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납(嗩吶/鎖吶/瑣㖠), 새납, 호적(胡笛/號笛), 날라리, 철적(鐵笛), 금가(金笳), 금구각(金口角)
나팔형 금속 장치 동팔랑을 연결한 나무 관대에 서(舌, reed)를 꽂아 부는 관악기
중동지역에서 발생하여 중국을 통해 한반도로 유입되었다. 포크숌(folk shawm)으로 분류하며, 타지키스탄, 인도, 터키 등지에서는 원추관의 목관악기 형태로, 네팔, 티베트, 중국에서는 나무 관대에 금속 확성 장치가 더해진 모습으로 발견된다.
이 악기를 중국에서는 쒀나(嗩吶, suǒnà) 또는 호적(胡笛)으로 부르는데, 한자 ‘嗩吶(쇄납)’은 중동지역의 발음을 한자로 옮긴 것이고, ‘호적’의 ‘胡(호)’는 이 악기가 중국의 변방에서 유입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명칭은 악기와 함께 한반도로 전해져, 태평소를 가리키는 이칭(異稱)으로 자리 잡았다. 태평소와 관련한 가장 오래된 국내 자료는 고려 말기 문신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포은집』에 수록된 시(詩) 「태평소」이다. 이 시에서는 군대 악기로서의 태평소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후 『조선왕조실록』에 병조(兵曹)와 예조(禮曹)의 안건으로 등장했고, 성종대 『악학궤범』에 ‘당악기(唐樂器)’로서 그 모습과 사용처가 기록되었다.
① 구조와 형태 나무 관(管)대와 소리 증폭을 위한 동팔랑(銅八郞), 입김을 불어 넣기 위한 동구(銅口)와 서(舌, reed)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관대는 주로 대추나무, 장미나무와 같이 단단한 목재로 만드는데, 취구에 가까울수록 좁고, 멀어질수록 넓은 원추형으로 깎는다. 나무의 속을 파내고 앞면에 일곱 개, 뒷면에 한 개, 총 여덟 개의 지공(指孔)을 뚫어 선율을 연주할 수 있도록 한다. 음색과 음량을 결정짓는 동팔랑은 놋쇠나 구리를 사용해 반구형(半球形) 나팔 모양으로 만든다. 궁중에서 사용할 때는 동팔랑 끝에 구멍을 뚫어 색술이나 노리개를 달아 품격을 더했다. 입을 대는 취구 부분에는 금속으로 이루어진 조롱목, 동구에 겹으로 된 서를 끼워 소리 낸다. 서는 전통적으로 갈대를 깎아 만드는 것이 원칙이지만, 오늘날에는 음색과 내구성 때문에 플라스틱 빨대를 사용하기도 한다. ② 음역과 조율법 음역은 중려(仲:A♭4)부터 중청황종(㶂:E♭6)까로, 한 옥타브 반을 조금 넘는다.
③ 구음과 표기법 구음은 악곡을 가르치거나 선율을 되짚기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악기의 음고와 주법 등을 고려하여 의성화한 음악 언어이다. 태평소의 구음은 궁중음악과 민속음악에서 다르게 나타나는데, 궁중음악에서의 구음은 피리의 구음법과 동일하다. 특정한 규칙은 없고 ‘시루’ㆍ‘루러’ 등 피리와 같은 주법을 쓸 때는 피리의 구음을 차용한다. 민속음악에서의 구음은 ‘따리리’, ‘띠라’ 등 ‘ㄷ’, ‘ㄹ’의 자음을 다수 활용한다. 태평소 선율을 악보로 기록한 것은 1940년대부터이다.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 제2기생인 이병성(李炳星, 1909~1960)은 궁중음악 〈대취타〉를 율자보에 기호를 병기하여 채보하였다. 이후 1970년대 당시 국립국악원장이었던 김기수(金琪洙, 1917~1986)가 태평소 악보를 정간보로 정리하여 오늘날까지 전한다. 현재 사용하는 《종묘제례악》의 태평소 악보 역시 이 시기에 정립된 것이다. 최근에는 교육 및 연구를 위하여 오선보로 채보되고 있다. 민간에서 연주되는 태평소 음악은 악보에 기록하는 대신 구전으로 전한다. 최근에는 연구 및 교육을 위하여 정간보 또는 오선보로 채보하기도 한다.
④ 연주방법과 기법 취구와 가까운 쪽 관대에 왼손을 올리고, 동팔랑 쪽에 오른손을 놓는다. 왼손 엄지로 뒷면의 지공을 막고, 왼손 검지ㆍ중지와 오른손 검지ㆍ중지ㆍ약지ㆍ소지를 사용하여 앞면 지공을 여닫는다. 소리를 낼 때는 서를 아랫입술 중앙에 놓고 위ㆍ아랫입술을 말아 물고 조롱목에 입을 바짝 붙인다. 서의 떨림에 의해 관대 속의 공기기둥이 진동하여 소리를 낸다. 궁중음악에서는 몸과 악기가 직각이 되도록 들고 서서 연주하는 것이 원칙이다. 특징적인 연주 기법으로서 피리 주법인 요성(搖聲)과 혀치기ㆍ더름치기 등을 공유한다. 요성은 입김을 조절하며 악기를 위아래로 작게 흔들어 음의 바이브레이션(vibration)을 만들어 내는 주법이다. 혀치기 기법은 같은 음을 두 번 이상 반복하거나, 음을 짧게 끊어낼 때 쓰인다. 리드(reed)인 서에 혀를 대었다 떼며 관대로 통하는 공기를 차단하여 지속음 사이를 끊어주는 주법이다. 손가락을 대었다가 떼어도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지만, 궁중음악의 경우 손가락의 움직임보다는 혀치기 기법을 우선으로 한다. 더름치기는 내고자 하는 음에 인접한 아래ㆍ위 음을 빠르게 오가며 해당 음을 앞ㆍ뒤에서 꾸며주는 관악기의 특징적인 기법이다. 소위 ‘소리 굴리기’로 표현하는데, ‘굴린다’고 표현할 만큼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여 선율의 화려함을 더한다.
⑤ 연주 악곡 태평소는 야외 행진 및 의전(儀典)을 목적으로 군영과 궁궐에서 연주되었다. 그 흔적으로 남아있는 대표적인 악곡이 〈대취타〉이다. 군영 악기로서의 상징성이 고착되어 《종묘제례악》 중 〈소무〉ㆍ〈분웅〉ㆍ〈영관〉과 궁중무용 〈선유락〉, 〈항장무〉의 반주악대에 편성되기도 하였다.
민속예술에서는 농악, 불교의식, 무속음악 등에 쓰인다. 1986년 출판된 정병호의 조사ㆍ연구 결과를 집대성한 단행본 『농악』에 의하면, 전국에 산재하는 여러 농악대 중 일부가 태평소를 사용했다고 전한다. 현재 농악대에서 연주하는 태평소 가락은 대부분 굿거리장단와 자진모리장단을 활용한 즉흥 선율이며, 이는 전라도 무악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외에도 지역에 따라 〈능게취타〉나 〈메나리〉와 같은 악곡을 부르기도 한다.
불가(佛家)에서는 행진과 무용반주에 태평소를 사용한다. 불교의식의 시작인 ‘시련(侍輦)’은 가마(輦)로 의식의 대상을 마중하는 절차인데, 행진하는 가마 앞에서 〈대취타〉를 연주하는 태평소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불교무용인 작법무(作法舞)의 반주음악도 담당한다. 악곡은 〈염불〉ㆍ〈천수〉ㆍ〈능게〉ㆍ〈요잡〉 등으로, 이름만 다를 뿐 선율은 거의 같다.
태평소가 시나위 합주에 편성된 것은 전라도의 태평소 명인이자 여성국극단 악사로 활동한 방태진(方泰珍, 본명 泰根)과 한일섭(韓一燮)에 의해서이다. 이외에도 경기의 지영희(池瑛熙), 동해안의 김석출(金石出) 등의 명인을 거쳐, 〈태평소 시나위 독주〉, 〈태평소 산조〉 등 오늘날의 공연 레퍼토리가 완성되었다.
겹서(double reed)와 확성 장치인 금속 동팔랑을 통해 나오는 날카로운 소리가 매우 특징적이다. 다른 국악기에서 찾아볼 수 없는 차별적인 금속성과 큰 음량 때문에, 가야금, 대금과 같은 토착 악기에 비해 늦게 한반도에 유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군대 행진 음악ㆍ국가 제례 음악ㆍ궁중무용 반주ㆍ농악ㆍ불교음악 등 야외에서 연행되는 다양한 전통예술에 활용되었다. 그 중 〈대취타〉는 1971년 ‘국가무형문화재 피리정악 및 대취타’로 지정되어, 궁중 행악의 전통을 잇고 있다. 농악은 1966년 ‘국가무형문화재 농악12차’로 지정되었다가, 1993년 이후 명칭을 변경하고 지역별로 나누어졌으며, 특히 ‘평택농악’은 태평소 연주자를 명예보유자 및 전승교육사로 보유하고 있다. 불교의식으로는 ‘국가무형문화재 영산재’와 ‘수륙재’가 지정되었으나, 보유 기ㆍ예능은 범패, 작법무 및 장엄에 한정된다.
『국조오례의』 『악학궤범』 『조선왕조실록』 국립국악원, 『국악전집』 7, 은하출판사, 1979. 국립국악원, 『피리정악보』, 은하출판사, 2015. 국립국악원, 『한국의 악기1』, 돌베개, 2014. 국립국악원, 『2014 국악기연구보고서』, 국립국악원, 2014. 국립무형유산원, 『아ㆍ태 무형문화유산전당 전시물 제작 설치 사업 –작고보유자 유품 면담 보고서-』, 한국민속학회, 2012. 김우현, 『농악교본』, 세광음악출판사, 1984. 세계민속악기박물관, 『인류의 문화유산 악기로의 여행』, 음악세계, 2010. 전인평,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음악』, 현암사, 2007. 정병호, 『농악』, 열화당, 1986. 양영진, 「불교 수륙재의 악기 활용과 기능 –삼화사ㆍ진관사ㆍ백운사를 중심으로-」, 『공연문화연구』 30, 한국공연문화학회, 2015. 이숙희, 「농악 악기편성 성립의 배경과 시기에 관한 연구: 군영 취타악기와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한국음악연구』 54, 한국국악학회, 2013. 이재혁, 「김석출 호적 산조에 관한 연구: 선율 중심으로」, 중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양영진(梁映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