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귀, 매구굿, 매귀희
섣달그믐이나 정초에 나쁜 액을 쫓아내는 벽사의식
나쁜 액을 몰아내는 벽사의식으로서 연희와 음악은 고대에서부터 지속되어 온 전통이다. 고대 중국황실에서 제례나 연향 때 사이(四夷)의 악(樂)을 함께 연주케 하였는데, 이때 동이(東夷)의 악(樂)인 매(眛)를 함께 연주했다고 전한다. 고대 중국의 기록에 동이의 악을 지칭할 때 표기한 『주례(周禮)』의 매(韎)나 『예기(禮記)』의 매(眛)는 우리말 ‘매’의 음차로 추정된다.
16세기에 기록된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궁중에서 섣달그믐에 어린아이 수십 명을 모아 붉은 옷으로 치장하고 방상시와 함께 악귀를 쫓아내는 연희를 했는데, 이를 〈방매귀(放枚鬼)〉라고 하였다. 해남 대흥사에 전하는 『설나규식(設儺規式)』에서는 “『논어(論語)』의 향인나례(鄕人儺禮)는 방상시가 맡아 축귀하는데, 동속(東俗)에서는 혹 매귀(埋鬼)라고 말하고”라고 하여 〈매구굿〉을 〈나례〉와 기능적으로 유사한 한국의 민간 전통으로 설명하였다. 19세기에 기록된 『봉성문여(鳳城文餘)』에는 섣달그믐부터 정초까지 봉성문 밖에서 탈과 귀면(鬼面)을 쓴 사람과 농악대가 매귀희(魅鬼戲)를 했다고 하고, 1889년 기록된 『경상도함안군총쇄록(慶尙道咸安郡叢瑣錄)』에는 아동과 장정 수십여 명이 관아에 들어와 악기를 연주하고, 거한(巨漢)이 얼굴에 탈을 쓰고 각종 재주를 벌였는데, 이를 세속의 매귀희(魅鬼戲)라고 하였다.
고려시대 중국에서 나례가 들어오면서 매귀굿을 민간의 나례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고대시대부터 한국의 음악이나 연희를 ‘매’라고 하였고, 민간에서 매구ㆍ매귀ㆍ매굿ㆍ매구굿이라는 용어를 줄곧 사용해온 점을 고려하면 매굿의 역사는 매우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나쁜 액을 몰아내는 벽사의식으로서 연희와 음악은 고대에서부터 지속되어 온 전통이다. 고대 중국황실에서 제례나 연향 때 사이(四夷)의 악(樂)을 함께 연주케 하였는데, 이때 동이(東夷)의 악(樂)인 매(眛)를 함께 연주했다고 전한다. 고대 중국의 기록에 동이의 악을 지칭할 때 표기한 『주례(周禮)』의 매(韎)나 『예기(禮記)』의 매(眛)는 우리말 ‘매’의 음차로 추정된다. 16세기에 기록된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궁중에서 섣달그믐에 어린아이 수십 명을 모아 붉은 옷으로 치장하고 방상시와 함께 악귀를 쫓아내는 연희를 했는데, 이를 〈방매귀(放枚鬼)〉라고 하였다. 해남 대흥사에 전하는 『설나규식(設儺規式)』에서는 “『논어(論語)』의 향인나례(鄕人儺禮)는 방상시가 맡아 축귀하는데, 동속(東俗)에서는 혹 매귀(埋鬼)라고 말하고”라고 하여 〈매구굿〉을 〈나례〉와 기능적으로 유사한 한국의 민간 전통으로 설명하였다. 19세기에 기록된 『봉성문여(鳳城文餘)』에는 섣달그믐부터 정초까지 봉성문 밖에서 탈과 귀면(鬼面)을 쓴 사람과 농악대가 매귀희(魅鬼戲)를 했다고 하고, 1889년 기록된 『경상도함안군총쇄록(慶尙道咸安郡叢瑣錄)』에는 아동과 장정 수십여 명이 관아에 들어와 악기를 연주하고, 거한(巨漢)이 얼굴에 탈을 쓰고 각종 재주를 벌였는데, 이를 세속의 매귀희(魅鬼戲)라고 하였다. 고려시대 중국에서 나례가 들어오면서 매귀굿을 민간의 나례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고대시대부터 한국의 음악이나 연희를 ‘매’라고 하였고, 민간에서 매구ㆍ매귀ㆍ매굿ㆍ매구굿이라는 용어를 줄곧 사용해온 점을 고려하면 매굿의 역사는 매우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 연행시기와 장소 매굿은 섣달그믐에 가정을 비롯하여 사람이 거주하는 곳곳의 공간에서 연행한다. 한 해가 끝나는 섣달그믐에 묵은 해를 보내면서 액막이굿을 하는 것이다. 정월의 농악은 제의적으로 마을신과 가택신으로부터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데 반해, 섣달그믐의 매굿은 한 해가 끝나는 시점에 액을 막고 삶의 공간을 정화하는 데 초점이 있다. 그래서 조선시대 기록에는 액을 물리치는 방상시나 귀면(鬼面)을 착용한 연희자가 등장하고, 근래에까지 매굿을 전승한 마을에서는 농악의 절차보다 마을의 모든 공간을 돌아다니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섣달그믐의 매굿은 호남지역에서 근래에까지 지속되었으나 현재는 대부분 중단되거나 소멸한 상태다. 완도나 추자도 등의 섬지역에서 일부 전승되고 있다.
《임실 필봉농악》에서는 섣달그믐날 밤에 마을의 사악한 것을 쫓고 경사스런운 것을 불러들이기 위해 매굿을 쳤다. 섣달그믐날 오후 여섯 시 무렵 동청마당에서 나발수가 소리로 신호하면, 쇠꾼들이 모여 당산과 가정집을 돌며 쇳가락을 몰아치며 매굿을 쳤다. 가정에서는 정월 당산제 기간에 제물로 사용할 쌀이나 돈을 내놓는다. 매굿은 정해진 절차 없이 한바탕 치고 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김제농악》에서는 섣달그믐날 밤 당산제를 지내고 가가호호를 돌며 매굿을 쳤다. 밤 12시를 기해 당산제를 지낸 후 마을로 내려와 《샘굿》을 치고, 이장집을 시작으로 마을의 모든 가정을 돌며 매굿을 쳤다. 마당밟이는 정월 초사흗날부터 다시 가가호호를 돌며 연행했다.
군산시 옥구읍 복교리에서는 섣달그믐날 밤에 치는 농악을 매굿이라고 한다. 매굿은 마을에 잡귀를 몰아내고 새해에 복을 불러들이며 평안을 기원하는 농악이다. 밤 8시쯤 모여서 〈당산굿〉을 시작으로 공동우물과 가가호호를 돌며 매굿을 쳤다. 밤새도록 집집마다 들려서 매굿을 모두 치고 나면 마을 한가운데 모여서 굿가락을 얼르고 쇠가락을 마친 다음 일체 쇳소리를 내지 않고 해산한다.
익산시 왕궁면 광암리에서는 섣달그믐에 매굿을 치고 정초에 마당밟이를 하였다. 섣달그믐이 되면 당산에 영기와 농기를 꽂아놓고 〈당산제〉를 지낸 다음 마을 우물에서 〈우물굿〉을 치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걸립굿을 쳤다.
고창군 해리면 구동호마을에서는 섣달그믐에 가가호호를 돌며 치는 농악을 매굿이라고 하고, 정월 보름의 마당밟이를 〈걸립〉이라고 한다. 섣달그믐이 되면 초저녁부터 마을의 모든 가정을 돌아다니며 매굿을 쳤다.
신안군 가거도에서는 섣달그믐에 농악대와 공기총을 든 사람이 가정과 공공기관을 돌면서 허공에 총을 쏘며 매굿을 연행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매굿의 연행은 중단되거나 소멸한 상태다. 다만, 완도 노화도나 제주 추자도 섬지역에서는 매굿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지만, 섣달그믐과 정월보름의 농악을 구분하여 연행하고 있다.
매굿의 전통은 나례와 정월보름 민속이 결합되면서 근래에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시대부터 제의적 연희를 ‘매’라고 불렀으나, 고려시대 이후 나례가 들어오면서 섣달그믐이라는 시간성이 부각되고 액막이굿으로서 성격이 공고해진다. 또 한편으로는 정월보름의 마을굿과 결합하여 〈지신밟기(마당밟이)〉 형태로 지속된다. 그래서 조선시대 이후 섣달그믐의 액막이굿을 매귀희로 인식하는 전통이 있는가 하면, 농악으로 마을굿을 행하는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는 제의적 농악을 매구ㆍ매굿으로 통칭하는 전통이 동시에 존재한다. 현재 섣달그믐에 행하는 매굿의 전통은 대부분 중단되거나 소멸하였고, 마지막까지 명맥을 유지하던 곳은 호남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고창농악보존회, 『고창의 마을굿』, 나무한그루, 2010. 문화재관리국, 『전라북도국악실태조사』,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2. 이옥,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역, 『완역 이옥 전집2 –그물을 찢어버린 어부』, 휴머니스트, 2009. 양진성 외, 『임실필봉농악』, 민속원, 2016. 정병호, 『농악』, 열화당, 1986. 송기태, 「마을굿에서 풍물굿의 제의수행과 구조-전남 완도지역을 중심으로」, 『남도민속연구』 17, 2008. 황경숙, 「한국 고대벽사의례와 나례연구」, 부산대 박사논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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