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립(乞粒), 걸공(乞功), 걸궁(乞躬), 걸량(乞糧), 걸행(乞行), 행걸(行乞)
마을이나 특정 집단이 공동의 재원 마련을 위해 농악을 치며 축원을 해주고 돈과 곡식을 기부받는 일
조선시대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사찰의 승려들이 공적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걸립굿이 확산된다. 민간의 농악대도 마을의 동청 건립, 다리 보수, 동제 비용 마련, 시장 설립 및 홍보, 서당 비용 마련 등 다양한 목적을 위해 걸립 활동을 한다. 걸립굿은 연희를 선보이고 돈과 곡식을 모금하는 방식으로, 일반적인 농악에 비해 격식과 절차가 발달하고, 예능의 수준이 뛰어나야만 했다.
○ 조선시대 걸립굿의 성립
걸립굿은 연희집단이 마을과 지역 사회 곳곳을 돌아다니며 연희를 베풀고 곡식과 돈을 걷는 점에서 조선시대 이전부터 활동하던 광대, 재인, 수척, 사당 등의 다양한 연희활동에서 기원을 찾는다. 그러나 공적인 기금 마련을 목적으로 하는 걸립굿의 형태는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 이후 성립된다. 조선시대 불교에 대한 정책적 탄압으로 사찰의 물적 기반이 해체되면서 의식을 담당했던 승려들이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민간의 무당 및 재인, 광대와 어울리며 연희 담당층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때부터 사찰의 기금 마련을 명분으로 내세운 걸립굿이 확산되고, 『조선왕조실록』에 걸립과 관련된 기록이 다수 등장한다. 『세조실록』 14년 5월 4일조에는 “승인(僧人)의 사장(社長)들이 혹은 원각사(圓覺寺)의 불유(佛油)를 모연(募緣) 한다 일컫고, 혹은 낙산사(洛山寺)를 영건(營建)하는 화주(化主)라고 일컬어, 여러 고을의 민간에게 폐(弊)를 끼치는 자가 자못 많습니다.”라고 사당패 계통의 연희자들이 중창불사를 내세우며 걸립굿을 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 전문연희집단의 절걸립 활동
조선시대 사찰의 중수기에는 걸립굿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사례들이 있다. 남해 화방사에는 1744년 중창불사를 위한 걸립굿에 대해 “대서특필한 스물다섯 글자 중에서 매귀(埋鬼)의 교묘함으로 대업황제궁(大業皇帝宮)의 금수(錦繡)의 장식을 재단하여 무동(舞童)에게 입혀서 북을 쳐서 쟁인(錚人)들을 내보내고, 장삼을 걸친 화주승(化主僧) 자감(自甘)은 인인군자(仁人君子) 앞에서 합장하여 권선(勸善)하고, 현승(賢僧) 민색(敏賾)은 또 동서남북(東西南北)의 마을마다 차수(叉手)하여”라고 하여 농악을 지칭하는 ‘매귀(埋鬼)’를 명시하고, 관련 연희자들에 대해서 기록하였다. 장흥 보림사에서는 “기유년(1789년) 봄 정장(正裝)으로 금고(金鼓)를 발하니, 좌우 양도에서 구재(鳩財)를 건립하고, 또한 그 절에서 지냈던 승려와 살았던 사람들이 힘을 다해 재물을 거두어”라고 하여 농악을 지칭하는 금고(金鼓)를 연행하며 모금했음을 밝히고 있다.
조선 후기에 활동한 전문연희패는 남사당패, 사당패, 대광대패, 솟대쟁이패, 초라니패, 풍각쟁이패, 광대패, 걸립패, 중매구, 굿중패 등 다양한데, 다수의 연희패는 걸립패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바우덕이로 유명한 경기도의 남사당패는 안성 청룡사를 거점으로 하였고, 남해에서 유명했던 중매구패도 화방사를 거점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연희의 명분을 사찰과 관련시켜 권선문이나 신표를 제시하였다.
조선시대 걸립굿의 다양함과 빈번함에 대해서는 문중의 걸립패 관련 지출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영암의 남평문씨 문중에 전하는 『족계용하기(族契用下記)』와 『소종계용하기(小宗契用下記)』에는 1816년부터 1880년까지 65년 동안 각각 20회와 30회의 걸립굿 관련 지출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해당 기간에 마을의 농악대와 사찰, 신청(神廳), 서학당(書學堂), 무학당(武學堂) 등 다양한 걸립굿 집단이 활동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절걸립패를 위시한 전문연희집단의 걸립 활동은 근대시기에 접어들면서 대부분 소멸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전라도 세습무계 예인들이 ‘포장걸립’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으며, 1960년대를 전후로 소멸한다.
○ 민간의 마을 단위 걸립 활동
마을 단위의 걸립굿은 정월 대보름 마을굿 기간에 가가호호를 돌며 〈마당밟이〉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과거에는 공적인 일이라도 민간에서 스스로 재원을 확보해야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마을굿으로 행하는 〈마당밟이〉가 걸립굿과 동의어처럼 통용되기도 했다. 동제의 비용 마련에서부터 마을회관에 해당하는 동청 건립, 하천의 다리 보수, 농악대의 악기 구입 등에 필요한 공동 기금을 스스로 마련하기 위해 〈마당밟이〉 때 가가호호를 돌며 쌀과 돈을 기부받았기 때문이다.
마을 단위의 걸립패는 주로 마을 내부에서 활동하지만, 많은 기금을 모금해야 하는 경우에는 인근의 마을이나 시장을 돌며 걸립을 했다. 마을주민으로 구성된 농악대가 걸립을 하는 사례도 많지만, 경기ㆍ충청ㆍ전라지역은 전문연희자나 세습무계예인들이 결합하여 걸립패를 구성하는 형태도 많았다. 특히 모금액의 규모가 크거나 장기간 걸립을 해야 하는 경우에는 전문적인 연희자들이 결합하는 사례가 많았다.
걸립패가 타 마을로 들어갈 때는 특별히 격식을 갖추어야 했다. 받아들이는 마을에서 걸립패의 격식과 예능 수준을 파악한 후 허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걸립패 활동이 왕성한 마을의 농악은 지역에서 예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 곳이 많다. 현재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대부분의 농악대는 과거 걸립패 활동이 왕성했거나, 상쇠나 설장구 등의 예인이 전문적인 걸립패 활동을 한 사례가 많다. 마을 단위의 걸립굿은 1970~80년대까지 왕성하게 행해졌으나 마을농악의 전승이 약화되면서 일부 지역에서 〈마당밟이〉의 일환으로 지속되고 있다.
○ 연행 시기와 장소
걸립굿은 목적에 따라 구분되기도 한다. 마을에서는 마을굿 기간에 정례적이거나 상시적으로 걸립을 하지만, 특별한 목적이 있을 때는 그에 따른 이름을 부여한다. 그리고 20세기 중반까지 마을이 아닌 특정 집단이 공적인 목적으로 다양한 걸립활동을 했다.
목적에 따른 걸립으로는 마을회관에 해당하는 동청을 개보수하기 위한 ‘동청걸립’, 하천의 다리를 놓기 위한 ‘다리걸립’, 우물을 새로 만들거나 보수하기 위한 ‘샘걸립’, 강 유역에서 나룻배 건조 배용 마련을 위한 ‘배걸립’, 장터를 신설하거나 이전하면서 홍보를 목적으로 〈난장굿〉을 연행하는 ‘시장걸립’, 사찰의 운영비나 중수비 마련을 위한 ‘절걸립’, 서당의 운영비 마련을 위한 ‘서당걸립’, 재인청ㆍ신청ㆍ광대청ㆍ취고청 등으로 불리는 예인조직의 운영비 마련을 위한 ‘신청걸립’ 등 다양하다. 1970~80년대에는 의용소방대의 장비 구입을 위한 ‘소방대걸립’도 곳곳에서 행해졌다.
이러한 걸립활동은 20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대부분 중단되는데, 그 이유는 20세기 중반 이후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과 사회간접자본이 확충되면서 민간이 스스로 공적 기금을 마련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현재는 일부 마을 단위에서 자체 기금을 마련할 목적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 절걸립의 연행 내용
걸립굿은 공적인 명분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걸립의 목적을 밝히는 문서로 통문(通文), 통장(桶狀), 권선문(勸善文) 등을 작성하여 들고 다니거나 배포하였다. 걸립굿 중에서 조선 후기 절걸립과 관련된 기록은 해남 대흥사에 전하는 『설나규식(設儺規式)』을 통해 확인된다.
『설나규식』 은 대흥사의 13대 대강사(大講師)인 범해각안(梵海覺岸, 1820-1896)이 구본(舊本)에 따라 편차(編次)한 것이다. 전체 내용은 6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 각항문첩(各項文牒) - 절걸립을 하게 된 연유를 기술하고, 허가를 받기 위해 각 영·읍·마을 등에 보내는 통문(通文)과, 사찰이나 마을에 들어갈 때 전달하는 고목(告目)이나 서간(書簡)의 내용을 구분하여 기술하고 있다. 뒤이어 치진장(馳進狀), 현알장(現謁狀), 연명장(聯名狀)에 내용도 기술되어 있다. 각각의 기술 내용은 공간과 상황에 따라 제시되는 것이다.
㉯ 인참점반(人站點飯) - 인원을 점검하고 식사를 대접 받는 것 등의 내용이다.
㉰ 문장거래(文狀去來) - 걸립을 들어가기 위해 문 앞에 영기를 세우고 문서를 보여 주고 허가를 받아 들어가는 것에 대한 내용이다.
㉱ 문장회사(文狀回謝) - 삼로오행문귀, 영산다나귀 등을 비롯한 판굿을 연행하는 내용이다.
㉲ 다담악공(茶談樂工) - 연행을 마치고 각 치배들을 불러 치하하고, 악공들로 하여금 음악과 노래를 하게 하는 내용이다.
㉳ 공사치하(公私致賀)1 - 감사 인사를 하는 내용으로 마을이나 사찰, 개인집 등등을 구분하여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근래의 절걸립 관련 내용은 평택농악 보고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평택농악의 故최은창 상쇠를 비롯한 초창기 회원들은 〈난장굿〉과 〈절걸립〉, 〈촌걸립〉 등을 하는 전문연희자들이었다. 〈절걸립〉은 연희보다 고사염불을 주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인원 구성이 간단했다. 대개 7~8명 정도로 화주 1명, 쇠 1명, 장고 1명, 징 1명, 북 1명, 법고 2명, 탁자 1명으로 구성되었다. 걸립을 시작하면 먼저 경찰서에 들러 권선문을 보여주며 허락을 받고, 상가나 가정을 돌며 집돌이를 하였다. 집돌이는 간단히 선고사와 뒷염불(고사소리)로 구성되었다. 집돌이를 한 후에는 근처의 여각에서 숙박하며 당일 모금한 돈을 역할에 따라 분배하였다.
○ 마을걸립의 연행 내용
마을걸립굿은 〈절걸립〉에 비해 예능적인 요소가 부각되고 복잡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마을마다 예능의 절차와 구성은 다르지만 큰 틀에서 ‘입동 허락 – 당산굿 – 우물굿 – 집돌이 – 판굿 - 당산굿’의 순서로 진행한다. 걸립패가 마을로 들어가기 위해 먼저 주민들의 허락을 받고, 마을에서 중요시하는 당산과 우물에 인사를 한 다음 가가호호를 돌며 마당밟이와 같은 방식으로 농악을 연행한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부잣집 마당이나 마을 공터에서 〈판굿〉을 치고, 걸립굿을 마무리하면서 마을 당산에 인사를 한 후 마을을 빠져 나온다.
마을 단위 걸립굿의 경우 영동과 경상지역은 순수한 마을의 농악대가 주도하고, 경기ㆍ충청ㆍ전라지역은 전문연희자나 세습무계예인들이 결합하여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기지역에서는 마을을 대상으로 한 걸립을 〈촌걸립〉이라고 하는데, 영험한 산신을 만장 형식의 낭기에 내려받아서 들고 다니기 때문에 〈낭걸립〉이라고도 한다.
걸립굿에서 가장 중요한 절차는 ‘입동 허락’이다. 마을에서 걸립패의 격식과 예능을 시험하기 때문이다. 걸립굿이 발달한 전라도에서는 걸립패를 받아들일 때 먼저 수수께끼 방식으로 지혜와 격식을 시험하고, 이를 통과하면 두 개의 영기로 문을 세워 〈문굿〉을 치도록 한다. 세습무계 예인들의 결합으로 예능이 발달한 호남우도농악 권역의 고창농악은 〈문굿〉의 절차를 복잡하게 구성하여 ‘나발 3초–울령수ㆍ문안인사-좌창ㆍ우창의 협의-한마당 삼채-치배 입장과 춤굿-문 앞 정렬-아군ㆍ적군힘겨루기-개인놀이-지와밟기-콩등지기-투전치기-밀치기-강강술래-주인주인 문여소-문열기-한마당’의 순으로 진행한다.
1) 목차에는 ‘공사치하(公私致賀)’로 기재되어 있고, 실제 본문에는 ‘공무치하(公務致賀)’로 기재되어 있다.
걸립굿은 공적인 기금 마련을 위한 명분을 중시하는 점, 걸립의 허락을 구하는 격식이 발달한 점, 농악대의 예능발달에 기여한 점에서 특징과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첫째, 걸립굿은 민간의 공적 기금 마련이라는 실질적 활동이었다. 사찰의 중수를 비롯해 마을이나 지역, 집단의 공적 자금을 모으는 일환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적인 명분은 지역을 넘나들며 연희를 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조선 후기 남사당패를 비롯한 전문연희집단들도 전국을 유랑할 때 사찰의 신표나 권선문을 제시함으로써 활동의 정당성을 부각하였고, 마을 농악대도 사사로운 활동이 아니었기에 인근 마을을 돌아다니며 걸립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걸립굿은 공적 기금을 마련한다는 명분이 중시되는 연희인 점에서 특징이 있다. 둘째, 형식상 반드시 걸립패와 상대방이 존재하는 점에서 격식이 중요했다. 대흥사의 『설나규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절걸립〉은 상대방과 의사소통을 하는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그리고 마을농악대의 걸립도 상대방 마을에서 지식과 예능을 시험했기 때문에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즉, 걸립굿은 반드시 상대방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점에서 명분과 함께 격식이 중시되는 연행으로서 특징이 있다. 셋째, 걸립굿은 농악 예능이 발달하는 중요한 기제로 작용했다. 농악의 다른 연행이 의례나 노동과 결합한 기능 중심인 데 반해, 걸립굿은 예능을 선보이고 그 대가로 돈과 곡식을 모금하는 것이어서 예능의 수준이 높지 않고서는 행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걸립굿의 발달은 농악 예능의 발달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관련하여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다수의 농악이 과거 전승과정에서 걸립굿을 했던 사례가 많고, 유명한 상쇠나 설장구 등의 예인들은 대부분 걸립패로 활동한 경험이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평택농악』, 국립문화재연구소, 1996. 정병호, 『농악』, 열화당, 1986. 송기태, 「서남해안지역 걸립 문서에 나타난 지향과 문화적 권위」, 『실천민속학연구』 16, 2010. 송기태, 「19세기 양반층의 걸궁기록을 통해 본 전라도 농악문화 발달의 단편」, 『무형유산』 8, 2020.
송기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