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 시장굿, 백중 난장굿, 파일 난장굿
상인과 행인이 모여드는 시장에서 농악대와 연희패가 판을 벌여 놀이하는 것을 난장굿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정기적으로 열리는 시장이 아닌 특별한 시기에 비정기적으로 열리는 시장을 난장이라 하고, 이때 농악대나 연희패를 초청하여 공연판을 벌이는 것을 난장굿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기적인 시장의 활성화를 위해서도 난장굿을 하였다. 난장ㆍ난장굿은 시장에서 연행하는 공연판을 지칭하는 의미에서 출발했으나, 점차 격식이나 형태의 제한됨을 벗어나 다양한 연희를 벌이는 열린 판의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난장굿의 유래는 명확하지 않으나 조선 후기 활성화된 시장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7~18세기 농업생산력이 증대되고 상업이 활성화되면서 시장이 활성화되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터는 연희패와 농악대의 중요한 활동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기존 관 주도의 시전체계(市廛體系)가 쇠퇴하고 사상체계(私商體系)가 성립하면서 18세기 말에 이르면 전국적으로 천여 개에 달하는 장시(場市)가 설치된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 속에서 전문적으로 연희를 행하는 유랑예인집단도 활동이 더욱 활발해지는데, 이들 예인집단은 대부분 마을과 시장, 파시(波市) 등에서 공연하였다.
시장을 새롭게 설립하거나 기존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상인들은 ‘난장을 튼다’고 하여 다양한 연희패를 초청하고, 씨름판 등의 행사를 기획하였다. 시장의 인지도를 높이는 홍보행사를 하는 것인데, 상인들은 다양한 연희판을 벌여 지역민들에게 시장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했고, 연희패들은 자연스레 모여든 관객들에게 연희를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후기에 활동한 남사당패, 사당패, 대광대패, 솟대쟁이패, 산대놀이패 등의 연희패와 지역의 전문적인 농악대는 난장을 무대로 연행하였다.
난장굿의 전통은 일제강점기에도 지속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경기도 《양주별산대놀이》는 난장 때 주로 놀이를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양주지역에서는 난장을 트면 《양주별산대놀이》를 비롯해 소리꾼, 광대줄타기 등이 초청되어 놀이판을 벌였다고 한다. 남사당패의 후예들도 난장에서 공연을 하였다. 지역의 시장에서 난장을 트면 주로 인근에서 기능이 뛰어난 두렁쇠가 연행하는데, 규모가 클 때는 남사당패나 솟대쟁이패가 초청되기도 했다. 진주에 거점을 두었던 솟대쟁이패는 1936년 해체되기 전까지 오일장과 난장을 돌아다니며 솟대놀음, 죽방울받기, 살판, 얼른 등의 다양한 공연을 했다고 한다.
유랑연희패가 소멸한 해방 후에는 지역의 전문적인 농악대가 난장굿의 전통을 지속한다. 전라도의 농악대는 포장걸립패나 여성농악단을 결성하여 축제장이나 시ㆍ군의 시장 및 공연장에서 공연을 하고, 경기도 《평택농악》 예인들은 초파일과 백중 때 시장에서 난장굿을 하였다.
난장굿은 공간적으로 시장과 관련되는데, 시대가 지나면서 ‘난장’의 의미가 ‘여러 사람이 어지러이 뒤섞인 상황’을 지칭하게 되고, 농악을 비롯한 전통연희가 제의나 노동의 목적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판을 형성하면서 최근에는 ‘공연자와 관객이 자유롭게 섞이는 연희판’을 난장굿으로 인식한다.
시장의 난장에서 연희를 벌이는 전통은 대다수의 연희패와 농악대에서 확인되고, 조선시대 이후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난장의 연희를 특별히 구분하여 ‘난장굿’으로 정립한 형태는 많지 않다. 현재는 경기도 《평택농악》에서 독자적인 난장굿의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난장이 서려면 먼저 난장을 트고자 하는 사람이나 단체가 비용을 지불하고 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관의 허락이 떨어지면 주최자들은 난장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홍보하여 되도록 많은 장사꾼과 사람들이 모이도록 한다. 난장을 주선한 주최자들은 난장에 참여한 장사꾼으로부터 일정 금액을 걷어 자신들의 수입으로 삼았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하기 위해서는 볼거리가 필요하게 되고, 이를 위해 난장의 주최자들은 전문연희패에게 의뢰했다. 연희패의 대표와 난장 주최자 사이에 계약이 이루어지면 연희패는 단원들을 불러 모아 다양한 연희를 선보였다. ○ 연행시기와 장소 난장은 정기적인 시장 외에 임시로 특별히 열리는 장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대개 난장을 통하여 여러 사람이 모일 필요가 있는 특수한 지역이나, 특산물이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공급되는 시기, 명절이나 기념일 등에 열린다. 평택지역에서는 주로 음력 4월 초파일과 7월 백중에 난장을 텄다. 그래서 난장의 이름도 ‘파일 난장’, ‘백중 난장’으로 불렸다. 난장이 열릴 때 상인들과 사람들을 끌어모아 시장경기가 부양될 수 있게 하려고 전문적인 연희패나 농악대를 불러 장터 한가운데서 굿을 놀게 하였는데, 이때의 놀이가 난장굿이다. 평택을 비롯한 인근 지역에서는 백중을 중요하게 여겨 백중놀이를 푸짐하게 열고, 시장에서 백중 난장굿도 성행했다. 평택 인근의 안중, 안성, 오산, 안산, 용인, 수원 등지에서도 난장굿이 성행했다. 백중 난장굿에 비해 파일 난장굿은 그리 흔하지 않은 판이었다. 파일 난장굿의 경우 평택농악의 윗대 상쇠 최은창(崔殷昌, 1915~2002)도 안중과 오산에서 두어 번 참가해보았을 뿐이라고 한다.
《평택농악》에서 난장굿을 칠 때 편성되는 인원은 8잽이(쇠 2명, 징 1명, 장고 3명, 북> 2명)와 8법고, 8무동, 농기, 호적, 양반 등으로 구성된다. 〈판굿〉을 더욱 화려하고 푸짐하게 하기 위해서 법고를 10법고나 12법고로 확장할 수도 있다.
난장굿의 연행 절차는 〈길놀이〉로 이목을 집중시키고 〈판굿〉을 벌이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복색과 악기를 갖춘 연희패가 난장이 열리는 장터에 도착하면 우선 장터 주변을 다니면서 〈길놀이〉를 한다. 이는 되도록 여러 사람들의 이목을 모아 난장이 형성되었음을 알리고 장터를 북적이게 하기 위해서다. 〈길놀이〉를 끝내고 연희패가 장터 가운데로 들어오면 〈판굿〉을 한다.
백중의 두레 난장굿과 초파일의 파일 난장굿의 절차는 유사한데, 파일 난장굿의 경우 ‘등대’라고 하여 연등을 장대 끝에 매달아 세워놓고 〈등대굿〉을 치는 절차가 추가된다. 이때는 난장굿을 학기 전에 10m 길이의 등대를 만들고, 〈길놀이〉를 마친 후 등대 앞에 고사상을 차려놓고 〈등대굿〉을 친다. 일반적인 난장굿의 〈길놀이〉 – 〈판굿〉 중간에 〈등대굿〉을 하는 것이다.
〈판굿〉은 일반적인 공연에서 연행하는 〈판굿〉의 구성과 같다. 농악대가 판 안으로 입장해서 ‘인사굿 – 돌림법고 – 당산벌림1 – 오방진 – 돌림법고 – 당산벌림2(무동놀리기, 법고놀이) - 사통백이 – 돌림좌우치기 – 합동좌우치기 – 가새벌림 – 쩍쩍이춤(연풍대) - 돌림법고 – 무당놀이 – 채상놀이 – 인사굿’의 순서로 연행한다.
난장굿은 시장에서 난장을 트는 기간 동안 여러 날에 걸쳐 반복적으로 연행되곤 했다. 장터의 흥을 돋우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길놀이〉를 할 때도 있는데, 대개는 오전과 오후에 한 번씩 〈길놀이〉와 〈판굿〉을 연행했다.
난장굿은 조선후기 연희패가 상업적 예능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남사당패를 비롯한 다양한 유랑연희패는 연희를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상인과 사람들이 모이는 시장은 관객을 별도로 모으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조선후기 상업의 발달과 시장의 활성화, 유랑연희패의 증가는 자연스러운 인과관계를 형성하는데, 상업적인 연희판이라는 점에서 전문적인 연희가 발달하는 배경으로도 작용했다. 연행의 성격 면에서 ‘다양한 연희를 벌이는 판’의 의미가 강하다. 전통적으로 농악을 비롯한 민간의 예능은 대부분 마을의 제의나 노동과 결합하여 목적에 따른 기능성이 강조되는데, 난장굿은 다양한 연희를 펼치는 공연성이 강조된다. 그래서 난장굿은 일정한 형태나 방식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열린 공간에서 예능을 선보이는 것에 특징이 있다. 난장굿을 별도의 연행 형태로 전승하는 평택농악도 장터에서 벌이는 농악을 난장굿이라고 부르지만 그 연희형태는 농악의 예능이 집약된 〈판굿〉을 중심으로 구성하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다양한 유랑연희패가 소멸하고 현대사회에 들어서면서 전통시장에서 행하는 난장굿은 약화되었지만, ‘열린 판’으로서 난장ㆍ난장굿은 여전히 지속하고 있다. 현재 지역마다 축제 성격의 연희판을 마련할 때 흔히 ‘난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연희패들도 형식과 내용을 넘어서 다양한 예능을 선보일 때 ‘난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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