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군놀이, 여원무, 자인팔광대놀이, 호장군행렬 등
경산자인단오제는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지역의 수호신인 한장군을 위한 의례가 중심이며, 단오절에 〈한묘제〉를 봉행하고 아울러 〈자인단오굿〉, 〈호장군행렬〉, 〈여원무〉, 〈자인팔광대놀이〉를 비롯하여 단오절의 민속연희를 거행하는 고을굿이다.
경산단오제는 수릿날에 행해지는 특정한 의례로, 여기에 단오제를 기반으로 다양한 놀이가 곁들여진다. 신분이나 지체가 불분명한 인물인 한 장군을 중심으로 실존하는 남성을 기리는 놀이가 되며, 구전되는 설화에 따르면, 이 인물은 임진왜란 이전의 인물로, 신라 또는 고려시대의 인물로 추존하기도 한다. 한장군은 여성과 깊은 관련을 가지며, 그 인물은 누이라고 되어 있기도 하고, 여성의 도움에 의하여 목적을 달성하는데 있어서 간절한 수단으로 바로 여성의 춤에 의존하는 특징을 가진다.
경산자인단오제 유래는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마한조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 기록에 ‘항상 오월에 씨뿌리기를 마치면 귀신에게 제사했다. 무리로 모여 노래하고 춤추면서 술 마시기를 밤낮을 쉬지 않았다. 수십 명이 함께 한 가지로 몸을 일으키면서 서로 따르면서 땅을 밟고 몸을 낮추고 위로 솟구쳤는데 손과 발이 서로 어울리게 하였다.’(常以五月下種訖 祭鬼神 羣聚歌舞 飮酒晝夜無休 其舞 數十人俱起相隨 踏地低昻 手足相應)는 것을 보아 단오제와 일치한다. 단오제를 거행하는 때가 모를 파종하는 시기와 부합하고, 남녀가 군취가무하며 여원화의 꽃을 신성하게 여기면서 감사뚝대를 중심으로 놀며 꽃을 쟁취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경산자인단오제의 실제적 기원과 유래는 구전설화에 의존하고 있다. 단오제 기원의 구전설화는 대체로 ‘한장군(韓將軍)과 여원무(女圓舞)의 전설’, ‘송림동(松林洞) 동제와 동제장(洞祭場)’, ‘대종동(大宗洞)의 진충묘(盡忠廟)와 동제’, ‘한 장군의 누이’, ‘버들못과 참왜석(斬倭石)’, ‘개장지 숲(桂林)과 새못(三政池)’ 등으로 여러 지역의 제보자에 의해서 다채롭게 증언된다. 여러 가지 구전설화가 있으나, 이와 같은 설화를 종합하게 되면 〈한 장군놀이〉의 기원설화를 간추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 장군놀이〉의 기원을 말하는 이야기를 종합하면 그 내용이 추려질 수 있다. 시기를 특정하기 어렵지만 왜구가 도천산(到天山)에 은거하면서 고을 사람들을 괴롭히자 한 장군은 누이와 함께 이를 섬멸할 계교를 내고 거짓으로 놀이판을 벌이고 왜구를 유혹하였다. 한 장군의 뜻대로 구경꾼 중에는 도천산에서 내려온 왜구의 무리도 섞여 있었다고 한다. 왜구들은 처음에는 경계하는 눈치였으나 여원무(女圓舞)의 열기에 눈이 팔리고 풍악의 흥취에 넋을 잃고 동참하게 되었다. 그 때 가운데 서 춤을 추던 한 장군이 큰소리로 무엇이라고 고함을 쳤다. 함성이 일어남과 함께 왜구의 무리들은 칡으로 만든 그물에 휘말려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모조리 죽여 저 연못에 던져라.” 아름다운 꽃 춤의 주인공은 무서운 장군으로 바뀌어 외쳤다. 무당과 구경꾼들의 손에는 모두 비수를 들고 이를 휘둘러서 결국 이들을 처단하게 되었다. 그물에 휘말린 왜구의 무리들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차례로 쓰러져 갔다. 춤추던 이도 구경꾼도 모두 한 장군이 미리 배치해 두었던 무사였다고 하며, 칡으로 만든 그물도 미리 깔아 두었던 전략이었다. 왜구의 무리들은 떼죽음을 당했고 못물은 핏빛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못둑에는 왜구의 무리를 벨 때의 칼자국이 남은 바윗돌이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참왜석(斬倭石) 혹은 검흔석(劒痕石)이라고 부른다. 그 후 이 고장에는 한 장군을 모시는 사당이 생겼고, 해마다 단오절에 제사를 모시어 성대한 놀이가 벌어졌으니, 이것이 곧 ‘〈한 장군놀이〉’의 기원이 되었다.
경산자인단오제의 사제자는 호장의 성격을 가진 관원이다.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고을사람이 모두 참여하는 일정한 의례이고, 일정하게 관원의 기를 내세워서 행렬한다. 한 곳에만 한 장군을 기리는 묘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곳에 분사가 있어서 고을굿의 성격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연주되는 음악의 기본이 되는 것은 춤 가락에 있으며, 흔히 길매구 가락과 덧뵈기 가락을 중심으로 모든 굿과 행렬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경산단오제는 제와 굿, 굿과 춤, 남성 추모와 여성 춤이 하나로 어울리는 종합적 제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경산자인단오제의 근간은 수릿날에 하는 것이며, 농경을 주술적으로 기원하는 놀이에서부터 유래된 것으로 이른 바 ‘감사뚝’을 섬기는 남녀상합에 의한 농경의 예축의례와 같은 농경 고양의 성장 의례일 가능성이 있다. 다른 지역이 《강릉단오제》의 ‘굇대’와 같을 섬기면서 오월제전을 기리듯이 이 지역에서는 감사뚝을 중심으로 하는 일정한 주술적인 놀이를 거행하는 것이 기본적 면모이다. 이와 같은 의례는 주술적 기원을 담은 것으로 이른바 수릿대 또는 솟대를 세우고 이 주위를 돌면서 남성과 여성의 집단적으로 노래하고 춤을 추는 것이다. 이는 일련의 생식력을 고양하려는 방법이었다. 이것은 서유럽일대에서 행하는 오월대(May Pole)를 두고 벌이는 생식의례와 유사하며, 남녀가무의 열기와 남녀성교를 하면서 생식력을 고양하던 전례와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경산자인단오제는 〈한 장군놀이〉, 〈여원무〉, 〈한 장군 행렬〉, 〈단오굿〉, 〈자인팔광대놀이〉 등으로 구성된다. 원래 전승되는 과정이 이처럼 독립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다. 분사 지역이 있으니 여러 곳의 분사 지역을 탐방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장군 행렬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한 장군놀이〉와 〈여원무〉가 서로 분리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러한 놀이는 각기 시대를 달리하면서 〈여원무〉는 신라시대부터 비롯되었다고 하고, 〈한 장군놀이〉는 나중에 첨가된 것처럼 구전되는데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시대의 적층이 이루어지고 놀이가 분화되면서 생긴 현상으로 이해된다. 1960년대까지 분사된 한 장군의 사당은 다음과 같다.
소재지 | 편액 | 속칭 | 동제일시 | 신격 | 참여지역 | 비고 |
자인면(慈仁面) 서부동(西部洞) 재정지 |
진충사 (盡忠祠) |
한당 (韓堂) |
단오일 사시 (端午日 巳時) |
증판서한장군신위 (贈判書韓將軍神位) |
구자인군(舊慈仁郡) 칠면의 전동민 |
한장군묘로 면면이 신앙하던 옛무덤을 1970년에 이장하였다. |
자인면 북사동 (慈仁面 北射洞) |
없음 | 없음 | 없음 | 한장군 누이 | 구자인군(舊慈仁郡) 칠면의 전동민 |
일제말 왜경에 의해 철거되다. 장군의 갑주가 전해오고 있었다고 한다. |
진량면 마곡동 (珍良面 麻谷洞) |
한묘 (韓廟) |
한묘 (韓廟) |
단오일 자시 (端午日 子時) |
증병조판서한장군 한씨 낭자 신위 (贈判書韓將軍韓氏娘子神位) |
현내(현내), 광석(廣石), 마곡(麻谷) 삼개동 | 한장군의 자씨(姉氏) 혹은 매씨(妹氏) 사당이라고 한다 |
자인면 원당동 (慈仁面 元堂洞) |
없음 | 한당 (韓堂) |
단오일 자시 (端午日 子時) |
증판서한장군신위 (한장군 누이) |
원당동 | 매씨 배향 (妹氏 配享) |
용성면 대종동 (龍城面 大宗洞) |
진충사 (盡忠祠) |
한당 (韓堂) |
단오일 자시 (端午日 子時) |
증판서한장군종유신위 (贈判書韓將軍宗愈神位) |
대종(大宗), 괘일(掛日), 용전(龍田), 용천(龍川), 가척(加尺) 육동 | 매씨 배향 (妹氏 配享) |
용성면 송림동 (龍城面 松林洞) |
없음 | 한장군 매씨사당 |
단오일 자시 (端午日 子時) |
한장군 한장군 누님 |
인근 일대 (隣近 一帶) |
일제말기에 기독교인들을 시켜 철거하여 지금은 ‘돌다무레기’(돌무덤)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
진량면 자문동 (珍良面 紫門洞) |
없음 | ? |
? |
한장군 |
인근 일대 |
일제 말기에 훼철되었다. |
이상의 분사된 지역적 개황을 통해서 경산자인단오제는 고을굿의 특징을 온전하게 갖추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자인면과 진량면이 모두 동참하여 한 장군이나 한 장군 누이를 섬기는 당을 설립하고 이들을 위한 유가식 제의와 무속식 제의를 벌이고 있음이 확인된다. 재래의 민요적인 율조로 하는 특정한 신을 맞이하는 특정한 노래가 한문으로 된 것이 있으므로 이를 주목해야만 한다. 신을 맞이하는 영신사(迎神詞) 또는 강신사(降神詞)의 내용 가운데 구전으로 전하는 것과 새롭게 창조된 것의 노랫말이 한자로 전하는데 김매는 소리조로 하였다고 한다. ‘어진 산이여 옛날부터 묘사가 있었네 한 장군의 영험함이여 영결종천하여 쉬시라(예전의 전승 자료임, 仁之山兮 古有廟 將軍靈兮 永訣休)’와 ‘적군 병사를 섬멸함이여 나라를 지킴이여 칼을 날려서 돌에 피묻힘이여 혈흔이 돌에 남았도다(1968년에 창조된 것임, 殲敵兵兮 護國兮 宛刀石兮 血痕留)’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축문과 다르다고 하고, 〈논매는소리〉조로 하는 신맞이 노래라고 하는 점에서 주목해야만 한다. 《단오굿》이 막바지에 도달하는 대목에서 특징적인 일이 벌어진다. 《단오굿》의 경우에는 신라시대부터 전승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고 전한다. 특히 3년두리로 3년마다 한번씩 무당을 불러 큰굿을 했는데 1920년부터 그마저 전승이 단절되었다고 한다. 그때는 먼저 ‘장군덤’이라고 하는 곳에 가서 여기에 인사를 바치는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장군덤을 아이들은 ‘따깽이’라고 이르는데 이것은 뚜껑이라고 하는 뜻이다. 장군덤은 개울가의 절벽 위에 흡사 뚜껑 모양으로 된 거대한 암석이 놓여 있고, 이것은 한 장군이 가져다 덮었다고 전승 경위를 가지고 있다. 옆에 있는 한 장군 누님이 계시는 곳에 가서 인사를 드리는데 현재는 아무것도 없고 잡목이 무성한 암석만이 전한다. 여기에 가서 인사를 하고 쇠를 치고 난 다음에 버드나무 숲의 한장군 사당으로 와서 《단오굿》을 연행하였다고 말한다. 〈여원무〉는 여원화를 중심으로 춤을 추는 것이 요점이다. 〈여원무〉를 추게 되면 그 안에 화랭이 출신으로 남성이 여장을 하고 꽃을 두고 이를 차지하는 놀이가 벌어지게 된다. 여원화는 신성하게 간주하여 이에 대한 금기가 행해진다. 단오제를 지내기 전에는 사람들은 못 근처에 접근하지 못하나, 《단오굿》이 끝나는 무렵에는 남녀노소를 묻지 않고 꽃송이를 따가기에 혈안이 될 정도이다. 이 꽃송이를 몸에 품고 가서 집에 두면 풍년, 제액, 치병 등의 효험이 있다고 하는 믿음에서 비롯된 주술적인 행위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마무리하는 대목에서는 도리깨로 타작하여 여원화는 그 모습마저도 없어지게 된다.
특정한 곳에서 이룩된 고을굿의 전통과 수릿날의 주술적 기원이 합쳐지면서도 유교적 의례의 속성을 가진 것들이 복합되면서 독자적인 의례적 면모로 확장된 것을 보게 된다. 여화원의 춤과 함께 파장이 되면 꽃을 두고 모든 사람들이 환호작약하면서 꽃을 쟁취하는 것은 《강릉단오제》에서 보이는 〈꽃맞이노래〉의 영산홍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풍요증식의 성격을 보인다. 탈놀이의 성격까지 가미된 것을 보게 되면 경산자인단오제의 규모나 위용이 단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규모나 성격의 측면에서 《강릉단오제》의 성격과 비교될 수 있는 점이 있으며, 특히 《영산단오제》와 가장 가까우면서도 차별화되는 특징을 갖추고 있음이 드러난다.
국가무형문화재(1971)
김택규, 『한국농경세시의 연구』, 영남대학교 출판부, 1985.
김헌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