과장〉, 〈영감ㆍ할미과장〉 등 서로 다른 독립적 과장들로 짜인 소위 옴니버스 스타일의 구성 방식을 갖고 있다. 탈춤은 대사, 노래, 춤이 함께 어우러지는 연극이지만, 춤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춤사위가 매우 뛰어나다. 탈춤은 사회 풍자의 희극으로서 사회적 불평등으로 빚어지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제시한다. 탈춤의 내용과 주제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주장으로서 기존 질서를 거부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요구하는 민중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양주별산대놀이: 국가무형문화재(1964) 남사당놀이(덧뵈기): 국가무형문화재(1964) 통영오광대: 국가무형문화재(1964) 고성오광대: 국가무형문화재(1964) 강릉단오제(강릉관노가면극): 국가무형문화재(1967) 북청사자놀음: 국가무형문화재(1967) 봉산탈춤: 국가무형문화재(1967) 동래야류: 국가무형문화재(1967) 강령탈춤: 국가무형문화재(1970) 수영야류: 국가무형문화재(1971) 송파산대놀이: 국가무형문화재(1973) 은율탈춤: 국가무형문화재(1978) 하회별신굿탈놀이: 국가무형문화재(1980) 가산오광대: 국가무형문화재(1980) 진주오광대: 경상남도 무형문화재(2003) 퇴계원산대놀이: 경기도 무형문화재(2010) 김해오광대: 경상남도 무형문화재(2015) 예천청단놀음: 경상북도 무형문화재(2017) 속초사자놀이: 강원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2019) 강릉단오제: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2005/2008) 남사당놀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2009) 한국의 탈춤: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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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욱(田耕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