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당패놀이, 사당패놀이, 유랑광대놀이, 꼭두각시놀이(놀음)
유랑광대였던 남사당패들이 공연했던 여러 가지 공연으로서 놀이는 공연의 토박이말
조선시대 후기부터 일제강점기 1930년대 중반까지 여러 가지 종목으로, 여러 단체(패) 이름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연 활동으로 생계를 잇는 유랑광대들이 있었다. 이들의 하나가 남사당패였다. 남사당패는 한때는 〈얼른(요술)〉 등을 했지만 전승이 끊어졌다. 놀이들은 6·25전쟁 이후부터 부분적으로 복원되기 시작했고, 1960년부터 비교적 자주 공연이 이루어졌다. 오늘날에는 〈풍물(농악)〉,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춤)〉, 〈덜미(꼭두각시놀음, 인형극)〉, 〈비나리(고사)〉 등이 잔존한다.
광대는 거주지를 중심으로 활동한 고을의 광대, 거주지 없이 떠돌아 다녔던 유랑광대, 그리고 왕실의 요청을 받아 거주지를 떠나 일시적으로 서울에서 공연했던 선상(選上)광대 등 세 유형이 있었다. 단체에 해당하는 경우는 아니나, 판소리 광대는 능력에 따라 세 가지 유형을 두루 거쳤던 점에서 특히 주목된다. 광대 가운데는 한 종목만이 아니라 여러 종목을 잘하는 사람도 있었다. 특별히 인기를 독차지하며 최고의 능력을 보였던 광대를 ‘판막이 광대’라 불렀다.
남사당패는 남자들의 단체이자 절(사찰)의 협력을 얻어 활동한 데서 생긴 명칭이다. 이에 대해, 사당패는 여자들이 중심인 단체였고, 20세기 이전에 사라진 단체이다. 굿중패(중매구패)는 염불을 하며 춤도 추면서 구걸을 하는 잡승들의 집단이었다.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중기까지 활동한 유랑광대패로는 곡예 중심의 솟대쟁이패ㆍ대광대패ㆍ초라니패, 사찰에 의존한 굿중패ㆍ사당패ㆍ남사당패, 예능 중심의 풍각쟁이패ㆍ각설이패ㆍ비나리패 등이 활동했다. 이들의 공연종목은 서로 중복되는 경우가 많았다.
○ 조직
남사당패에는 제일 우두머리인 꼭두쇠가 있고, 그 밑에 곰뱅이쇠·뜬쇠·가열·삐리·저승패·나귀쇠 등의 서열이 있었다. 꼭두쇠의 역량에 따라 인기를 얻었고, 남사당패의 인원이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했다. 남사당패의 이름 앞에는 흔히 꼭두쇠의 이름을 붙여 불렀다.(남운용패, 바우덕이패 등) 곰뱅이쇠는 꼭두쇠를 보좌하는 역할을 했으며, 규모가 큰 패거리에는 두 명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곰뱅이란 남사당패의 은어로 ‘허가’를 의미한다. 곰뱅이쇠의 중요한 역할은 공연을 할 마을에 미리 찾아가 놀이판을 벌일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아내는 것이었다. 뜬쇠는 실제로 공연을 담당하는 연기자를 지칭했다. 이들 밑에는 각 연희에 소질이 있는 기능자로서 가열이 있었다. 모든 놀이는 꼭두쇠(연출 및 연행자)·뜬쇠(연행자)·가열(보조자)의 조합으로 실연되었다. 가열의 밑에는 초보자인 삐리가 있다. 이 밖에도 놀이의 기능을 잃은 노인들인 저승패와 등짐꾼인 나귀쇠가 있었다.
○ 풍물 및 버나
남사당 풍물은 흔히 웃다리가락이라 약칭한다. 충청도 이북의 풍물을 웃다리가락이라 하는데, 그 남쪽 지역의 풍물을 아랫다리가락이라 하던 상대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아랫다리가 섬세하게 다듬어진 가락인데 비해, 웃다리는 소박하고 거친 가락이었다. 그러나 남사당은 전국적인 활동을 통해 경상도 및 전라도 풍물의 영향을 받았고, 걸립(구걸)이 잘 되는 중부지역에서 주로 활동을 한 만큼, 웃다리가락이라 해도, 나름대로 특징을 지니고 있어 ‘뜬쇠 풍물’이라는 명칭을 얻기에 이르렀다. 안성의 청룡사 뒷산은 남사당패가 움막을 짓고 겨울을 나던 곳이었고, 중부지역 걸립은 그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된다. 오늘날 평택과 안성 농악은 남사당 풍물과 유사성이 짙은데, 서로의 영향을 방증한다. 풍물잽이들은 보통 스물네 명에서 서른 명 내외로 틀을 짰다. 《판굿》은 〈인사굿〉·〈돌림벅구〉·〈소리판〉·〈겹돌림벅구〉·〈당산벌림〉·〈벅구놀림(양상치기)〉·〈당산벅구놀림(허튼상치기)〉·〈당산돌림벅구〉·〈오방진(오방감기)〉·〈오방진(오방풀기)〉·〈무동놀림〉·〈벅구놀림(쌍줄백이)〉·〈사통백이〉·〈가새(가위)벌림〉·〈좌우치기〉·〈네줄백이〉·〈마당일체(쩍쩍이굿)〉·〈밀치기벅구〉·〈상쇠놀이〉·〈징놀이〉·〈북놀이〉·〈장고놀이〉·〈따벅구〉·〈시나위〉·〈무동서기(새미받기)〉·〈채상놀이〉·〈마당걷이〉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남사당 〈버나〉는 버나, 대야, 대접 같은 용기를 자새(얼레), 긴 담뱃대, 짧은 담뱃대, 앵두나무 막대기 등으로 돌리면서 재담을 주고받는 공연이다. 버나는 돌리기 위해 만든 도구이다. 쳇바퀴를 두께 10cm 가량으로 자르고, 그 양면에 헝겊을 몇 겹 바르고, 원심에 직경 15cm 가량의 가죽을 둥글게 오려 붙인 것이다. 대야는 놋대야로서 밑바닥에 굽(둥근 받침대)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 대접은 보통 백자 대접으로 직경 25cm 내외의 것이다. 자새는 연을 띄울 때 사용하는 자새를 그대로 사용한다. 긴 담뱃대는 길이 60cm 가량, 짧은 담뱃대는 길이 40cm 가량의 보통 담뱃대를 그대로 사용한다. 앵두나무 막대기는 길이 45cm 내외, 직경 6mm 가량의 나무 줄기를 잘라 만든다. 공연은 버나잡이와 곁에 있는 매호씨(어릿광대) 사이에 재담을 주고 받으며 진행된다. 또한 두 연희자는 버나를 돌리며 산염불 가락을 주고 받기도 한다. 〈버나〉의 반주음악은 덩덕궁이 장단과 자진가락을 사용한다.
○ 살판 및 덧뵈기
〈남사당 살판〉은 살판쇠(땅재주꾼)가 몸놀림으로 하는 신체기(기계체조, 묘기)를 위주로 매호씨와의 재담을 곁들이는 공연이다. 놀이판에는 멍석을 깐다. 살판쇠라는 명칭은 ‘살판 죽을판’하는 공연이라는 의미에서 생겼다. 또한 땅 위에서 놀기에 땅재주, 땅재주꾼이라는 용어가 생겼다. 땅재주꾼은 열두 종목의 체기를 보이는데, 연행자의 능력에 따라 종목은 늘어날 수 있다. ① 〈앞곤두〉는 앞으로 걸어가다 손을 짚고 한 번 공중회전하고 선다. ② 〈뒷곤두〉는 뒷걸음으로 가다가 손을 짚고 뒤로 한 번 회전하고 선다. ③ 〈번개곤두〉는 앞으로 가다가 손을 짚지 않고 공중회전하고 선다. ④ 〈자반뒤지기〉는 양발과 양손을 땅에 짚고 몸 전체를 틀어 바닥에 닿지 않도록 뒤집는다. ⑤ 〈팔걸음〉은 두 팔로 짚고 거꾸로 서서 걸어간다. ⑥ 〈외팔걸음〉은 외팔로 거꾸로 서서 뛰어 앞으로 간다. ⑦ 〈외팔곤두〉는 앞으로 가다가 외팔로 짚고 바로 선다. ⑧ 〈앉은뱅이팔걸음〉은 양발을 오므려 책상다리를 하고 거꾸로 서서 걸어간다. ⑨ 〈수세미트리〉는 앞곤두와 같은 것을 큰 원으로 돌며 네 번 반복한다, ⑩ 〈앉은뱅이모발되기〉는, 양손은 엎드려 땅을 짚고, 발은 책상다리로 오므려 붙이고는, 마치 곁에 말(斗)이 있다는 가상으로 양무릎으로 말질을 해서 꾹꾹 눌러 담는 듯이 한다. ⑪ 〈숭어뜀〉은, 하늘을 향해 두 팔로 땅을 짚고 양발은 땅을 디딘 채 손을 떼며 몸을 틀어 일어선다. 다시 양손으로 〈팔걸음〉을 섰다가 양발이 넘어가 처음 자세로 된 후, 다시 몸을 틀어 양발을 하늘로 올려 반대 방향으로 뒤집어 간다. ⑫ 〈살판〉은 껑충껑충 위로 뛰다가 공중에서 몸을 회전하고 선다. 〈살판〉의 반주음악은 칠채가락, 덩덩궁이, 자진가락을 사용한다.
《남사당 덧뵈기》는 ‘덧쓰고 보여준다’는 의미로서 탈춤을 지칭한다. 고을의 탈춤이나 서울의 탈춤과 구분되는, 남사당만의 탈춤이었다. 멍석을 깔아놓은 마당에서 연행했다. 탈춤의 내용은 〈마당씻이〉, 〈옴탈잡이〉, 〈샌님잡이〉, 〈먹중잡이〉 등 네 과장으로 연행된다. 제1과장 〈마당씻이〉에는 꾕과리를 치는 꺽쇠, 장구를 치는 장쇠, 징을 치는 먹쇠가 등장한다. 세 인물들은 덩덩궁이, 취군가락, 자진 덩덕궁이로 한 바탕 연주를 한다. 꺽쇠는 객석에 모인 손님들을 위해 비나리를 하고, 두 사람은 반주를 한다. 제2과장 〈옴탈잡이〉에서 옴탈은 자신이 얼굴에 옴(천연두)이 번진 내력을 말하고, 꺽쇠는 덩덕궁이 장단에 춤을 추며 옴탈을 쫓아낸다. 제3과장 〈샌님잡이〉에서는 샌님과 노친네 부부가 갈등을 벌이다가 샌님이 말뚝이를 찾는다. 샌님과 말뚝이 사이에 갈등이 벌어진다. 말뚝이는 샌님의 절을 받는다. 피조리(처녀) 둘이 나와서 춤을 춘다. 제4과장 〈먹중잡이〉에서 먹중은 피조리들과 어울려 춤을 춘다. 취발이가 등장해 먹중을 쫓아내고, 피조리들과 어울려 춤을 춘다. 취발이는 피조리들을 팔아서 돈을 벌 계획을 밝힌다.
○ 덜미 및 어름
남사당 덜미는 인형의 ‘목덜미를 잡고 논다’는 의미에서 생긴 명칭이다. 덜미는 나무인형을 기본으로 한 원시적인 성격을 유지하고 있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꼭두각시는 등장인물의 하나이자 인형을 뜻하는 말로서 덜미라는 말과 함께 혼용된다. 덜미의 무대를 남사당에서는 포장이라 부른다. 3m 안팎의 평방에 네 기둥을 세우고, 무대 면이 되는 곳에 지상에서 1m 20cm 정도의 높이 위에, 인형이 등장해서 노는 가로 2m 50cm 정도, 세로 70cm 정도의 공간(무대)만 남겨 놓고 사방을 모두 포장으로 둘러친 공중무대이다. 무대 면의 안쪽 공간에는 등장인형의 주조종자인 대잡이가 중심에 앉고, 그 양옆에 대잡이손이 각각 앉아 인형의 조종과 등퇴장을 돕는다. 무대 면 밖의 약간 비스듬한 자리(좌우는 꼭 정해져 있지 않다)에는 받는 재담꾼이자 소리꾼인 산받이와 잽이(악사)들이 관중석과 거의 분리되지 않은 위치에서 무대의 전면을 보고 앉아 놀이를 진행시킨다. 《덜미놀음》은 두 마당, 일곱 거리로 구성된다. 〈박첨지유람거리〉·〈피조리거리〉·〈꼭두각시거리〉·〈이시미거리〉(이상 제1마당), 〈매사냥거리〉·〈상여거리〉·〈절짓고〉(이상 제2마당) 등이다. 반주악기는 꽹과리, 북, 징, 장구, 때로는 피리가 참여한다. 염불, 굿거리, 타령 장단이 주로 사용되며, 〈떼이루따곡〉·〈나이니곡〉·〈보괄타령〉·〈세간〉을 놓는다·〈회심가〉·〈매사냥소리〉·〈상여소리〉·〈장타령〉·〈절 짓는 소리〉·〈잡가〉·〈염불〉·〈시조〉 등을 장면에 따라 부른다.
남사당 줄타기를 어름이라 한다. 살얼음판을 걸어다니듯이 줄 위에서 어려운 묘기를 부린다는 의미에서 생긴 명칭이다. 줄타기 연행자는 광대줄꾼과 어름줄꾼으로 대별된다. 광대줄꾼은 앞서 지적한 고을의 광대들이 대부분이고, 그들 가운데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선상광대로 선발되어 서울에 진출해 공연을 하기도 했다. 보통 고을에서 활동하는 사람을 광대줄꾼이라 했다. 광대줄꾼은 생계를 위해 예능을 전문으로 했던 무계 출신 재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재인청, 신청, 악사청 등과 관련을 맺어, 평소에는 예능을 수련하고, 공연에 초청을 받으면 혼자 또는 동반자와 출연했다. 과거에는 경제력을 갖춘 집안의 생일이나 환갑 잔치, 과거에 합격한 사람의 축하, 집안 어른의 장수를 축하하는 노인잔치 등에서 줄꾼을 초청해 공연하는 것이 하나의 관습이었다. 가장 놀랍고 쾌감을 주는 것이 줄타기였던 까닭이다. 이와 같은 광대줄타기에 대해 남사당을 비롯한 유랑연희단체의 줄타기를 《어름줄타기》라 했다. 남사당패의 어름줄꾼으로는 1960년대에 40대의 여성광대(조송자, 1927~2000)가 활약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새로 결집되어 1960년대에 본격적으로 공연활동을 한 남사당패는 대부분이 결혼한 가족을 지녔고, 여성광대가 참여함으로써, 과거 남사당패 본연의 성격을 잃게 되었다. 《어름줄타기》는 매호씨와의 재담이나 노래(〈중타령〉, 〈풍년가〉), 줄고사 등으로 이루어지는 점에서 광대줄타기와 구분된다. 광대줄꾼은 자기를 초청해준 신분이 높은 관객을 고려해, 필요한 재담만을 했고, 재담을 하더라도 익살스럽고 풍자적인 재담을 억제했다. 줄의 높이는 3m, 길이는 5~6m의 녹밧줄을 이용했다. 녹밧줄은 삼껍질로 꼰 직경 3cm 정도의 동아줄이다. 어름줄꾼의 열일곱 기예로는 앞으로 가기, 장단줄, 거미줄 늘리기, 뒤로 훑기, 콩심기, 화장사위, 참봉댁 맏아들, 억석애미 화장사위, 처녀 총각, 외호모거리, 허궁잽이, 가새트림, 외허궁잽이, 쌍허궁잽이, 양반 병신걸음, 양반 밤나무 지키기, 녹두장군 행차 등이 있다. 반주음악은 움직임에 따라 염불장단, 타령장단, 굿거리장단, 길군악장단 등을 연주했다.
남사당패는 가면극인 덧뵈기, 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이뿐만 아니라, 줄타기·대접돌리기·땅재주 등 요즘의 서커스에 해당하는 전통연희를 전승하고 있는 유일한 전문예인집단이다. 남사당은 조선 후기의 사당, 거사, 굿중패와 더불어 재승(才僧)계통 연희자들의 후예이다. 재승 계통의 연희자는 삼국시대에 이미 존재했다. 대표적인 예로 신라 원효의 무애희는 재승 계통 연희자에 의해 고려를 거쳐 조선 전기까지 전승되었다. 남사당패는 관계를 맺고 있는 사찰에서 내준 부적을 가지고 다니며 팔고, 그 수입의 일부를 사찰에 바쳤다. 그래서 남사당패들은 자기들의 수입으로 불사를 돕는다는 것을 내세웠다. 남사당패의 꼭두각시놀이 중 건사(建寺)거리에 절을 짓는 내용이 있는 것은 그들이 명분으로 내세우는 공연목적과 일치한다.
1964년 12월에 꼭두각시놀음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88년 8월에 꼭두각시놀음을 포함한 남사당놀이로 명칭 변경되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09년에 남사당놀이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었다.
노동은, 『한국근대음악사(1)』, 한길사, 1995. 박용태ㆍ양근수, 『박첨지가 전하는 남사당놀이』, 앰애드, 2008. 송석하, 『한국민속고』, 일신사, 1960. 서연호, 『꼭두각시놀음의 역사와 원리』, 연극과인간, 2001. 심우성, 『남사당패연구』, 동문선, 1989. 이능화ㆍ이재곤 역, 『조선해어화사』, 동문선, 1992. 이호승ㆍ신근영, 『줄타기ㆍ솟대타기』, 민속원, 2020. 전경욱, 『한국의 전통연희』, 학고재, 2004. 衫山二郞, 『遊民の系譜』, 靑土社,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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