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동(舞童)놀이, 무동타기, 꽃받기, 꽃나부풍장
농악에서 무동이 추는 춤과 어깨 위에 무동을 올려서 하는 놀이
남사당패와 같은 걸립농악패나 마을농악에서 무동과 새미들이 추는 춤을 말한다. 손춤으로 추는 무동춤이 있고, 어깨 위에 무동을 층층이 올리는 무동놀이가 있다. 이층ㆍ삼층으로 올리는 무동놀이는 단무동, 맛동리, 삼동고리, 기러기사위, 오무동, 칠무동이 있다.
무동은 장악원에 속하여 궁중 연향에서 춤추었던 어린 남자 아이를 가리키기도 하고, 민간에서는 유랑예인집단인 걸립패나 남사당패에 속하여 무동춤을 추었던 아이들이 이에 해당된다. 무동춤은 세시 절기에 행해지는 마을농악이나 마을굿에서 광범위하게 연행되었으며, 전문예능집단인 남사당패의 연행에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춤이었다. 특히 남사당패의 기예(풍물 , 버나, 살판, 어름, 덧뵈기, 덜미) 중 풍물에서 무동들이 무동춤을 추거나, 어깨 위에 올라 기예를 보여주는 무동놀이가 발달했다. 또 마을 농악에서 어린 아이를 곱게 꾸며 무동으로 삼고 어깨에 올려 놀았다.
19세기 후반에 활동한 김준근(金俊根, ?~?)의 그림 〈무동 춤추고〉에서 무동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황성신문』 1899월 4월 3일자 기사에 따르면, 무동춤과 무동놀이는 인기가 많아서 경성 마포의 애오개에 무동연희장(舞童演戱場)이 세워졌고, 경찰이 출동할 정도로 사람들이 운집했다고 한다. 20세기 들어 무동춤은 여러 행사에 선보였다. 경성시민 대운동회에서 “장안사의 무동은 입장 최초부터 이층무(二層舞) 삼층무(三層舞)로써 장내를 순회하고”(『매일신보』 1912. 4. 29.)라 했고, 광무대의 무동에 대해 “그 번화한 장단과 다섯명 계집아해의 재미있게 놀리는 손이 참 많은 사람을 모여들이고”(『매일신보』 1915. 4. 27.)라는 기사가 있다. 또 박람회에서 “여주 이천 등지로서 유수한 무동패를 불러 경기대회의 한 과목으로 순전한 조선고대의 무동 노리를 한다는데 회장 안에서는 물론이오 시중까지도 몇 바퀴를 돌게하여 공진회 개최 중 시중의 활기를”(『매일신보』 1923. 10. 8.) 라는 기사를 보면 당시 무동춤, 무동놀이가 인기리에 연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동춤은 서양 공연물이 수입되고 전통공연예술의 토대가 약화됨에 따라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이후 1960년대에 민속예술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남사당놀이〉가 1964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고, 무동춤과 무동놀이가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이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농악〉(1966), 〈북청사자놀음〉(1967), 〈하회별신굿탈놀이〉(1980), 〈평택농악〉(1985),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안성남사당풍물놀이〉(1997) 등에서 다양한 무동춤이 전승되었다. 무동을 어깨에 올려 놀리는 무동놀이는 전국적으로 연희되고 있으며, 경기 지역 농악을 중심으로 어깨 위에 무동을 층층이 올리는 기예적인 무동타기가 발달한 반면에, 〈북청사자놀음〉이나 〈하회별신굿놀이〉, 마을 농악과 같이 마을굿의 성격이 있는 놀음에서는 어깨 위에 한 명만 올리는 단무동으로 연행한다. 현재 〈남사당놀이〉, 〈평택농악〉, 〈안성남사당풍물놀이〉에서 무동춤과 무동놀이가 활발히 전승되고 있다.
○ 내용
〈남사당놀이〉에서 무동춤은 당산벌림 중 무동놀림에서 추어지고, 개인놀이 후에 무동서기에서도 연행된다. 〈평택농악〉에도 당산벌림에 무동춤이 있고, 후반에 무동놀이가 있다. 〈안성남사당풍물놀이〉에도 초반의 당산벌림 과정에서 무동춤이 있고, 후반의 무동타기 과정에서 무동놀이가 연행된다. 대개 농악 판굿의 마지막 부분에 무동놀이가 화려하게 놀아지며, 뒤에는 채상놀이와 퇴장 인사굿이 있다.
〈북청사자놀음〉의 경우 제5과장에서 무동춤이 있는데, 남녀 어린 무동을 태워 놀린다. 〈하회별신굿탈놀이〉에서는 각시광대가 무동춤을 춘다. 각시광대는 마을의 수호신인 무진생 여서낭신을 상징하며, 주로 길놀이, 대내림의 강신마당에서 무동춤을 춘다. 무동받이의 어깨 위에서 각시탈을 쓰고 흰 명주수건을 휘날리며 춤을 추는데, 무동을 탄 상태로 꽹과리와 채를 들고 구경꾼을 돌면서 걸립을 한다.
〈예천청단놀음〉에서도 무동춤이 등장한다. 다섯 명의 어린 남녀 무동들이 흰색 장삼을 끼고, 무동받이의 어깨에 각각 올라 좌우로 팔을 움직이며 자유롭게 춤을 춘다. 또 전북 〈남원삼동놀이〉는 3명의 무동으로 출산, 성장, 출세하는 과정을 무동놀이를 통해 연희하며, 이를 통해 마을의 안녕과 주민의 단합을 기원하는 마을굿적 성격을 갖는 놀이이다. 이 외에도 무동놀이는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 주요 춤사위 무동이 추는 ‘무동춤’은 대개 손춤이며, 이때 손바닥을 뒤집었다 엎으며 방향을 바꾸는데 깨끼춤이 많다. 또 쾌자 앞자락을 잡고 팔을 들어 추기도 한다.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예천청단놀음〉, 〈북청사자놀음〉에서 추는 무동춤은 양 팔을 들어 손을 자유롭게 흔들며 어깨춤을 추는 춤사위 형태이다. ‘무동놀이’는 무동을 이층 삼층까지 올리는 기예를 뽐내며 추는 춤이다. 이때 일층에서 무동을 어깨 위에 올리는 무동받이가 있다. 특히 무동받이가 무동을 몸 앞으로 한 바퀴 돌려 내렸다가 다시 어깨 위로 올리는 등 곡예적인 연기를 하며 춤추는 동작을 ‘맛동리’(단동고리)라 한다. ‘삼동’(삼동고리)은 일층의 무동받이가 어른 무동을 어깨 위로 올리고, 이층 위에 어린 무동을 올려서 삼층을 만들어 제자리에서 도는 동작이다. 삼층에는 장삼을 입은 어린 새미 무동이 올라간다. 이 삼동을 만들기 위해 새미 무동을 힘차게 던지는 아슬아슬한 ‘기러기사위’도 있다.
‘오무동’(곡마당·논고리·5동고리)은 삼동을 만들고 나서 일층의 무동받이와 이층의 어른무동이 어린 무동 두 사람을 양쪽 옆으로 올려 안쪽 손과 발을 잡아주고, 어린 무동이 바깥 손과 발을 벌리게 하는 것이다. 이 자세로 제자리에서 천천히 돌아가며 놀이한다.
또 삼동에서 1층의 무동받이가 무동 2명을 양 어깨에 올리고 제자리에서 도는 ‘논고리’가 있다. 〈안성남사당풍물놀이〉에는 7무동타기도 있다.
무동은 흰 속곳에 노랑저고리와 붉은 치마를 입고 남색 쾌자를 걸친다. 노란색 띠를 오른쪽 어깨에서, 빨간색 띠를 왼쪽 어깨에서 내려 X 모양으로 매고, 허리에 청색 띠를 맨다. 머리는 뒤로 댕기 머리를 늘어뜨리고, 그 위에 흰 수건을 쓴다. 새미는 절에서 어린 상좌 중을 사미라고 부른 데서 유래됐으므로, 어린 소년인 새미는 흰 바지저고리에 흰 장삼을 입고, 흰 고깔을 쓴다. 오른쪽 어깨에 걸친 발간색 띠를 왼쪽 허리에 맨다.
무동춤은 현재 중부지방의 웃다리농악 계열에서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다. 무동들의 춤은 손춤 동작을 위주로 하는 깨끼춤에 해당되며, 전국의 농악이나 마을굿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무동놀이는 이층 삼층으로 무동을 올려 기예를 선보여 관객의 관심을 끌며, 공간에서 연희를 입체적으로 펼침으로써 놀이판을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예술적 의의가 있다.
남사당놀이: 국가무형문화재(1964) 북청사자놀음: 국가무형문화재(1967) 하회별신굿탈놀이: 국가무형문화재(1980) 평택농악: 국가무형문화재(1985) 안성남사당풍물놀이: 경기도 무형문화재(1997) 남사당놀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2009) 한국의 탈춤: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2022)
국립문화재연구소 예능민속연구실, 『평택농악』, 국립문화재연구소, 1996. 박진태ㆍ이상윤, 『하회별신굿탈놀이』, 도서출판 피아, 2006. 심우성, 『남사당놀이』, 화산문화, 2000. 윤범하, 『안성남사당풍물놀이』, 이가책, 1994. 전경욱ㆍ정수미, 『북청사자놀이연구』, 화산문화, 2001. 정병호, 『농악』, 열화당, 1986.
김영희(金伶姬)